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88)
193화. 사흘의 말미 (1)
저벅.
마침내 이벽과 언미희는 사패련의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련의 겉모습은 반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내부는 잘 정돈되어 있으며 말끔했다.
곳곳에 미세한 전투의 흔적은 남아있었으나.
그것은 불과 며칠 전 ‘참사’가 있었던 장소라고 하기에는 오히려 지나치게 깨끗했다.
다만.
“…….”
‘무언가’가 선천의 힘을 자극했다.
그 기운은 당연하다는 듯 공기 중에 흐르고 있었으며, 퍽 낯설지만은 않았다.
“…불쾌한 냄새가 나네요.”
“그렇군.”
언미희가 말했고 이벽이 답했다.
이제 와서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흑천방과 녹림이 본래부터 한 몸이었다면… 이곳은 이미 ‘혈교의 소굴’이 되어버린 셈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에요. 적어도 더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동감이오.”
무엇이 도사리고 있건.
빼앗긴 것은 힘으로 되찾는다.
패왕의 질서가 무너진 곳에 다시 한번 사파의 법도를 통해 질서를 바로세운다.
나머지는 그저, 스스로 패왕으로 거듭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머리가 나쁘니까요.”
훗, 두 사람은 마주 웃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굳이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고, 앞뜰을 산책하듯 걸음은 가벼웠다.
“크으으……!”
이벽 혹은 비룡대에 은원이 있는 듯, 적의를 숨기지 못하는 몇몇 무인들을 지나쳤고.
“…비, 비룡대주.”
“기어코 여기까지 왔는가…….”
혹은 간간이 각 세력에서 파견된 대표들로 보이는 무리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허나.
어느 누구도 막아서지는 않았다.
추포령을 뚫고서 제발로 이 자리에 도달했으며, 온통 피칠갑을 하고 있다.
포로가 아닌 손님이 되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자유로웠다.
저벅.
그리고 ‘처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일전의 비룡대 선발 당시 천향루주 지소약과 함께 세 사람이 묵었던 곳이었다.
처소는 당연하다는 듯 비어있었으며, 불과 일각도 지나지 않아 잡일하는 하인들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하인들을 따라 각자 몸과 얼굴을 씻었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인들의 손길은 떨리고 있었다.
련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이벽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피를 씻어내고 나자 비로소 서로가 알고 있는 모습이 되었으며, 두 사람은 마루에 앉아 각자의 지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말하는 것은 언미희였으며 이벽은 주로 듣는 입장이 되었다.
“루주님과 고 노야께서 막아섰을 땐… 솔직히 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헌데 두 사람이—”
“…그렇군.”
이야기는 간간이 끊겼다.
허나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또한 남는 시간은 사흘이나 있으므로 이야기를 보챌 이유도 없었다.
여름 바람이 살랑였다.
그리고 서서히 해가 저물었다.
“하아.”
문득 언미희가 깊은숨을 뱉었다.
“이러고 있으니… 이곳이 적진 한복판이란 게 별로 실감이 안 나네요.”
“…그야 엄밀히 말하면 잠시 빼앗긴 것에 불과하니 말이오.”
이벽이 말했다.
“내게 ‘다음 집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소만, 최소한 도적떼들의 손에 계속 맡겨둘 수는 없지.”
“…그렇긴 하네요. 아하하.”
언미희가 잠시 침묵했다.
그것은 물론 ‘모든 것이 잘 풀린’ 경우의 이야기였다. 허나 패배는 곧 죽음이므로,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헌데… 공자가 집주인이 된다면 나는 뭐가 되는 걸까요?”
“…….”
애매한 침묵이 흘렀다.
허나 그때, 꼬르륵 하는 소리가 정적을 으깼다. 흠칫, 언미희의 어깨가 흔들렸다.
“바, 밥은 주겠죠? 아하하…….”
“…안 주면 깽판이라도 쳐야지.”
피식, 이벽이 웃었다.
마침내 적과의 생사결을 앞두고도 거짓말처럼 마음이 고요했으며, 한편으로는 그러한 사실이 퍽 이상하게 느껴졌다.
만일 혼자였다면.
오는 와중에 흘린 피와 더불어 온갖 풀리지 않는 생각들로 깊게 틀어박혀 있을 자신의 모습이 선했다.
“와줘서 고맙소.”
“…네?”
“사실은 전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 되겠지. 일이 잘못된다면 소저께선 가능한 한 도망쳐줬으면 좋겠지만… 어찌 되었건 큰 힘이 되고 있소.”
“…….”
덥석.
언미희의 손이 이벽을 붙들었다.
“…공자. 이제 와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뭣보다 전 아직 아무것도 안 했구요.”
“…….”
이벽은 고개를 돌렸다.
언미희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퍽 크나큰 존재가 되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어색함이 감돌았다.
훅, 언미희의 손이 떨어졌다.
“…우, 우리 비무나 할래요?”
“……?”
“앞으로 사흘간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사실은 제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도 잘 모르겠구요.”
“…….”
적진 한복판에서 비무를 치른다.
퍽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허나.
“좋은 생각이군.”
두 사람은 일어섰다.
그리고 처소를 나섰다.
처소로 향할 때와 마찬가지로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며 누구도 둘을 가로막지 못했다.
과거, 비룡대 선발 친선비무회에 앞서 두 사람은 따로 연무장에서 비무를 치른 적이 있었다.
이내 연무장에 도착했다. 허나.
훙, 후웅.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두 사람이 다가서자 그 존재감을 눈치 챈듯 사내의 도가 멈추었다. 훅, 이벽을 돌아보았다.
“……!”
붉게 충혈된 눈이 바르르 흔들렸다. 이내 서서히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네놈.”
“…….”
목소리는 절벽처럼 거칠었다.
흑천방의 후계자, 맹우강이었다.
* * *
“비켜주겠나?”
이벽이 대뜸 말했다.
“…뭐, 뭐라고?”
“비무대를 쓰고 싶군. 나는 그대들의 귀한 손님이니 이 정도는 요구해도 문제는 없지 않나?”
“…….”
“같이 써도 상관은 없지만, 흑천방의 후예께서 공연히 다칠까 봐 조금 걱정이 되는군.”
이벽의 태도는 안하무인이었다.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도발이었으며, 맹우강 역시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맹우강의 눈꼬리가 파르르 흔들렸다.
꾸욱, 맹우강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힘겹게 웃는 얼굴을 지었다.
“…사흘 후면 갈기갈기 찢겨 죽을 놈이 입만 살았구나. 네까짓 놈이 우리 방주… 아니, ‘련주’님의 십초지적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이벽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부딪혀보면 아는 일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넌 지금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개새끼가!”
후욱, 맹우강이 기세를 뿜었다.
우우웅.
그리고 맹우강의 도가 울었다.
파직, 파지직.
이내 도신에 벼락과 같은 충격과 함께 검붉은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퍽 이질적인 모양새였으나 그것은 분명한 강기였다.
“…와. 놀랍네요.”
언미희가 작게 감탄했다.
그것은 이벽에게도 퍽 의외였다. 그 사이 맹우강에게는 나름대로 성취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돌이켜보면, 맹우강은 과거에도 이미 정사를 통틀어 이벽이 만나본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축에 속했다.
허나.
이벽을 생각에 빠지게 한 것은 맹우강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힘이었다.
‘…혈기.’
그것은 반년 전 그때에도 이미 눈치를 챘던 위화감이었으나, 당시에는 그 정체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허나 이제는 다르다. 또한.
앞서 혈교의 세력으로 의심되는 적들과 부딪힐 때마다, 유사한 기운을 느꼈음을 이벽은 기억하고 있었다.
‘죽여야 하나?’
얼핏 고민이 스쳤다.
허나 그것은 애매한 문제였다.
혈기와 관련된 무공이라면 자신 역시 적파심공과 도살지도를 지니고 있으며, 그 자체만으로 죽일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또한 맹철극이 혈마일 공산이 크다고 해서, 흑천방의 모든 이들이 혈교의 끄나풀이라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다.
“…대단한 성취로군.”
이벽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지? 칭찬이라도 해주길 원하나? 싸우고 싶다면 혼자 번쩍거리지 말고 덤비던가 해라.”
“…크으윽!”
으드득, 맹우강은 이를 갈았다.
굴욕감이 뇌를 짓누르는 듯했다.
패배를 설욕하고자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성취를 이루었으나… 다시 만난 놈은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다시 저 멀리에 가 있었다.
일순 모든 걸 내걸고 싸우고자 하는 충동이 일었다. 허나…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뒈질 놈이다.’
콰득, 맹우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순간의 분노로 무의미하게 목숨을 버릴 순 없다. 애써 분노를 다독이며 물러서려 했다.
허나 그때였다.
후욱, 콰아앙.
“…커억!”
권갑과 도가 부딪혔다.
맹우강의 몸이 훌쩍 밀려났다.
* * *
“아야야…….”
언미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짜고짜 부딪혀 맹우강을 밀쳐냈으나 본인에게도 충격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찌릿찌릿하네요. 아하하.”
“…무슨 생각이시오, 소저?”
“이대로 보내기 아까워서요.”
이벽이 묻자 언미희가 답했다.
“사실은… 개인적으로 설욕할 게 남아있거든요. 왜, 예전 비무회 때 제가 저 녀석한테 형편없이…….”
“…….”
“그리고 흑천방의 후계라면… 맹철극과 같은 뿌리의 무공을 사용할 테니 공자께서 봐둘 가치는 있지 않겠어요?”
“…그렇군.”
이벽은 이해했다. 또한.
언미희를 말릴 이유는 없었다.
그저 조금 의외였을 뿐, 그녀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하는 것이며, 혹여 위험하다면 그때에 끼어들면 그만이다.
콰아앙.
“크아아아—!!”
그리고.
충돌로 밀려난 맹우강이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듯 성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이… 주제도 모르는 계집이—!!”
콰앙, 콰앙.
그리고 격전이 이어졌다.
권갑과 도가 부딪힐 때마다 뇌기가 번쩍였으며, 십여 합이 찰나처럼 스쳐 갔다.
이벽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맹우강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저 내력의 우위만을 내세우던 과거와는 달리, 초식의 약점을 착실히 보완한 모양이었다.
최소한 ‘억지로 찍어낸’ 절정고수처럼 느껴지던 예의 산적들보다는 훨씬 제대로 된 무인이었다.
허나.
콰아앙.
“…커헉!”
맹우강이 다시 밀려났다.
주륵, 입가에 혈선이 그어졌다.
쾅, 콰아앙.
“크, 크윽……!”
그리고 유수처럼 몰아치는 언미희의 공세 앞에 맹우강의 초식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맹우강이 약한 것이 아니라, 언미희가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이었다.
“…….”
그것은 분명.
갓 절정에 이른 수준은 아니었다.
소환단의 내력, 그리고 낙검진천신공의 흐름이 그녀의 마음속에 무엇을 비춰주었는지, 이벽은 물론 알지 못했다.
허나 그녀의 성취는 이벽의 예상을 한참 웃돌았으며, 이미 절정의 완성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콰앙, 쾅, 파지직.
“…아야야.”
다만 그럼에도.
언미희 역시 섣불리 끝장을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충돌 때마다 뇌전의 충격이 누적되고 있는 듯했다.
병기를 타고 기혈에 충격을 준다.
예나 지금이나 흑천방의 비전인 흑천뇌도의 기운은 확실히 상대하기에 성가신 부분이 있었다.
과거 이벽의 경우, 회검식 유의 묘리를 통해 맹우강이 두른 뇌기를 조금씩 깎아내었으며.
또한 최후에는 선천의 힘이 지닌 보호의 공능을 믿고서 청강유엽검식 강검으로 쓰러뜨렸다.
허나.
상대가 맹철극이라면.
“…….”
같은 방식이 그대로 통할지는 의문이었다. 때문에 승패는 더욱 불투명하다.
탓.
“…여전히 성가시네요.”
그때 더 이상은 뇌기를 버틸 수 없다는 듯, 언미희가 진저리치며 뒤로 몸을 빼내었다.
타앙.
“하, 누가 보내준다고 했느냐—!!”
그러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맹우강이 뒤를 따라왔다. 허나 그것은 사실 언미희의 의도대로였다.
후욱.
몸을 뒤로 빼내며, 동시에 그녀의 오른팔이 훅 당겨졌다. 권갑 위로 다시 희미한 강기가 서렸다.
그리고.
언가권, 탄궁(彈弓).
콰아앙.
주먹이 짧게 내질러졌다.
그 순간 주먹에서 포탄과 같은 기세가 뻗어나갔다. 공간을 점하며 성난 멧돼지처럼 달려들던 맹우강의 상체를 두드렸다.
퍼어억.
“커…어억!”
맹우강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194회. 사흘의 말미 (2)
후우욱.
권풍에 가격당한 맹우강의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허공을 가르며 밀려나고 있었다.
충격은 무거웠다.
가슴팍은 흡사 쇳덩이에 짓이겨진 듯했으며 목구멍에서는 핏물이 울컥 솟구쳤다.
허나 그럼에도.
맹우강은 믿을 수 없었다.
비룡대주 이벽은 이미 절정마저 넘어선 것이 확실시되었으며, 그 혹독했던 수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허나… 일전에는 손쉽게 가지고 놀 수 있었던 계집이 자신과 같은 절정의 성취를 이루었으며, 심지어 추월당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접전을 펼치고도 상대와의 실력 차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맹우강의 무재(武才)가 낮지는 않았다.
“…크.”
치이익.
맹우강의 발이 연무장의 땅을 긁었다. 하릴없이 날아가던 몸이 가까스로 멈춰섰다.
“크… 으악, 으아아아악—!!”
맹우강이 기함했다.
걸레짝이 된 자존심의 발로였다.
우우웅.
그리고 있는 힘껏 강기를 끌어올렸다. 파지직, 맹우강의 도가 맹렬한 불꽃을 일으켰다.
콰아앙.
도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순간 언미희가 선 자리에서 돌연 벼락이 번쩍였다.
거리를 점하여 상대를 강타한다.
그것은 일찍이 파진성을 제압했으며, 이벽을 상대로도 펼쳐졌던 흑천지뢰진의 초식이었다.
허나 강기를 머금은 초식의 위력은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위력적이었으며, 맨땅을 일 척 가까이 파헤쳤다.
“이, 이 천박한 년이… 감히, 감히 잘도…! 계, 계집 따위에게 이 맹우강이…! 크하아아압!”
콰앙, 콰아앙.
벼락이 연이어 번쩍였다.
허나 그 힘은 애꿎은 땅을 파헤칠 뿐, 단 한 번도 언미희를 맞추지는 못했다.
타앗, 탓.
애당초 언미희는 친선비무회 당시 맹우강과 이벽의 비무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벼락은 찰나와 같아도 도의 움직임을 통해 그 방향을 읽어낼 수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가권, 탄궁(彈弓).
다시 권풍이 쏘아졌다.
원거리에서의 공격을 고집한다.
그것은 즉, 접촉만으로 혈로에 직접 충격을 가하는 흑천뇌기를 상대하기 위한 언미희의 판단이었다.
콰아앙.
“하! 알량한 짓거리를—!!”
허나 그 순간, 시커먼 구름과 같은 기운이 일어나며 맹우강의 몸을 덮었다.
언미희의 권풍을 막아내었다.
그 역시 일전의 비무에서 이벽의 공격을 막아내던 ‘호신강기’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콰앙, 쾅.
계속해서 벼락이 내려치고 권풍이 쏘아졌다. 언미희는 피했으며, 맹우강은 막아내었다.
지지부진한 반복이 이어졌다.
허나 수십여 합이 지나자 이내 서서히 눈에 띄게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크윽… 헉……!”
맹우강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애시당초 공격과 회피에 최소한의 힘만을 사용하는 언미희와, 절초에 호신강기까지 남발하는 맹우강의 소모되는 내력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끝이군.’
이벽은 직감했다.
아마도 맹우강은 일전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절치부심 스스로를 갈고닦았을 것이다.
허나 그러한 노력이 허무하게 깨지자 다시 내력에만 의존하던 옛날 모습이 나오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인으로서 보았을 때 최소한 남궁세가의 창천옥룡 남궁환보다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슬슬 끝인가요?”
언미희 역시 끝을 직감한 듯했다.
“하지만 모처럼의 설욕전인데… 내력의 고갈로 승패를 짓자니 조금은 싱겁긴 하네요. 아하하.”
“허억, 헉… 닥쳐라! 감히 누구에게 그딴 망발을! 네깟 년 따위, 제대로 맞추기만 하면—!”
“…그런가요?”
타앗.
그 순간, 줄곧 먼 곳에서 권풍만을 쏘아대던 언미희가 훅 거리를 좁혔다.
“그럼 어디 한 번 부딪혀보죠.”
“…큭?!”
당황한 맹우강이 전력으로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벼락이 감도는 두터운 먹구름이 온몸을 감쌌다.
타앗.
허나 언미희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지켜 보는 입장에서 퍽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허나 이벽은 끼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언가권, 개갑(鎧甲).
다음 순간, 언미희의 상체 곳곳에 자잘한 빛무리가 서리기 시작했다.
마치 비늘처럼 일어난 작은 강기들이 서로 이어지며 언미희의 상체를 촘촘히 감쌌다.
‘…호신강기.’
그 또한 호신강기였다.
허나 동시에 그 강기는.
단순한 ‘호신’의 용도가 아니었다.
콰직.
마침내 맹우강과 충돌하기 직전, 언미희의 오른발이 힘차게 진각을 밟으며 축을 형성했다.
빙글.
그리고 몸이 반 바퀴 회전했다.
다음 순간, 호신강기가 둘려진 언미희의 어깨와 등이 그대로 맹우강의 정면을 밀쳤다.
파직, 콰아아아앙.
“커헉!”
신체의 모든 부위가 병장기인 권법가에게는… 몸을 두른 호신강기란 곧 공격의 수단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호신강기가 충돌한 순간, 맹우강의 구름이 산산이 흩어졌다.
“큭… 커억!”
신음과 함께 비척비척 밀려났다.
쿠당탕. 털썩.
그리고 일장 가까이 뒷걸음치던 맹우강이 마침내 주저앉았다.
“우웩, 우웨엑!”
한 바가지나 되는 피를 토했다.
풀썩, 그리고 그대로 쓰러졌다.
* * *
“어… 맹 소협?”
언미희가 말했다.
“혹시 죽으셨나요?”
“…….”
허나 맹우강에게서는 어떤 대답도, 미동도 없었다. 이벽과 언미희가 쓰러진 맹우강에게 다가섰다.
맹우강의 안색은 창백했으나 호흡은 이어지고 있었으며 눈이 감겨져 있지도 않았다.
“…살아있으면 왜 대답을 안 하나? 죽은 척이라도 해서 상황을 모면할 생각이었나?”
이벽이 말했다.
슥, 맹우강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냥 죽여라.”
눈빛은 공허했다.
“목숨을 구걸하기도 싫어졌다.”
“…….”
“네놈은커녕 저따위 계집에게 실력을 따라 잡히는 삶이라면… 무인으로서 계속 살아봤자 어차피 별 볼일도 없겠지.”
마음의 축이 꺾여버린 그 눈빛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퍼억, 그때 언미희가 옆구리를 걷어찼다.
“커헉!”
맹우강의 몸이 휘어졌다.
“거 아까부터 듣기 거슬리게 자꾸 이 계집 저 계집… 듣는 계집 슬슬 화나니까 그만 하세요.”
“…….”
“그리고… 고작 한두 번 깨졌다고 우는 소리하지 말고요. 한심해서 확 사타구니를 밟아 으깨버리고 싶어지네.”
잠시 침묵이 일었다.
스윽.
맹우강이 조용히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생살여탈의 순간 앞에서 이벽은 고민에 잠겼다. 허나 여전히 결론은 내리기 쉽지 않았다.
“맹우강, 너는 혈교도인가?”
고로 본인에게 물어보았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그리고 맹우강이 답했다.
이벽과 언미희는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최소한 거짓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소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하하. 공자 뜻대로 하세요.”
이내 두 사람은 피식 웃었다. 서로의 생각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 자리에 공손수가 있었다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그리고 맹우강을 향했다.
“지금은 살려주지.”
“…뭐?”
살인에는 신중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흑천방의 후계씩이나 되는 이가 아무런 보호도 없이 ‘죽여보라는 듯’ 눈앞에 있는 이 상황은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의도일 수도 있다.
“네 목숨이 죽어 마땅한 목숨인지 아직은 판단이 서질 않는군. 우선은 조금 더 살아있도록 해라.”
“크핫… 커헉!”
맹우강이 웃었다.
그 와중에 다시 피가 터져 나왔다.
“커헉… 헉! 어이가 없군. 사흘 후면 죽을 놈이 잘난 듯이 자비를 베푸는 꼴이라니… 네놈에게 ‘나중’ 같은 게 있을 거라 생각하나?”
“패배자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않나? 죽이고 싶지 않을 땐 죽이지 않는다. 그것이 패왕가의 방식이었고 또한 내 방식이다.”
“…….”
슥, 맹우강이 움직였다.
비틀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킨 뒤 이벽을 마주했다. 표정은 퍽 복잡했다.
“…애석하군. 네놈만큼은 언젠가 반드시 내 손으로 쓰러뜨리고 싶었는데.”
“좋을 대로 해라. 언제가 되었건 내게 도전하고 싶다면 받아주도록 하지.”
“…….”
이벽은 물론.
사흘 후 죽을 생각이 없었다.
“…흥.”
맹우강이 코웃음을 쳤다. 잠시 초췌한 안색으로 이벽과 언미희를 바라보다가 이내 돌아섰다.
“…살려줘서 고맙단 말은 안 할 거다. 다만 그쪽 계집은 사흘 후에 죽기 싫어지면… 그때는 나를 찾아라.”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하하, 꽤 친절하시네요.”
언미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 비룡대 선발 비무회 때 맹 소협이 그랬었죠? 곁에 두고서 나를 두고두고 귀여워 해주겠다고…….”
“…….”
이벽은 왠지 화가 났다.
비척비척, 멀어지는 맹우강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 * *
“자 그럼.”
언미희가 말했다.
“어떤가요, 공자? 비무할까요?”
“…괜찮겠소? 쉬지 않아도?”
“그럼요. 아하하… 생각보다도 어렵진 않았네요. 이제 겨우 몸이 풀렸을 뿐—”
꼬르륵.
“…속도 풀린 모양이군.”
“…그, 그냥 내일 할까요?”
피식, 두 사람은 마주 웃었다.
그리고 처소로 돌아가 식사를 한 뒤 잠을 이뤘다. 잠자리는 거짓말처럼 편안했다.
챙, 채앵.
“핫! 하앗!”
다음날, 두 사람은 다시 연무장을 찾았다. 그리고 약속대로 비무를 겨루었다.
“핫하! 공자, 이번에도 방심했—”
훅.
언미희의 이마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이벽은 청강유엽신법 쾌의 묘리로 몸을 빼냈다.
“…공자, 민첩해지셨네요.”
“소저야말로 많이 유연해졌소.”
언미희의 무공은 새삼 놀라웠다.
그녀에게 있어 절정의 깨달음이란 단지 강기의 유무가 아닌, 경지의 부족함으로 사용하지 못하던 몇 가지 비전 초식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계기인 듯했다.
쾅, 콰앙.
“그럼 계속 갑니다!”
“…….”
공격은 때때로 예상치조차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으며, 마치 온몸이 잘 제련된 금속의 무기와 같았다.
아니, 그것은.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으나.
권갑이 아닌 맨몸 곳곳에서 강기가 발현되기 시작한 이상… 더는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의 사실’이 되었다.
챙, 채앵, 콰아앙.
이내 이벽은 조금이나마 경시하던 마음을 버렸다. 그리고는 가진 검식들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그것은 목천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무엇을 해도 그녀가 다치지 않으리란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챙, 채앵.
“…핫.”
그리고 그것은.
퍽 즐거운 일이었다.
이벽은 문득 죽고 사는 것과 관계없이 이토록 ‘즐겁게’ 비무를 펼친 것이 퍽 오랜만임을 깨달았다.
이후 사흘간.
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함께 잠들고, 일어나 식사를 한 뒤, 온종일 비무에 열중했다.
서로의 성취에 감탄했고.
무리에 관한 생각을 공유했다.
그것은 마치 적진 한복판이라는 작금의 상황조차 잊어버린 듯한 하루하루였다.
그리고 그사이 련내에는 계속해서 각 세력의 대표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걔 중에는 두 사람에게도 낯이 익은 이들 역시 끼어있었으나 누구도 둘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신 사패련의 개파식을 앞두고서, 두 사람의 존재는 마치 기름에 섞이지 않는 물처럼 둥둥 떠 있었다.
허나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누구의 간섭도 없는 사흘을 보낼 수 있었으며, 그것은 이벽에게 있어 화정촌에서의 생활을 떠올리게 할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콰아앙.
이벽의 몸이 훅 밀려났다.
검을 흔들어 충격을 털어내었다.
“…쳇.”
언미희가 혀를 찼다.
“결국은 사흘 내내 단 한 대도 못 맞췄네요. 뭐, 공자의 성취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수고했소. 아마 내 생각에 소저라면 머지않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군.”
“…빈말이라도 기분은 좋네요.”
그것은 물론 빈말이 아니었다.
어쩌면 언미희의 재능은 자신을 포함해 그간 만나온 어느 누구보다도 우위에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선천의 힘이나 목천의 경지에 대한 것을 섣불리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전달하려 들었다간, 오히려 깨달음을 방해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무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연무장을 떠나 처소를 향했다. 허나 돌아가는 길에는 퍽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것은 사흘간의 짧은 유예기간이 끝이 났으며, 또한 서로 해야 할 말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죽는다면 도망쳐주시오. 정말로 맹우강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벽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리고 한동안 언미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소저에게도 갚아야 할 은원이 있음은 알고 있소만… 이 자리에서 같이 죽는 건 역시 무의미하지 않겠소?”
“…생각해볼게요.”
이내 언미희가 답했다.
“당장 몸을 피해서 나중에라도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요. 하지만.”
“…….”
“확답은 안 할 거예요. 공자가 행여나 포기해버리지 않도록 계속해서 부담을 줘야 하니까요.”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언미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공자, 사흘간 즐거웠어요.”
“나도 그렇소.”
그것은 새삼 이상한 이야기였다. 생사결을 앞둔 적진에서 두 사람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 버렸다.
“그, 그러고 보니 말인데요.”
다시 언미희가 말했다.
“예전에 수가 그랬었는데… 저더러 공자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하라고… 혹시 기억하나요?”
“…그런 얘기는 잘 모르겠소.”
“…그, 그렇군요.”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이내 처소가 머지 않은 곳에 나타났다. 허나 그때 덥석, 언미희가 이벽의 소매를 붙들었다.
“공자, 저는 공자의 뭘까요?”
“…그게 무슨 말이오?”
“저는 이제 비룡대원도 아니고 하오문도도 아니며 하물며 사파무인이라 하기도 어렵잖아요?”
“…….”
“제 입장은… 저는 대체 뭐죠?”
퍽 당황스러운 질문이었으며.
상황에 적절치 못한 이야기였다.
허나… 어쩌면 이러한 상황이기에 더욱 확실히 해둬야 하는 질문일 지도 모른다.
이벽은 답을 고민했다. 허나.
“…그것도 잘 모르겠군.”
“…….”
“하지만… 차차 알아가면 되지 않겠소? 죽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같이 있을 수 있을 테니.”
“…그건 그러네요.”
마침내 소매가 풀려났다.
핫, 언미희가 작게 웃었다.
머쓱한 기분이 들어 이벽은 하늘의 달을 보았다. 문득 만월무변심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이벽의 머릿속에는 문득 초연서가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던 팔절구궁필법의 기예가 스쳐 지나갔다.
“…….”
만월과 삭월.
팔절구궁필법의 묘리는 휘어짐으로써 상대를 끌어당기거나, 혹은 상대에게 이끌려 가거나에 있다.
허나 그것은.
동시에 이뤄질 수도 있다.
서로를 끌어당기고 끌려간다.
초식의 묘리가 벼락같이 스쳤다.
“핫.”
“…왜 웃어요?”
“별 이유는 없소.”
생사결을 앞두고서.
다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허나 물론, 죽어선 안 될 이유는 그 외에도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리고.
이내 개파식의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