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04)
210화. 몸 안의 검 (2)
“성장이 지나치게 빨랐으니, 그 과정에서 ‘보지 못하고’ 지나친 무언가가 있단 뜻이 아닐까?”
“……!”
이벽은 생각에 잠겼다.
제갈소미의 말에는 분명 이렇다 할 근거는 없었으되, 무언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이진천과 자신은 똑같은 창공비검을 펼쳤으나, 일방적으로 파훼당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떠한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목천(目天)이란.
하늘을 보는 것이다.
허나 등천(登天)의 깨달음이란.
아무리 시간을 길게 늘어뜨린다 한들… 어쩌면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비로소.
단계가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군.”
이벽은 답했다.
그것이 실제로 옳건 그르건.
이진천의 낚싯대에 쓰러진 이래 느닷없이 던져진 양자택일의 선택지 앞에서 처음으로 ‘생각해볼 만한 단서’가 생긴 셈이었다.
잠시 제갈소미를 바라보았다.
“도움이 되었다 사저. 고맙—”
“…에이씨.”
빠악.
제갈소미의 주먹이 이벽의 정수리를 두드렸다.
“…고맙다는데 왜 때리나?”
“흥, 말로만 고마우면 다냐?”
제갈소미가 고개를 들었다.
저녁하늘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서럽다 서러워~ 어느 욕심쟁이 녀석은 절정을 찍고도 만족을 못 해 나날이 쭉쭉 강해지는데… 아무래도 나는 큰 뜻 한 번 펼쳐보지 못하고 이렇게 시골문파 식순이로 늙어 죽나 싶다~”
“…….”
이벽은 할 말을 잃었다.
제갈소미의 푸념 섞인 목소리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퍽 구분하기 어려웠다.
분명한 것은.
그녀의 오성이나 검에 대한 재능은 분명 이벽으로서도 섣불리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수준이었다. 허나.
낙검진천신공을 얻는 것.
‘마음의 돌’을 찾아내는 것은 무재와는 별개의 이야기이며, 오직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저벅.
그때였다.
저만치에 우두커니 서 있던 혁대웅이 다가왔다. 털썩, 마찬가지로 제갈소미의 우측에 나란히 앉았다.
“저기… 사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넌 또 왜, 곰탱아.”
“아하하, 그게… 예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말야. 사저는… 만약에 내력을 되찾는다면 이 마을을 떠나고 싶어?”
목소리는 퍽 조심스러웠다.
“…훗. 글쎄?”
제갈소미가 코웃음을 쳤다.
“뭐, 감히 이 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도나 깔짝이면서 진법서나 외우게 만든 가문에 보란 듯이 떵떵거리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
“…….”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원래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막상 집을 뛰쳐나오고 나니… 무림이란 게 어린 계집이 신세 조지고 팔려 가기 딱 좋은 곳이더라고.”
사형제 간에 침묵이 감돌았다.
세 사람은 모두 각자의 이유로 단전을 잃었고, 이진천에 의해 주워졌다.
그리고 이벽은 선우세가에 배신당한 자신의 과거를 밝혔으나, 두 사람은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며.
또한 서로에게 묻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실 이제 와서는 큰 뜻 따윈 아무래도 좋아. 그저 내가 ‘할 수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고 싶을 뿐이지.”
제갈소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뭣보다 이제 와선 식순이 생활이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말야. 다시 세가로 돌아가면 할 일도 없고 밥이 너무 기름져서 아마 배탈로 죽어버릴걸?”
“그, 그렇지?”
혁대웅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허나 제갈소미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나도 모르겠다 이젠. 이미 칼끝에 꼬라박은 인생, 이러다 꼬부랑 할망구가 되어서 소일거리도 못 하게 되면 큰일이긴 하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
“괘, 괜찮아!”
혁대웅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때는 내가 먹여 살려줄게!”
“…뭐어?”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빠악, 다음 순간 제갈소미의 주먹이 이번에는 혁대웅의 정수리를 두드렸다.
“누가 누굴 먹여 살려? 에이, 네 앞가림이나 제대로 해라, 이 미련한 곰탱아. 힘도 제대로 못 쓰는 게 건방진 소리하네.”
“…난 진지한데.”
“아 됐고. 이 식순이 사저가 정 불쌍하면 어디 가서 싸구려 보약이라도 한 첩 달여와서 그런 얘기 하던가. 응?”
“…….”
“에효효, 자칭 약장수란 인간을 문주로 모시면서 인삼 한 뿌리 못 먹고 사는 신세 참 기구하구나~”
피식, 제갈소미가 웃었다.
“…하핫.”
그리고 그 웃음은 이벽에게로 번졌으며, 혁대웅 역시 마지못해 머리를 긁으며 웃고 말았다.
웃음소리가 겹쳤고.
이벽은 문득 소속감을 느꼈다.
검에게는 돌아갈 검집이 필요하듯, 인간은 관계 속에 머무르고 관계 속에서 흐른다.
그것은 새삼스러운 이야기였다.
허나 그 순간 이벽은 비룡대를 떠올렸다. 웃음이 끊겼고 표정이 작게 흔들렸다.
“…….”
저녁 하늘의 달이 밝았다.
그것은 사패련에서 최후의 일전이 있기 전날 밤, 언미희와 함께 바라봤던 달과 다르지 않았다.
“벽아,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벌떡, 이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다 잠시만 기다려주겠나?”
“…뭐? 왜?”
“그러고 보니 줄 게 있었다.”
드륵.
이벽은 처소로 향했다.
그리고 한켠에 던져둔 짐 더미 속에서 퍽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주머니를 꺼냈다.
다시 두 사람에게로 돌아왔다.
“뭔데 그게?”
제갈소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무슨… 보약 같은 거니?”
혁대웅이 물었다.
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의 소환단이다.”
쿨럭, 제갈소미가 기침했다.
“…뭐? 어디의 뭐라고?”
“내, 내가 잘못 들은 거지, 벽아?”
“소림의 소환단이다.”
“…….”
“…….”
* * *
과거, 이벽은 우여곡절 끝에 숭산 소림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방장의 사형에 해당하는 학승 혜공선사에게 대환단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방장 혜능선사의 정중한(?) 요청에 의해 다시 소환단 다섯 알로 바뀌었으며.
이벽은 그중 세 알을 비룡대원들에게 나눠주었고, 사형제들의 몫으로 나머지 두 알을 남겨두었다.
“…말도 안 돼. 너 그거 어디서 났어? 어디서 문주 같은 사이비 약장수한테 속아서 바가지 쓴 거 아냐?”
제갈소미가 쏘아붙였다.
드물게도 당황한 목소리였다.
“그럴 리는 없다. 소림의 방장에게서 직접 받은 물건이니까. 또한 효능도 이미 검증되었다.”
“쿨럭!”
이번에는 혁대웅이 기침했다.
“벽아… 너 북두천존을 만났어?”
“그럴 일이 있었다.”
“꼬맹이 너… 대체 바깥에서 뭘 얼마나 화려하게 들쑤시고 다녔던 거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이벽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꿀꺽, 제갈소미가 침을 삼켰다.
“치, 치워, 얼른!”
허나 다음 순간, 질끈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안 받을 건가?”
“그, 그래. 그런 귀물을 공짜로 얻었을 린 없고. 보나 마나 꼬맹이 네 목숨값일 텐데, 단전도 없는 내가 그걸 삼켜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
“나, 나도 마찬가지야 벽아. 마음만 받을게. 아하하…….”
“…….”
둘은 짐짓 관심이 없는 척했다.
허나… 이벽은 두 사람의 시선이 힐끗힐끗 주머니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관심이 없을 리 없다.
휙, 이벽은 주머니를 집어 던졌다.
타앙.
“허어억!”
“아아악! 미친놈아!”
그 순간 제갈소미와 혁대웅의 몸이 튀어 올랐다. 근소한 차이로 제갈소미가 한발 빨리 주머니를 붙들었다.
쿠당탕.
“컥!”
혁대웅이 빈손으로 땅을 굴렀다.
“훗, 느리다고, 곰탱아.”
“…….”
혁대웅의 눈앞에서 제갈소미가 의기양양하게 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핫, 이벽은 작게 웃었다.
문득 눈물을 글썽이며 소환단을 냅다 씹어 삼키던 파진성의 거무튀튀한 얼굴이 떠올랐다.
“어찌 되었건 필요 없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이니, 두 사람이 알아서 보약으로 먹던가… 팔아서 살림살이에 보태던가 해라.”
“…건방진 꼬맹이 같으니. 감히 하늘 같은 사저에게 이런 모욕감을 줘?”
제갈소미가 뾰족한 눈을 했다.
저벅저벅, 이벽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오히려 좋아.”
“…….”
슥슥, 이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기특한 막내, 그렇게 처치 곤란이라면야… 이 사저가 일단 맡아뒀다가 나중에 어른 되면 돌려줄게. 사저 믿지?”
“…거 고맙군.”
문질문질, 뺨을 비볐다.
“아유, 예쁘다, 우리 막내! 사내가 셋인데 뭐라도 비싼 걸 가져오는 놈이 딱 한 놈뿐이네! 내일은 맛있는 거 해줄게! 이리 와, 이 사저가 뽀뽀라도 해줄까?”
“그, 그건 안 돼—!!”
“…왜 곰탱이 네가 정색을 하냐?”
“아, 아무튼 안 돼! 안 된다고!”
“…훗.”
이벽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낙검문의 밤이 깊었다.
가을은 스치듯 지나갔으며 바람은 나날이 차가워졌다. 어느덧 또 한 번의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 * *
“그래, 각오는 됐냐, 막내야?”
이진천이 말했다.
“…네, 문주님.”
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자리한 곳은 이진천의 약방이었으며,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벽에게 처음 낙검진천신공의 추궁과혈이 주어졌던 그 날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허나.
찢어지고 망가져 버린 이벽의 혈로를 다시 열어주었던 그때와는 달리.
오늘의 이진천은 이벽에게서 ‘검을 도로 빼앗겠다’고 하였다.
“끌끌, 하지만 결국은 후회할 거다. 하늘을 바라보다 땅으로 처박힌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기분 더러운 일이거든.”
“…….”
“내키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둬도 된다. 솔직히, 나도 이게 잘하는 짓인지는 잘 모르겠구나.”
스산한 찬바람이 불었다.
이벽은 잠시 눈을 감았다.
불안이 이벽의 뼈마디를 스쳤다.
‘몸 안의 검을 도로 빼앗는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다시 약해진다’고 하였다.
고로 이벽은 밤낮으로 고민했다.
허나… 마음은 결국 기울어졌다.
제갈소미의 말마따나 무언가 ‘보지 못한 채’ 지나쳐온 것이 있으며, 그것이 날아오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깨달음이라면.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맞다.
손에 피를 묻힌 주제에 평범하고자 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하늘 위의 존재로 거듭나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벽은 지난날들을 생각했다.
언제나 절벽으로, 혹은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새로운 무언가를 손에 넣어 다시 올라서곤 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낙검진천신공이란 어쩌면.
‘낙검(樂劍) 혹은… 낙검(落劍).’
불현듯 잊고 있던 화두가 스쳤다. 이벽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이진천의 웃는 낯을 바라보았다.
“…핫.”
이내 이벽 또한 작게 웃었다.
교차하는 웃음 속에서 마침내 이진천의 ‘마지막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추락할 용기를 내었다.
“부탁드립니다, 문주님.”
“그래, 알았다, 막내야.”
우우웅.
다음 순간, 이진천의 손이 희미하게 빛을 내었다. 그리고.
퍼어억.
이벽의 아랫배를 파고들었다.
우우웅.
그리고 서늘한 무언가가 몸 안으로 파고든다고 느끼던 바로 그때였다.
쩌저적.
“……!”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몸 안의 피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졌고 오한이 일었다. 덜덜덜, 온몸이 거칠게 경련했다.
딱, 따닥.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혔다.
그것은 마치 극독과 같았다.
허나 일찍이 독왕 당평세의 내독 앞에서도 어떻게든 저항하던 선천의 힘이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
‘…아니, 그게 아니다.’
이내 그마저 착각임을 깨달았다.
선천의 힘이 저항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선천의 힘 그 자체’가 얼어붙고 있었다.
이내 이벽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선천의 힘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뼈를 갉아내는 듯한 냉기 속에서 이벽의 의식이 아득해졌다.
이진천의 쓴웃음이 스쳤고, 무어라 말을 하는 목소리도 스쳤으나 이내 양쪽 다 희미해졌다.
툭, 이벽의 몸이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