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27)
233화. 하오문주 (2)
“…혈마로군요.”
이벽의 입에서 ‘혈마’라는 말이 흘러나온 순간, 월향의 표정이 작게 흔들렸다.
“솔직히 말씀드려야겠죠?”
허나 이내 곧 미소를 회복했다.
“사실은 저희로서도 소협께서 알고자 하는 ‘혈마’의 정체나 행방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요.”
“…….”
“전(前) 수호대주께서 ‘스스로의 죽음’을 암시하셨을 때…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건 저희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리고 월향은 이벽이 무림을 떠난 이후 지난 오 년간 사파무림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오 년 전, 흑천방주 맹철극은 신 사패련의 개파식에서 이벽에게 패배했고.
이어지는 사태 속에서 그의 정체가 혈교의 사술에 의해 조종된 ‘강시’였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이후.
죽은 줄로만 알았던 패왕 혁군악이 살아서 나타났으며, 혼란에 빠진 사패련을 다시 수습했다.
한때 패왕가에 등을 돌렸던 사파세력들이었으나, 패왕은 그들 대다수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허나 물론.
흑천방은 와해 되었다.
또한 그 지지 세력이나 녹림을 비롯하여, 혈교에 가담했거나 협력한 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추적과 청산에 들어갔다.
“허나 그럼에도 적지 않은 잔당들이 추격을 빠져나갔죠. 대개는 새외로 도망쳤고, 혹은 정파무림으로 몸을 숨긴 이들도 있어요.”
“…….”
“다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죠. 흑천방과 패왕가, 전(前) 사대세력 중 두 곳이 존재감을 잃은 판국에, 패왕 홀로 사파의 질서를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니까요.”
“…그렇군.”
“하지만요.”
월향이 말을 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날… 소협의 스승의 손에 의해 ‘혈마’는 죽었고, 사파무림 내에서 혈교 세력은 종적을 감췄다는 거예요.”
“…….”
이벽은 그때, 죽은 맹철극의 손에 붙들려 함께 추락했었던 사패련 지하에서의 싸움을 떠올렸다.
스스로를 혁군악의 호위무사였다고 주장하며 철창 안에 갇혀있던 사내는 돌연 ‘혈마’임을 드러냈고.
이진천과 접전을 펼쳤다.
그러다 결국은 죽음을 위장하고 있던 혁군악의 기습에 의해 옆구리를 꿰이고, 이진천의 검에 목이 떨어졌다.
“혈마는 죽었고, 혈교는 와해 되었으니 어찌 되었건 당장의 혼란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죠. 헌데… 수호대주께서는 여전히 ‘혼자만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어요.”
“…….”
“늘 그렇듯이 그분께선 약장수의 신분으로 중원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무언가에 ‘대비’하는 듯했어요. 허나 정확히 무엇을 위한 일인지는… 저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죠.”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때가 되었다는 듯 ‘되살아난 혈마’가 이진천을 찾아왔으며, 두 사람은 경천동지할 싸움을 벌였다.
이벽은 물론.
그날의 일을 기억했다.
생각하지 않고자 무던히도 노력했으나… 정말로 잊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이진천을 상대하던 그 존재는… 사패련의 지하에서 보았던 먼젓번의 혈마 따윈 우습게 느껴질 정도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었으며.
살아있는 모든 것을 씹어 삼킬 듯한 그 흉악한 기운은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혈마’였다.
“…….”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쳤다.
어쩌면… 사패련 지하에서 죽음을 맞이한 첫 번째 혈마는 그저 ‘가짜’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다면.
그 죽음으로 인하여 흑천방과 녹림을 비롯해 사파무림에 뿌리 내렸던 혈교 세력들이 그토록 쉽게 와해 될 이유는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황당무계한 일이죠?”
다시 월향이 말했다.
“죽은 줄 알았던 혈마가 갑자기 몇 년 만에 되살아났고… 더더욱 강해져서는 기어코 우리 대주님께 ‘복수’를 해내고 말았으니까요.”
목소리에는.
메마른 웃음기가 담겨있었다.
“그리고는… 심지어 다시 종적을 감춰버렸어요. 말 그대로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안개처럼 사라져버렸죠.”
“…….”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날, 이벽은 이진천에 검에 짓이겨지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뱀처럼 땅을 기어 사라졌던 그 존재를 떠올렸다.
“…아무런 단서라도 없소?”
“…단서라.”
월향이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오히려 제가 소협께 묻고 싶을 정도인걸요. 저희는 그저 ‘전해 들었을 뿐’, 그분의 최후를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니까요.”
“…….”
“혈교는 사라졌고, 잔당들은 모두 흩어졌어요. 물론, 혈마의 시신까지 저희 손으로 처리했죠. 헌데 이제 와서 혈마가 되살아났다니… 솔직히, 아직도 귀신에게 놀아나는 기분이에요.”
훅, 방안을 비추는 등불이 일렁였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함께 흔들렸다.
그리고 이벽은 당황했다.
설마 하오문에서 이렇게까지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할 거라 생각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하하…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이거 하오문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요.”
그런 이벽의 속내를 짐작한 듯, 월향이 뺨을 긁었다. 문득 그녀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대주께서도… 그렇게까지 끝끝내 모든 걸 혼자 짊어진 채 떠나실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
낙검문주 이진천은.
자신의 ‘사적인 일’에 대해 관여하지도, 복수하지도 말라는 말을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남기며 눈을 감았다.
마찬가지로.
수호대주로서의 이진천 역시 수호대의 동료들에게 어떤 내막도 이야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나.
이벽은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
하오문조차 단서를 잡지 못할 정도로 그 행방이 묘연하다면… 사형제들 역시 아직은 혈마에게 닿지는 못했을 것이며.
또한 어쩌면 혈마는 그날 이진천에 의해 입은 상처를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따라서.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허나 공자, 이 말씀을 드리는 게 옳은 일인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자’는 더는 사파무림에는 없다고 생각해요.”
허나 그때였다.
문득 월향이 목소리를 달리했다.
“…그건 갑자기 무슨 말씀이시오? 분명 조금 전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다고 하지 않았소?”
“네, 단서는 없어요. 하지만요.”
월향의 눈이 바닥을 향했다.
“‘정파무림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절대로 개입하지 말라.’ 그것이… 전 수호대주께서 저희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이셨으니까요.”
“……!”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개입하지 말라는 말은… 즉 ‘무슨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이진천은, 자신의 스승은.
대체 무엇을 알고, 무엇과 싸우고 있었으며, 또한 어째서 그 모든 것을 감춘 채 떠나버렸는지, 새삼스런 의문이 치솟았다. 허나.
“…고맙소, 문주.”
“천만에요.”
알아야만 하는 게 있다면.
이제부터 알아가면 그만이다.
이후 이벽은 이곳 회택을 거쳐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간 사형제들의 행방과 함께,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그리고.
“어찌 되었건, 이제부터 나는 혈마의 뒤를 쫓고자 하오.”
다시 이벽이 말했다.
“허나 그 이전에, 하오문 수호대주로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나 책임져야만 할 무언가가 있다면 지금 가르쳐주셨으면 좋겠군.”
“어, 네……?”
일순 월향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푸훗, 이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재미있네요.”
“…뭐가 말이오?”
“정말로 안 닮았다 싶어서요. 전 수호대주님께선… 문주인 제 명령 따윈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으니까요.”
“…….”
“아무리 이름뿐인 문주라지만 어찌나 제멋대로던지… 가끔 마음 같아선 꽁꽁 묶어서 밀실에 가둬두고 싶은― 어머, 아하하하.”
월향이 머쓱한 웃음을 뱉었다. 허나 소매에 가려진 웃음소리는 서서히 작아지다가 이내 공기 속에 흩어졌다.
“…….”
문득 이벽은 생각했다.
언제였던가, 천향루주 지소약은 이진천에 대해 ‘흠모’하고 있노라 말했던 적이 있음을 떠올렸다.
하오문주와 수호대주.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며, 멋대로 캐물어도 좋을 일은 아닐 것이었다.
“…흠흠, 그러니 대주께서 신경 쓰실 일은 딱히 없답니다.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해왔으니까요.”
“…그렇군.”
“무엇보다도… 정말로 혈마가 이 땅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그 잠재적인 혈겁을 막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겠지요. 그러니.”
표정을 정리한 월향이 말했다.
“오히려 미욱하나마 저희의 힘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아셨죠?”
“…….”
꾸벅, 이벽은 고개를 숙였다.
해야 할 말은 대강 나누었으므로, 자리에서 일어난 뒤 이내 방을 나서려 했다. 허나.
“…하지만 소협.”
월향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엔 외람되지만요… 혈마의 뒤를 쫓기에, 현재의 소협은 충분히 강한가요?”
* * *
이벽은 천향루에서 새벽을 마저 보냈다. 이내 동천에서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낮이 되었다.
떠들썩한 거리와는 달리.
주루의 낮은 오히려 고요했다.
지나치게 화려한 별실에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음을 다스리는 한편 이벽은 고민에 잠겼다.
월향의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나는… 충분히 강한가?’
그러한 질문에.
이벽은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그날, 자신은 이진천과 혈마의 일전에 감히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물론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이벽은 목천의 기예를 다시 손에 넣었으므로, 그저 속수무책으로 잡아 먹히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그러한 ‘재앙’을 상대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잘해봤자 몇 합을 버틸 뿐.’
이벽은 스스로를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역부족임을 시인했다.
또한 이유는 명백했다.
그것은 이진천, 그리고 혈마와는 달리, 자신의 무공이 아직 ‘하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등천(登天)의 경지.
하늘로 나아가기 시작한 힘.
그것은 그저 ‘새로운 시간’을 열었을 뿐인 목천의 경지와는 다시 전혀 별개의 경지였다.
그리고.
그때의 그 싸움 속에서.
새로 얻어낸 목천의 감각으로 말미암아 이벽은 마침내 그 지고한 경지의 정체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가속화된 시간을 넘어.
일신과 일검의 한계마저 넘어.
그것은 주변의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자연의 기운 자체를 자신의 무리 안에 포함하고 다루는 힘이었다.
이벽은 주변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포함해 자신을 삼켜버리려 들던 ‘붉은 뱀의 아가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그 붉은 뱀조차 베어버렸던 이진천의 창공비검, 그리고 최후의 ‘검은 낙엽’을 생각했다.
‘…낙검진천.’
낙엽이 떨어졌고.
하늘이 울부짖었다.
그것은 창공비검이되 창공비검 아니었으며,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다시 뱉어내었다.
그리고.
눈을 떠버린 검은 기운을.
이진천은 억제하지 못했다.
“…….”
그간의 이벽은.
이진천의 유언에 따라 가능한 한 잊어버리고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허나 이제는.
힘을 필요로 했다.
다만 눈으로 보았다고 한들 깨달음은 아득하기만 했으며, 혹은 그 ‘낙엽’ 만큼은 어쩌면… 애시당초 ‘손에 넣어선 안 될 힘’일지도 모른다.
“…후우.”
이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식, 이내 서툰 웃음을 흘렸다.
무려 하오문주를 만났음에도 뜻밖에 혈마에 대한 단서를 전혀 얻지 못했다.
허나 그 대신.
‘단서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
―‘그 사람’이라면… 어쩌면 소협이 알고자 하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월향의 입에서 낯설지 않은 이의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이벽은 말 그대로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허나 생각해보면.
스스로 그러한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던 게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타당한 이야기였다.
비록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은 이’이라 해도, 다른 단서따윈 없으므로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드륵.
다시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 이벽은 방을 나섰다. 주루에 손님이 본격적으로 몰려들기 전에 이곳을 떠날 심산이었다.
“잘 가요 공자, …아니, 대주님.”
“…….”
그때, 소리도 없이 담 위에 걸터앉은 초연서가 이벽을 향해 살포시 손을 흔들었다.
“…전(前) 대주님을 생각하면 대주님을 바깥으로 보내는 게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꾸벅.
이벽은 초연서를 향해 포권했다.
그리고 마침내 천향루의 문을 나섰다. 낯익은 회택의 거리를 지나 마침내 산속으로 나아갔다.
허나.
채 반 시진도 나아가기 전이었다. 또 한 명의 낯익은 수호대원이 이벽의 앞길을 막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