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42)
248화. 아미의 위기 (2)
그것은 사흘 전의 일이었다.
축시를 지나는 야심한 시각, 아미파의 본거지에 해당하는 복호사(伏虎寺)에 불현듯 수십 명의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적들은 청성 혹은 그 속가에 해당하는 무인들이었으나, 난데없는 적습에 아미파의 여승들은 그러한 사실조차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이내 장문인 정진사태를 포함한 모든 아미의 문도들은 제압되었고, 본단은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게 전부요?”
“…그, 그렇습니다.”
“…….”
정연화가 조심스레 답했다.
이벽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것은 그다지 석연치 않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비록 당대의 정파무림이 구 무림맹과 정도맹, 의혈맹으로 삼분되어 서로를 경계하고 있다곤 해도.
정도를 표방하는 청성이 어째서 밑도 끝도 없이 야습 같은 짓을 자행했는지,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물며 점창의 장로까지 나섰다.
이는 즉, 청성만의 돌발행동이 아닌 ‘정도맹’ 차원의 행보라는 뜻이다.
또한.
제아무리 아미를 비롯한 구 무림맹 세력의 위세가 위축되었다 한들, 그 또한 뿌리 깊은 정도무파였다.
변변찮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고작 하룻밤 만에 허무하게 제압당했다는 것 역시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놈들이… 독을 풀었습니다.”
허나 그때, 그런 이벽의 낌새를 눈치챈 듯 금령사태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독 말이오?”
“그렇습니다, 대협. 놈들은 본산의 물길에 미리 산공독을 풀고, 은밀하게 제자들을 중독시켜 내력을 쓰지 못하게……!”
크, 금령사태가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보름 전부터 경내를 벗어나 있던 두 사람만이 운이 좋게 중독을 피했고, 가까스로 달아날 수 있었다.
허나 결국은 추적에 걸려들고 말았고, 그렇게 현재에 이르렀다.
“…그렇구려.”
생각해보면.
조금 전, 이벽은 개울물에서 미세한 독기를 감지했고 그로 인해 이 여인들을 구해낼 수 있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허나.
‘청성이… 독을 풀었다?’
역시 모든 게 석연치는 않았다.
허나 여인들에게서 딱히 거짓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벽은 이내 질문을 바꾸었다.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었소?”
“…네? 그게 무슨?”
“이유야 어쨌건… 청성이 아미를 점거했으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면 무언가 달리 요구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오?”
“……!”
정연화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시선이 금령사태를 향했으나, 눈이 마주친 금령사태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분 대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살아도 산 몸이 아닐 것이다. 이제 와 그러한 일을 숨긴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렇군요. 과연 사고의 말이 옳습니다.”
이내 정연화가 입을 열었다.
“놈들은… 중독된 제자들을 인질 삼아 소림과 개방을 배신하고… 저희 아미로 하여금 비밀리에 정도맹의 뜻에 따를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그것은 역시.
이벽의 짐작과 다르지 않았다.
즉, 작금의 사태는 단순히 문파 차원의 충돌이 아닌 구 무림맹과 정도맹 사이에 펼쳐지는 ‘세력 다툼’의 일환인 것이다.
동시에.
이벽은 다시 난처함을 느꼈다.
그것은 섣부른 마음으로 끼어들 만큼 가벼운 일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지금의 자신은 혈마를 추적하는 일이 시급하다.
허나.
구 무림맹의 ‘몰락’은.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이자 기둥의 한 축이었던 취풍신개의 죽음과 결코 무관할 리 없었으며.
고로 자신 역시 그 책임에서 무관하지 않았다.
“…….”
침묵 속에서.
이벽은 생각을 정리했다.
타닥, 탁.
피워놓은 불길만이 타올랐다.
“…저희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협.”
그때, 지혈을 마친 금령사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권과 함께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은공께 예가 아님을 알지만… 갈 길이 멀어 사정이 여의치 않음을 이해해주십시오. 이 은혜는 본산을 되찾은 뒤 언젠가 꼭—”
“어디로 가실 셈이오?”
“…예?”
이벽이 다시 물었다.
“도움을 요청한다면 소림… 혹은 개방이겠지. 허나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닐뿐더러, 어떻게든 사람을 모아온다 한들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후가 아니오?”
“…….”
그리고 지체된 시간은.
곧 제자들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심지어는 모든 게 너무 늦어버린 후일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금령사태와 정연화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뿐이다.
“솔직히 난처하군.”
다시 이벽이 말했다.
“두 분의 처지에는 나름대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소만, 나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소. 그러니… 나와 ‘거래’를 하지 않겠소?”
* * *
“우연찮게도… 나는 개방에게서 다소의 도움을 얻고자 하는 입장이오만, 아마도 그쪽에서 지금의 나를 그리 달가워하진 않을 것 같소.”
이벽은 설명을 이었다.
“고로 두 분께서는 추후 개방과의 대화에 있어 나를 도와주겠노라 약조하신다면, 나 역시 지금의 아미를 도와드리겠소.”
“…….”
두 여인의 눈이 흔들렸다.
물론, ‘아미를 돕는다’는 말의 의미를 선뜻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부디 제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대협께서 지금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신지—”
“물론, 문 내를 점거한 적들을 몰아내 주겠단 의미요.”
“…호, 혼자서 말인가요?”
“그렇소.”
정연화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으나, 이내 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물론, 도박이오.”
이벽이 다시 말했다.
“아미를 점령한 이들 중 생각보다도 강한 이가 섞여 있다면… 물론 내가 패배할 수도 있지. 그건 당연한 일이오.”
“…….”
“허나 어느 쪽이건 가능성이 희박한 건 마찬가지라면, 보다 많은 피가 흐르기 전에 내게 걸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소?”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대협.”
내심 황망함을 다스린 금령사태가 말을 받았다.
“대협의 고강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저희는 대협께서 어떤 분이신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섣불리 그런 제안을—”
“…….”
슥.
불현듯 이벽이 죽립을 벗었다.
일순 금령사태의 말이 끊겼다.
목소리를 통해 그리 나이가 많은 이가 아님은 알았으나, 죽립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상상 이상으로 젊은 사내였다.
“나는 이벽이라 하오.”
불길이 헌앙한 얼굴을 비추었다.
“…이벽?”
정연화가 무심코 되뇌었다.
그것은… 비록 최근의 기억은 아니었으나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이내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흔들렸다.
“…나, 낙검신룡?”
“…….”
그것은.
이벽조차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던 별호였다. 머쓱한 기분이 스쳤으나 어찌 되었건 이벽은 부인하지 않았다.
“……!”
이내 두 여인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은 과거,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로 절정에 올라 ‘천하제일 후기지수’로서 온 무림을 떠들썩하게 했던 무인의 이름이었다.
허나.
그마저도 시작에 불과했다.
본디 사파 출신으로서, 한때나마 사패련주 혁군악의 후계자로 알려졌으며, 정파무림에서는 소림방장 북두천존과 개방주 취풍신개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즉, 무려.
강호의 정상에 군림하는 열 명의 거인들 중 세 명씩이나 그 후기지수를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세상에.’
그리고 그제서야.
정연화는 ‘아미를 돕겠다’는 이벽의 말이 문자 그대로의 진심임을 이해했다.
그는.
천하의 남궁세가를 봉문까지 몰고 갔으며, 단신으로 사패련에 불어닥친 혈겁을 막아내었다고도 알려진 이였다.
그 시절부터 이미 무림에서 통용되는 여러 가지 상식들을 아득히 벗어난 존재였으며.
다시 그로부터 오 년이 지났다. 불현듯, 정연화는 조금 전의 일전을 떠올렸다.
땅속에 박혀있던 검신이 이벽의 손이 닿기도 전에 ‘스스로’ 움직였으며, 불과 한 호흡만에 청성의 무인들을 모두 쓰러트려 버렸다.
그것은 역시.
눈속임 따위가 아니었다. 또한.
천존과 신개의 비호를 받았다 함은… 지금 이 순간, 의혈맹과 정도맹, 어느 쪽도 아닌 ‘가장 확실한 우군’이라는 뜻이었다.
‘이건… 어쩌면!’
다음 순간,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무릎과 허리가 저절로 숙여졌고, 쿵, 정연화는 땅 위로 이마를 부딪쳤다.
흠칫.
이벽의 표정이 흔들렸다.
“대협, 아니, 은공!”
“…이, 일어나시오.”
* * *
“…여, 연화야?”
금령사태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허나 정연화는 이미 확고한 결심을 세운 뒤였다.
“사고, 소림과 개방으로의 전달은 사고께 부탁드릴게요. 저는… 이분을 믿어보려 해요!”
“…….”
금령사태는 곤혹스러웠다.
낯선 사내 하나를 믿고 사지로 뛰어든다. 나이 어린 사질이 그러한 위험을 짊어지는 것을 좌시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비록 목숨을 구명 받기는 했으나, 저 젊은 사내가 진짜 비룡대주인지조차 아직 검증되지 않은 채였다.
“좋소. 그럼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움직이지. 길 안내를 부탁드리겠소.”
“예, 은공!”
허나 말릴 새조차 없었다. 타앗, 정연화가 곧바로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사고, 부디 몸조심하세요! 상처도 꼭 의원에 들러서 제대로 치료받으셔야 해요!”
“…자, 잠깐! 잠깐 연화야! 차라리 내가—!”
타다닷.
허나 다음 순간, 정연화는 이미 경신공을 펼쳤으며, 저 앞을 향해 멀어져 버린 후였다.
“…대, 대협, 아니, 은공!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저 아이를……!”
“걱정 마시오. 그저 길 안내를 받을 뿐이니. 싸움에 나서는 일은 없게 하겠소.”
타앙.
다음 순간, 이벽의 몸 또한 쏘아졌다. 단 일보 만에 정연화의 옆을 따라잡은 후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황망함에 빠진 금령사태를 뒤로 한 채 나란히 경신공을 펼쳤다.
타다닷.
정연화는 전력을 쥐어짰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있을 아미의 식구들을 생각하면, 단 한 순간도 지체할 수는 없다.
“…헉, 허억!”
그러한 마음과는 달리, 이내 머지않아 그녀의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기실 추격을 피해 도망쳐오는 와중에 이미 대부분의 내력을 소진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물론 쉬어갈 수는 없었다. 설령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된다 해도 지금만큼은—
“힘들어 뵈는군. 업히겠소?”
“…헉, 네, 네에?!”
허나 그때였다.
이벽의 물음과 동시에 정연화의 몸이 흔들렸다. 하마터면 땅을 구를 뻔했으나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했다.
“아, 아니요, 은공! 그럴 수는—!”
“사태가 시급하지 않소?”
“……!”
정연화의 눈이 흔들렸다.
불자의 몸으로서 사내의 몸에 함부로 접촉할 수는 없다. 허나 물론,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때는 아니다.
“그, 그, 그럼……!”
정연화가 어색하게 다가섰다. 덥석, 그 즉시 이벽이 그 몸을 업어 들었다. 그리고.
타앙.
그 즉시 쾌보를 펼쳤다.
쐐애애애액.
“…헉!”
그 순간, 가공할 속도감이 정연화를 휩쓸었다. 본능적으로 이벽의 목덜미를 감쌌다.
‘이, 이게 무슨……?’
주변의 풍경이 마치 실타래처럼 일그러졌다. 현기증을 느낀 정연화가 질끈, 눈을 감았다.
“중앙의 저 봉우리가 맞소?”
“…네, 네?!”
다시 이벽이 말했다.
그제서야 눈을 뜬 정연화는, 어느덧 바로 저만치에 익숙한 모양의 봉우리들이 다가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밤의 어둠 속에 쌓여있었으나.
평생을 살아온 봉우리를 몰라볼 수는 없었다. 그 중앙에 있는 것은 분명, 아미파가 자리한 금정봉이었다.
“…네. 맞아요, 은공.”
이내 얼이 나간 목소리로 답했다.
반나절 내내 온 힘을 다해 도망쳤던 거리가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에 좁혀져 버렸다.
“그렇군.”
이벽이 대답했다. 그리고.
탕, 쐐애애액.
다시 한번 쾌보가 펼쳐졌다.
“…….”
정연화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허나 그 와중에도 문득 생각이 스쳤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속도를 내고 있음에도… 사내의 호흡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다.
‘역시… 부처님께서 우리를 가엾게 여겨 이분을 보내주신 거야!’
울컥,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켠에서 희망이 차올랐다.
하늘이… 아미를 버리지 않았다.
타앙.
그리고 다음 순간.
이벽의 걸음이 다시 멈추었을 때에는, 이미 두 사람은 아미산 어느 봉우리의 산기슭에 이르러있었다.
“…이상하군.”
허나 그때, 이벽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