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97)
100화. 영약 다섯 알
“쯔쯧! 자네는 아깝지도 않나?”
취풍신개가 혀를 찼다.
주지승방을 나선 이벽과 취풍신개는 경내를 가로지르며 잠시 동안 걸음을 함께 했다.
“그게 어떤 물건인데… 그걸 저 날강도 같은 근육 땡중한테… 아이고!”
“…어차피 내게는 큰 의미가 없는 물건이오.”
딱히 아깝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본래부터가 소림의 물건이니, 처치하기도 힘든 물건을 공연히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을 테다.
애시당초 처음 방장과 담판을 지으려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이벽은 지금과 같은 제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소림 방장씩이나 되는 이가 다짜고짜 주먹을 날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에효효,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자네에게 주어진 물건이니 자네 마음대로 처분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나? 그 또한 될 대로 된 셈이겠지.”
“…….”
영약은 자신에게 의미가 없다.
허나 그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잠시 이벽의 태연한 얼굴을 바라보던 취풍신개가 푹 한숨을 쉬었다.
“뭐,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자네가 손해를 보았지만… 저 녀석은 결코 이 일을 잊지는 않을 걸세. 그런 놈이니까.”
“…….”
“저런 탐욕스런 근육 덩어리가 방장이라니, 천년 소림의 역사에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다만, 그래도 도리를 모르는 놈은 아니니 말일세.”
이벽은 문득 혜공에게서 들었던 과거의 정파무림사를 떠올랐다.
오십 년 전, 정사연합은 마교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었다.
소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에 갓 동자승을 벗어난 수준이었던 혜자 배의 제자들은 괴멸되다시피 한 소림의 재건을 떠맡아야 했다.
그때에는 분명 자비나 불심보다는 무너진 지붕을 다시 쌓아 올릴 튼튼한 기둥이 필요했던 시기였을 테다.
북두천존 혜능의 거대한 등은 지난 오십여 년간 지금의 소림을 다시 일으켜 세운 기둥이다.
“그래, 소환단과 더불어 소림 방장의 호의를 샀다면 그 또한 나쁜 거래는 아니지. 암. 그렇고 말고.”
“…….”
취풍신개의 목소리는 마치 ‘사실이 그렇다’기보다는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허나 개방주씩이나 되는 어른이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생각해주는 것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그런데 자네, 그 소환단들은 어쩔 생각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문득 취풍신개가 목소리를 달리했다.
“…일행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오.”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곧 솔직하게 답했다.
현재, 일행들은 각자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이 힘, 혹은 마음의 문제이건,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허나 영약이라면.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
“뭐라? 준다고? 그냥 거저?”
“그렇소만.”
“크헐! 요런 깜찍한 놈 같으니!”
터엉, 취풍신개의 몽둥이가 이벽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원, 세상에. 세속에 초연하기로는 늙은 거지나 땡중보다 자네가 백번 낫구만? 부끄러워서 이름도 못 내밀겠군.”
“…….”
웃음소리는 곧 멈추었다.
그러나 취풍신개의 표정에 떠오른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짙어졌다.
주름진 미소가 이벽을 향했다.
“그래, 조금 전 자네가 펼쳤던 일검에 대해선… 혹여 짚이는 게 있는가?”
“…….”
이벽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에 와서는 몸에 남았던 희미한 감각조차 모두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내심 취풍신개가 그 말을 꺼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취풍신개의 표정은 더욱 능글맞아졌다.
“뭐어, 혜공의 ‘부탁’을 들어줄 결심이 되었다면 그때에 다시 혜공의 암자로 찾아오시게. 난 거기에 죽치고 있을 터이니.”
“…그건 어떤 뜻이오?”
“왜, 내 어제도 자네에게 묻지 않았나? 자네는 자네 스스로가 ‘일개’ 절정고수에 불과하다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지 말일세. 설마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런 질문을 던졌겠나?”
“…….”
“뭐, 나도 자네의 무욕(無慾)을 좀 본받아볼까 해서 말일세. 일전에 대환단은 혜공의 선물이었지, 내가 주는 선물은 아니지 않은가?”
껄껄껄, 취풍신개가 지저분한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렇다곤 해도 늙은 거지가 줄 수 있는 거라고는 약간의 훈수뿐이니 너무 기대는 말게나. 헐헐!”
* * *
이벽은 일행의 처소에 도착했다.
앞서 덕수와의 일전에서 백보신권을 맞고 쓰러졌던 파진성은 정신을 차린 듯했다.
가벼운 내상을 입었으나, 이삼일 정도 요양을 하면 충분히 회복될 수준인 듯했다.
허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나는 개똥벌레.”
“…….”
“아무 짝에 쓸모가 없지. 케헤헤.”
방구석에 드러누운 채 영문 모를 혼잣말을 지껄이고 있다.
파진성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저만치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앉은 일행들 사이에서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이벽은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앞서 혜공, 취풍신개와 나누었던 이야기에 대해 말을 꺼냈다.
스스로 비룡대를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포함하여, 대강의 이야기는 이미 공손수로부터 일행들에게 전해진 듯했다.
좌우간 이벽은 다시 한번 이야기를 풀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제안을 수락할 것임을 밝혔다.
녹림… 혹은 혈교를 추적한다.
“떠난다 해도 막지는 않겠다.”
“…….”
한 명 한 명 시선을 맞추었다.
뒤엉킨 감정 속에서 긴장감이 흘렀다.
공손수는 흐릿하게 웃었으며, 파진성은 여전히 횡설수설하고 있다. 언미희는 부쩍 수척해졌다.
태연한 것은 송영영 뿐이었다.
애초에 그녀에게는 일행이란 의식이 다소 희박했다.
실력에 대한 자신감과 더불어 무당의 뜻에 의해 이벽을 ‘추적’하고 있는 셈이니, 아무래도 달라질 건 없는 듯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벽은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의 끈을 풀자 훅, 청량한 향이 퍼졌다. 일순 일행들의 표정이 일제히 흔들렸다.
“소환단이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지금 뭐라고?”
“서, 설마 내가 아는 그거……?”
“어, 어디서 난 거예요, 공자?”
“…그럴 일이 있었소. 좌우간에 이것을 줄 테니 하나씩 받아 가시오.”
움찔, 일행들이 동요했다.
“…왜요, 오라버니?”
“뭐가 ‘왜’지?”
“왜 그걸 우리한테 줘요?”
“…….”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은 퍽 확고하지만… 막상 이유를 묻자 대답할 말이 궁색하게 느껴진다.
“…뭐, 그동안 함께 해주었던 것에 대한 감사라고 해두겠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무리해서 남아달라는 뜻은 아니다.”
“…….”
일행들의 시선이 복잡해졌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벽이 시선을 돌렸다. 주머니를 바라보는 파진성의 눈이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다.
“…헤, 헹! 그걸 내가 왜 먹어?”
훽, 파진성이 고개를 돌렸다.
“영약낭비다, 영약낭비. 그까짓 알량한 내공 늘어나나 마나 나 같은 폐급한테는 의미도 없다. 헛짓거리 말고 네놈이나 많이 처먹어라!”
“…….”
휙!
이벽이 소환단 한 알을 허공에 집어 던졌다. 파진성이 기겁하며 튀어 올랐다.
연못의 잉어 같은 민첩함으로 낚아챈 소환단을 품에 안고서 온몸으로 지키듯 데굴데굴 구른다.
“미, 미친놈아! 뭐 하는 거야!”
“헛소리 말고 줄 때 받아먹어라.”
“…지, 진짜?”
이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파진성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두 손을 펼친다. 종이에 쌓인 소환단을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어흑.”
“…….”
“커흐흐흑! 어흑!”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케헤헤, 미치겠군. 쪽팔리게 진짜… 큽, 살아생전 소림의 영약을 다 처먹어보네, 내가.”
슥, 파진성이 콧등을 훔쳤다.
달아오른 얼굴이 번들거린다.
“와, 진짜 못생겼다.”
“어흐흑, 닥쳐…….”
공손수가 피식 웃었다.
그때, 이벽의 손이 공손수에게 내밀어졌다. 소환단 한 알이 들려있었다. 공손수의 표정이 작게 일그러졌다.
“…이건 아닌데.”
“뭐가 아니란 거지?”
“저는 그냥… 애초에 처음부터 제 목적을 위해 오라버니를 따라왔을 뿐이에요. 그리고 이젠 헤어지려는 입장이고. 그런데 이건…….”
“그래서 안 받을 건가?”
“…아니요.”
공손수가 소환단을 받아들었다.
조심스레 품 안에 갈무리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났네요. 눈앞에 있으니 욕심은 나는데… 마음의 빚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데…….”
“…….”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간 그녀가 이벽의 곁에서 해주었던 값어치는 충분히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벽은 언미희를 향했다.
마찬가지로 소환단을 내밀었다.
“공자, 저는…….”
“소저 역시 이만 돌아가도 좋소.”
“…네?”
“이미 여러 번 얘기했지만 천향루주님의 명 때문이라면, 내 직접 하오문을 통해 물러설 수 있도록 말해줄 수 있소.”
이벽은 생각했다.
어쩌면… 언미희야말로 일행들 중에서 가장 휴식이 필요한 이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돌이란 자칫 때를 놓치면 곪아버릴 수도 있다. 그것은 이벽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언미희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하하, 웃으며 소환단을 받았다.
“고마워요, 공자. 진심으로요.”
“…….”
“…그래도 제가 ‘할 일’이 있는 한 공자의 곁을 떠나진 않을 거예요. 이미 약속했잖아요? 그리고… 이런 걸 받는다면 그만한 값은 해야겠죠?”
분위기는 다소 머쓱해졌다.
호젓한 공기가 흐르던 그때였다.
“어흠.”
“…….”
“어흠흠.”
송영영이 헛기침했다.
이벽이 시선을 돌렸다.
송영영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나처럼 표정은 옅었으나, 이벽은 그 눈빛 사이로 무언가를 느꼈다.
“…….”
이벽은 주머니를 도로 묶었다.
슥, 다시 품 안에 갈무리했다.
“…왜 난 안 줘?”
“미안하지만 우리가 아직 그렇게까지 돈독하진 않은 것 같군. 무당에서 좋은 거 많이 먹고 자라지 않았나?”
소림의 대환단에 비견할 순 없어도, 뿌리 깊은 명문정파의 경우 일반적으로 비전의 영약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오룡삼봉이라 불릴만큼 촉망받는 무당의 후기지수가 영약 한 알 구경한 적이 없을 리는 없다.
벌떡, 탓, 탓.
“됐어. 필요 없어. 나만 미워해.”
송영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륵,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
좌우간 이벽은 소환단 두 알을 도로 챙겨두었다. 어쩌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약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벽은 제갈소미와 혁대웅을 생각했다.
덥석, 콰드득.
그때였다.
무언가를 호쾌하게 씹어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움직였다.
콰득! 콰드득, 콰득!
파진성이었다.
행여 한 줌의 내공이라도 새어나갈까, 숨도 쉬지 않고서 소환단을 콰득콰득 씹어 삼킨다.
우우웅.
“오… 오오오! 청량하다!”
“이런 미친… 하아.”
공손수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말마따나 영약을 손에 넣었다 해도 무턱대고 함부로 먹는 건 위험한 짓이다.
복용자는 흡수한 기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안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며, 자칫 충격을 받았다간 기혈이 뒤엉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로 주변을 지켜줄 호법이 필요하다.
뿐만이 아니다.
정 다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만에 하나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 기혈을 다스려줄 인물 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가급적 자신과 같은 내공심법을 익혔으면서 더욱 경지가 높은 스승뻘의 무인이어야 한다.
“케헤, 케헤헤헤! 케헤헤헤헤!”
그러거나 말거나 파진성은 웃었다. 몸 안을 타고 흐르는 청아한 기운에 전율했다.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더욱 강해진— 쿨럭!”
일순 파진성이 기침했다.
파진성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제서야 자세를 고쳐 앉고서 제대로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휘오오오.
이내 파진성의 몸 안에서 기류가 인다. 가까이 앉은 일행들은 그 거센 기척을 느꼈다.
그러나 일각쯤 지났을까.
기류는 가라앉을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거세지며, 파진성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피부 바깥까지 휘몰아치는 불온한 기척과 함께 삐질삐질,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데요.”
“저거… 주화입마 아니에요?”
“…….”
공손수와 언미희가 말했다.
“…가지가지 하는군. 파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