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nomachines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129
129. 혈교주의 선언
129. 혈교주의 선언
야단법석이 벌어진 도로 공사 현장을 발견한 혈교 사람들은 자신들이 늦어도 한참을 늦었음을 깨달았다.
웬만한 폭력으로는 저들의 광기를 멈추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내 마법진이! 내 작품이!”
외팔이 도사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과거에 다쳤던 허벅지의 상처가 도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분 같아서는 저곳에서 날뛰고 있는 자들에게 한바탕 저주라도 쏟아붓고 싶었다.
하지만 저들을 저주로 모두 죽인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분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 쓸모 없는 짓이다.
게다가 그는 마음대로 분풀이를 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 결정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사에서 벌이는 일에 대한 모든 결정은 혈교주의 몫이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종주 뿐.
종주가 신강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종주와 그, 둘 다 혼돈의 근원에게서 선택받은 자였지만, 그가 한쪽 팔을 잃고 북양의 근거지에서 도망친 후로 그에게는 최소한의 발언권도 남지 않았다.
아직도 그를 스승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마법사들을 통솔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박살나는 장면을 보면서도 숨이 막히는 느낌으로 보고만 있어야 했다.
잠시 후 혈교주가 결정을 내렸다.
“더 이상 볼 것도 없군. 다들 돌아가자.”
혈교주의 태도는 담담하기까지 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변수에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진 사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어서 나온 말의 함의에는 핏빛이 일렁거렸다.
“교도들을 대기시키게. 지금 당장.”
“명을 받들겠습니다.”
혈교주의 명에 따라 한 명이 먼저 날아가는 것처럼 몸을 날렸다.
그 뒤를 이어 그들 역시 나타났을 때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감은 그렇게 간단히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이한은 나노의 경고 덕분에 진작부터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구리관이 묻혀 있는 모습에서 마법진의 흔적을 발견한 직후였다 .
그때의 이한은 나노와 함께 그들의 발견에 대해 검토하는 중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말론이 설명한 마법진과 형태가 유사한데?”
[맞습니다. 구리관이 묻혀있던 곳을 선으로 이어보면 에너지의 흡수, 증폭을 담당하는 마법진과 상당히 비슷한 모습을 보입니다. 일치율이 80%가 넘습니다. 이 정도면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나노는 이한의 눈앞에 3D로 주변의 지도를 띄운 후 구리관을 이은 선을 표시했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니 한결 명확해졌다.
현재까지 밝혀낸 부분이라고 해봐야 전체로 따지자면 일부분에 불과하겠지만, 드러난 부분만으로도 특징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프랙탈을 닮은 문양은 지금까지 이한이 접했던 마법진과 정말로 비슷한 모양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말론과 같은 곳에서 온 놈들이 혈교에 가담한 것이 분명해. 혈교처럼 극단적인 자들과 함께라니.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겠어.”
[폭동, 그 틈을 탄 고위 인사에 대한 테러. 그 이상은 예상하기 어렵습니다.]“상식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혈교는 사람을 재료로 진법을 발동시키던 놈들이었어. 그런 놈들에게 차원이동까지 가능한 지식이 손에 쥐어진 것이지. 엄청난 에너지를 다룰 수 있다는 뜻인데······ 이놈들 설마 경사를 통째로 날려버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현재의 데이터로는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을까?”
[현재의 데이터로는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나노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이 ‘무리한’ 추측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이 무엇이었든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구리관을 제거하면 그만 아닌가? 그래서 우리가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고. 저렇게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으니 구리관을 다 파내는 것도 시간문제일 거야. 이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나노는 어떻게 생각해?”
[구리관을 묻어놓은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구리관을 모두 파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경고! 9시 방향. 혈교도로 추정되는 자를 발견했습니다. 막북에서 확보한 얼굴 데이터와 일치하는 자입니다. 주변에 있는 8명은 같은 일행으로 파악됩니다.]이한과 의논을 나누던 나노가 갑자기 건조한 목소리로 경고를 발했다.
이한은 즉시 몸을 숨기며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노가 화살표로 표시한 자는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혈교의 총단에서 벌어진 전투 중에 부딪혔다면 이한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으니 아마 멀리서 스치듯 지나간 자일 것이다.
그런 자가 경사에 나타났다는 것은 막북의 혈교도 중 일부가 경사로 들어왔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심각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자는 단순한 수행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기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냥 보기에도 혈교의 고위층이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사람들이 구리관을 파헤치는 모습을 잠시 동안 지켜보던 그들은 더 이상 볼 것이 없다는 듯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경고! 경고! 북양에서 도주한 마법사를 발견했습니다.]그들이 돌아가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지금까지 그들 사이에 가려져 있던 얼굴 하나가 드러났다.
동시에 나노의 경고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새롭게 표시된 화살표가 가리키는 얼굴은 이한도 기억에 있는 자였다.
막북의 지하 동굴에서 팔을 남기고 도망친 마법사였다.
허벅지에도 한칼을 먹여서 반쯤 잘라줬었지만 지금은 멀쩡해 보였다.
말론의 스승이라고 했던가?
그자가 혈교도의 수뇌부와 함께 있는 것이다.
역시 그랬군!
구리관의 배치는 우연이 아니었어!
절반 정도의 확신이 100%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한은 그들이 모습을 감출 때 최대한 자신의 기운을 억누르고 멀리서 그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평상시였다면 아무리 이한이 자신을 숨겼다고 해도 저런 자들을 상대로는 추적이 쉽지 않았겠지만, 지금 주변은 갑작스러운 행운으로 인해 흥분한 사람들로 온통 난리였다.
덕분에 이한의 추적이 금방 들통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한의 추적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 끝났다.
도로 공사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거대한 장원으로 그들이 들어간 것이다.
그곳은 경사의 중소문파 중 하나인 철패문이었다.
철패문은 이한에게도 안면이 있는 곳이었다.
흑도 계열이고 역사도 비교적 짧은 편이지만 문주의 수완이 뛰어나고 발도 넓어서 정사를 막론하고 두루두루 거래를 했었다.
심지어 과거 한때는 은밀전과도 거래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이 혈교와 연관이 있다고?
등잔 밑이 어두운 것도 정도가 있지.
이한은 자신이 10년이나 경사의 어두운 속에서 활동했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
혈교가 똬리 틀고 있던 비밀 근거지 중의 하나인 철패문으로 들어온 혈교주는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진을 발동하도록 하지. 대계 역시 시작하도록 하고. 조금 빠르지만 이미 준비는 다 한 상태이니 지금 시작해도 무리는 아닐 거다.”
“그게 무슨! 아직 완성도 안 된 진을? 아니, 그보다 지금 얼마나 손상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발동을 시키겠다는 거요?”
“몇 군데 파손되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당신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손상을 우려할 필요는 없겠지.”
혈교주의 말에 외팔이 도사는 폭발하고 말았다.
마법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놈의 무리한 요구는 더 이상 그를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직 완성이 안 된 부분도, 바로 조금 전에 파헤쳐져서 박살난 부분도 모두 기운을 흡수하고 증폭시키는 부분이란 말이오. 만약 지금 이대로 마법진을 발동시키겠다면 계획한 것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은 당신도 이해하겠지? 제대로 만들었다면 3만 명 정도면 충분했겠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얼마나 많은 생명이 필요할지 모른단 말이오! 더구나 마법진의 완결성이 무너졌으니 안정성도 보장 할 수 없어. 만약 마법진이 폭발하기라도 한다면 이 일대는 그냥 날아가는 거요. 어떤 일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으니 그런 말은 마시오.”
“3만으로 부족하면 30만을 바치면 될 것 아닌가? 그것도 부족할까? 그렇다면 아예 300만은 어떨까? 설마 그 숫자도 부족하다고 말할 것은 아니겠지?”
“당신 미쳤군.”
외팔이 도사는 말문이 막혔다.
이곳의 사람들이 가진 숫자에 대한 감각은 그와 달랐다.
만이라는 단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다.
인간을 숫자로 보는 그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단위였다.
“아니지. 이것은 미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선택이라네. 당신은 머리가 좋으니 잘 생각해 봐.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지금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물러선다고 해서 경사의 형제들이 전처럼 조용히 숨어 살 수 있을까? 이 정도로 일을 벌였는데? 이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 그렇다면 경사를 떠나 몸을 숨기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시도해 보고 물러서야 하지 않을까?”
입을 닫고 있는 외팔이 도사를 향해 혈교주는 다른 말 할 것 없다는 듯 못을 박았다.
“자네에게는 선택권이 없어. 진을 발동시킬 준비를 하게나. 되도록 빨리.”
혈교주는 외팔이 도사의 대답은 듣지도 않았다.
당연히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이라는 태도였다.
대신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안으로 들어갔다.
철패문의 내부는 이미 기다리고 있던 혈교도로 가득 차 있었다.
혈교주와 함께 경사로 들어온 혈교도는 물론이고 혈교주의 소집령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혈교도들까지 모두 몰려온 것이다.
그들 중 경사 36방에 속한 혈교도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막북에서 경사로 온 혈교도만 감안해도 무시 못 할 세력이었다.
그들은 흥분과 불안이 섞인 모습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혈교주가 선언했다.
“때가 왔다.”
혈교도들의 눈에 핏발이 서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에 붉은 기가 돌면서 기운을 외부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몸 위로는 아지랑이가 보였다.
“하늘이 깨어지고 땅이 열린다. 새로운 세상이 온다!”
잔뜩 힘을 쥔 것처럼 핏줄이 울룩불룩 튀어나오고, 근육도 과시하듯 울퉁불퉁 튀어나왔다.
붉은색의 땀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가서 너희의 할 일을 하라!”
혈교주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혈교도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밖으로 뛰쳐나간 그들은 세 무리로 갈라져서 뛰어갔다.
흉흉한 분위기가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한은 그들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밖으로 뛰쳐나간 자들 중에 혈교의 고위인사로 짐작되는 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한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아서 일단의 사람들이 뒤늦게 전각의 지붕을 뚫고 위로 치솟았다.
그들은 황궁을 향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표홀히 몸을 날렸다.
이한은 즉시 그들을 따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를 멈춰 세우는 자가 있었다.
“너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한을 향해 질문을 던진 자는 혈교주의 사제이자 경사 36방을 담당하던 혈교의 삼교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