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11
1011회. 그대 엘리오를 기사에 임명한다
베르나르도 후작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신의 능력이 출중하면 좋지만 너무 뛰어나도 문제다.
특히나 ―평민들에게까지 멸시당하는― 야인에게 높은 작위를 내리는 건 영주인 자신에게도 부담이다.
엘리오가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지 못할 걸 알면서 무책임하게 작위만 높여 줄 수는 없었다.
그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작위가 올라갈수록 견제 세력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야인 출신이라 부대끼는 일이 많을 텐데, 사방이 정적(政敵)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른다.
‘남작부터 시작해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게 낫겠지.’
생각을 정리한 베르나르도 후작이 엘리오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 자네 정도 검술이라면 자작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네.”
순간 연적하는 자신이 남작의 작위를 받게 될 것임을 알았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그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지금 자네가 자작이 되면 안팎으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하게 될 걸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하네.”
“예.”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소에서 만난 앰버만 봐도 이 세계에서 야인이 어떤 대접을 받고 사는지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남작으로 시작해 자네의 입지를 다져 나가는 편이 나을 걸세. 이런 말을 하는 내 마음도 편치 않네만, 그게 최선인 것 같아 하는 말일세.”
“하나만 여쭤 볼게요.”
“뭔가?”
“남작도 백작과 자작에게 결투를 신청할 수 있나요?”
“자네가 왜 그걸 알고 싶어 하는지 말해 보게.”
베르나르도 후작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아무리 엘리오의 검술이 뛰어나도, 그에게 귀족 사회를 거부하는 반골(反骨) 기질이 있다면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연적하는 솔직하게 치료소에 있는 동안 푸토코아 백작가와 자신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설명했다.
“……제가 복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산의 부족’을 몰살시키고, 그들의 귀를 잘라 저에게 보냈습니다. 칼을 들고 푸토코아 백작가로 뛰어들어도 되지만, 정의의 여신 유스티아의 이름으로 복수하고 싶어서 여쭤 보는 겁니다.”
“흐음!”
베르나르도 후작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푸토코아 백작의 장자인 토비아스 푸토코아가 벌인 짓이 분명했다.
십팔 세라는 혈기 왕성한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한편으로 이해가 가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후작인 자신이 결정한 일에 대한 화풀이를 아무 죄없는 야인 부족에게 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럼 자신의 정적들은 ‘후작의 쓸데없는 욕심이 어리석은 토비아스 푸토코아를 자극했다’고 떠들어 댈 게 분명했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엘리오를 찬찬히 살폈다.
후작의 표정은 무거웠지만 차갑지는 않았다.
엘리오의 분노가 귀족 사회가 아닌 푸토코아 백작가를 향하고 있음에 안도한 때문이다.
“법적으로 귀족에 대한 결투 신청은 기사 서임만 받아도 가능하네.”
이윽고 베르나르도 후작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가까이.”
서너 걸음 뒤에 있던 연적하가 후작의 앞으로 다가갔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검을 돌려 받은 뒤 말했다.
“한쪽 무릎을 꿇게.”
연적하가 시키는 대로 하자 베르나르도 후작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흠 없이 거룩하신 창조신 마나 프트라스의 이름으로 묻겠다. 베르나르도 후작가는 오직 정의만을 기사의 의무로 본다. 엘리오 그대는 나 베르나르도 후작을 주군으로 섬기고, 정의로운 삶을 살겠다고 맹세하겠는가?”
“맹세합니다.”
“에스카토스 왕국이 나에게 준 권한으로 그대 엘리오를 기사에 임명한다. 정의로우신 유스티아 여신의 가호가 그대에게 임하기를 바란다.”
후작이 연적하의 오른쪽 어깨를 검면으로 가볍게 툭 쳤다.
“이제 일어나도 되네.”
후작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연적하가 물었다.
“이제 제가 남작이 된 겁니까?”
“풋! 그럴 리가 있나. 남작의 작위는 에스카토스 4세 전하만이 줄 수 있네. 내가 전하께 자네의 봉작(封爵)을 요청할 테니 기다려 보게.”
“제가 따로 할 일은 없고요?”
“본래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가 남았지만 ‘산의 부족’이 몰살당했으니……. 내가 증인이 되어 주는 것으로 간단하게 끝낼 수 있네. 그동안 자네는 내 부대에서 전공을 쌓도록 하게.”
“예.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기사가 되었으니 자네는 준귀족이네. 그러나 아직 작위를 받지 못했으니 소위들과 함께 지내게. 봉작을 받게 되면 그때 중위로 임명해 주겠네.”
“아…….”
“저녁 식사 후에 이곳으로 오게. 내 휘하의 귀족들에게 자네를 소개해 줘야 하니까.”
“예.”
“참, 원하는 성씨가 있나? 봉작의 과정에 꼭 필요한 거라서 말이야.”
“그거라면 ‘라고아’가 좋겠습니다.”
“라고아라. 무슨 뜻인가?”
“‘연못’이라고 하더군요.”
“소박하지만 마음에 드는군. 그럼 ‘엘리오 라고아’라는 이름으로 봉작을 상신하겠네. 따라오게.”
베르나르도 후작이 연적하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경비를 서고 있던 친위대들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후작을 보았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선두에 서 있는 마커스를 향해 말했다.
“엘리오 경을 소위들의 막사로 안내해 주거라.”
“예!”
마커스가 답하자 베르나르도 후작은 그를 따라가라는 듯 턱짓을 해 보이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마커스가 우두커니 서 있는 연적하에게 다가갔다.
“엘리오 경, 가시지요.”
말을 마친 그가 따라오라는 듯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갔다.
잠시 후 마커스는 연적하를 소위들의 막사 앞까지 안내하고 돌아갔다.
‘그 사람 정 없네.’
소개까지 해 주고 가기를 기대했던 연적하는 뻘쭘한 얼굴로 막사들 앞을 서성거렸다.
그가 세 개의 막사들 중에 어디로 들어가는 게 좋을지를 두고 고민할 때, 막사 하나에서 삼십 대로 보이는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연적하가 미처 말을 걸기도 전에 남자는 천막 뒤로 홱 돌아갔다.
잠시 후 개운한 얼굴로 돌아온 남자가 연적하에게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냐?”
“후작님이 이곳에서 지내라고 해서 왔는데요?”
“새로운 기사인가 보군. 맞나?”
“네.”
기사라는 말에 사내는 경계의 눈을 거두고 빙그레 웃었다.
“나는 기사 리들리네. 자네의 이름은 뭔가?”
“엘리오라고 합니다.”
“그래, 엘리오 경. 이곳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막사로 오게. 며칠 전에 한 사람이 클루톤으로 돌아가서 자리가 비었네. 부상이 심해 신전 사제를 찾아간다고 하더군.”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향은 어딘가? 나는 그린빌에서 왔네.”
“저는 알바 누베스입니다.”
“설마 푸토코아 백작령의 그 알바 누베스 산맥을 말하는 건가? 거긴 미개척 지대로 알고 있는데…….”
“예, ‘산의 부족’ 출신입니다.”
야인이라는 소리다.
리들리가 흠칫 놀란 얼굴로 엘리오를 보았다.
‘쯧! 순한 인상이라 곁에 두고 잘 지내 보려 했는데…….’
‘마나의 저주’를 받았다는 야인과 가까이 지낼 수는 없었다.
각성에 성공한 뒤 불철주야 마나를 수련 중인 기사들에게 야인은 살아 움직이는 저주와도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그에게 같은 천막을 쓰자고 권유했던 터라 이제 와서 발뺌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리들리는 엘리오와 함께 천막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서 쉬고 있던 네 사람의 기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리들리가 떨떠름한 얼굴로 기사들에게 엘리오를 소개했다.
“이쪽은 알바 누베스 산맥에서 온 엘리오 경이오. 히르헤라에 있는 동안 잘 지내 봅시다.”
연적하가 기사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엘리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삼십 대 중반의 기사 케일이 확인하듯 물었다.
“알바 누베스 산맥이면 야인 부족밖에 없을 텐데, 야인 출신인가?”
“맞습니다. ‘산의 부족’ 출신입니다.”
연적하는 부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산의 부족’ 출신으로 밀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다.
기사들의 얼굴이 가볍게 굳었다.
그 뒤로는 누구 하나 연적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연적하는 빈 간이침대에 길게 드러누웠다.
어차피 강호를 종횡할 때도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슬슬 피해 다녔기에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연적하가 태평스럽게 눕자 오히려 기사들이 당황했다.
그들 모두 야인 출신의 기사가 신경 쓰여 힐금거렸지만, 괜히 나서서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기사들끼리 싸움을 벌였다가 귀족들에게 찍히면 봉작에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소년 시절에 마나를 각성하여 천재 소리를 듣는 스물세 살의 기사 파비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대다수 음모론자들이 그러하듯 ‘야인이 마족들처럼 정기를 갈취한다’고 믿었다.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엘리오에게 다가간 그는 발끝으로 간이침대를 툭툭 걷어 찼다.
몸이 흔들리자 연적하가 눈을 떴다.
남장(男裝)한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긴 사내 녀석이 어울리지 않게 눈을 부라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남자 찾아봐라. 나는 남자에게 관심 없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뜬금없는 야인의 조롱에 ‘클루톤의 천재 기사’ 파비안이 폭발했다.
“일어나라. 너에게 기사들의 숙소에 머무를 자격이 있는지 봐야겠다.”
“후작님의 결정을 의심하다니 보기보다 용감하군.”
“의심이 아니라 너를 증명하라는 소리다. 뒤를 맡길 수 있는 기사인지 알아야 함께 싸울 것 아닌가.”
“어이, 어이, 남색(男色)을 할 것도 아닌데 뒤를 왜 맡겨?”
“이런 미친! 어물쩡 말장난으로 넘길 생각 말고 일어나라!”
“싫은데? 내가 왜 네 말에 따라야 하지? 숙소 배정에 불만이 있으면 후작님에게 가서 따져라.”
맞는 말인지라 파비안은 일순 반박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야인에게 조롱까지 받고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산의 부족’에는 다 너 같은 겁쟁이들밖에 없느냐?”
연적하는 젊은 기사가 자신 때문에 몰살당한 ‘산의 부족’을 들먹이자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파비안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엘리오를 살폈다.
기사치고는 마른 체형에 어디 하나 특출 난 곳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기사라면 몸에서 떼어 놓지 말아야 할 검조차 없었다.
“너는 무기도 없나?”
“…….”
연적하는 멋쩍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기사들 중에서 자신만 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장(武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도 같다.
바닥으로 내려간 연적하는 간이 침대 아래로 손을 쑥 집어 넣었다.
그것은 단지 눈속임에 불과할 뿐, 그는 천둔검을 불러냈다.
툭.
손바닥에 천둔검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작은 천둔검의 크기를 다른 기사들의 중검에 맞게 조금씩 키워 나갔다.
천둔검의 외형도 조금 전에 사용했던 베르나르도 후작의 검과 비슷하게 변형시켰다.
이윽고 다 됐다고 생각되자 천천히 밖으로 끄집어냈다.
검신에서 손잡이까지 일체형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오가 침대 아래에서 처음 보는 검을 꺼내자 파비안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건 뭐지? 침대 아래에 뭘 넣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게다가 세상에 어느 기사가 자신의 얼굴과도 같은 검을 침상 아래에 보관한단 말인가!
고개를 갸웃하던 파비안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것은 네 검이냐?”
“어. 왜? 문제 있어?”
“없다. 나와라.”
딱히 대꾸할 말이 없던 파비안은 서둘러 천막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천막 밖으로 나간 직후, 케일이 리들리에게 물었다.
“리들리, 엘리오가 무장을 하고 있었나?”
“모르겠습니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아서…….”
리들리가 말끝을 흐렸다.
숙소라서 긴장을 풀고 있었던 데다, 야인이라는 것에 관심이 집중돼 다른 건 떠오르지도 않았다.
케일이 리들리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며 말했다.
“맞겠지. 마법사도 저런 건 할 수 없을 테니까. 오랜만에 파비안의 검술이나 구경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