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59
1059회. 내 칼이 입보다 무섭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엘리오는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볼거리 없는 군대라 그런지 주둔지에 있는 기사와 병사 들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강호에서는 체면 때문에 구경꾼을 통제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개방된 분위기다.
병영 특유의 문화인지, 혹은 이세계 결투의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다.
‘소드마스터는 좀 다르려나?’
솔직히 이세계 절대자의 경지가 궁금하기는 하다.
한 나라에 셋밖에 없으니 강호 식으로 치면 ‘천하삼대고수’인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났다.
엘리오가 웃자 주변에서 ‘오오!’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소드 익스퍼트가 소드마스터와의 결투를 앞두고 웃으니 놀랄 만도 하다.
이윽고 코드란테스 백작에게 돈을 건 병사들이 숙덕거렸다.
“미친 거 아냐?”
“야인 출신이라잖나. 소드마스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수도 있어.”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조용히들 해. 라고아 남작의 귀가 엄청 밝다는 소리 못 들었어?”
“우리만 떠드는 것도 아닌데 누가 누군지 알고?”
“들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죽지 않으면 폐인이야. 어젯밤에 코드란테스 백작에게 막말을 했다더라고. 겉으로는 웃어도 속은 이미 새까맣게 탔을걸?”
“코드란테스 백작이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니 좋게는 안 끝나겠군.”
“그래도 라고아 남작이 담력 하나는 그랜드마스터급이야. 얼굴 좀 봐. 남의 일 구경하러 나온 것 같잖아.”
엘리오는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을 지그시 응시했다.
들어도 상관없다고 큰소리 치던 사람은 ‘아차’ 싶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엘리오가 구경꾼들과 신경전을 벌일 때 ‘와아아!’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곧이어 코드란테스 백작군 진영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코드란테스 백작과 푸토코아 백작이었다.
두 백작의 나이 차이가 심해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보였다.
코드란테스 백작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결투를 한 시간 남기고 갑자기 찾아온 푸토코아 백작 때문이다.
이래서야 마치 자신이 그의 대전사라고 광고를 하는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푸토코아 백작의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그를 내치지 않은 건, 저 당당한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 맞설 인물이 없는 탓이다.
‘대전사라…….’
자신이 ‘파이어 스톤 광산 개발권’이라는 미끼를 문 순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해진 결과였다.
상대가 소드 익스퍼트니 어려운 일도 아니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적당히 손봐 주고 실속이나 챙기면 될 일이다.
문득 코드란테스 백작은 푸토코아 백작을 보았다.
그가 처음부터 대전사를 요청했다면 광산 채굴권보다 더 큰 것을 얻어 냈으리라.
그때만 해도 ‘돕겠다’는 약속이 대전사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도발적인 언행보다 푸토코아 백작의 교활함이 더 짜증 난다.
나이는 이제 십팔 세인데 하는 짓은 노회한 늙은이다.
‘숨은 조력자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자 나이에 맞지 않는 치밀함이 이해가 됐다.
코드란테스 백작은 결투장에 도착해서도 푸토코아 백작의 배후를 궁금해 할 정도로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경계하지 않았다.
잠시 후 결투장 중앙에서 엘리오 라고아 남작과 푸토코아 백작, 코드란테스 백작이 마주 섰다.
엘리오는 두 사람의 등장에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런 그를 보고 푸토코아 백작조차도 대담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베르나르도 후작군 진영에서 한 남자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후작가의 서기인 글랜 테일러 남작이었다.
결투 당사자인 세 사람이 멀뚱거리자 베르나르도 후작이 급파한 것이다.
글랜 테일러 남작은 먼저 코드란테스 백작과 푸토코아 백작에게 묵례를 해 보인 후 엘리오에게 말했다.
“남작님, 베르나르도 후작님께서 따로 준비된 진행자가 있으신지 물으셨습니다. 만약 없다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없어요.”
엘리오는 속으로 ‘싸우는 데도 절차가 있나?’ 의아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제가 사회를 맡아도 되겠습니까?”
“예.”
하기야 생각해 보니 무슨 말이 오가야 하는 분위기였다.
구경꾼들 앞에서 백작과 남작이 다짜고짜 칼질을 하는 것도 우스우니까.
글랜 테일러 남작이 양측의 중간으로 나섰다.
“저는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서기이자 본 결투의 진행을 맡은 글랜 테일러 남작입니다. 슬래시 랜드의 영주이신 엘리오 라고아 남작님과 푸토코아 백작님 간 신성한 결투에 앞서, 송구하지만 코드란테스 백작님에게 여쭙겠습니다. 꼭 하실 말씀이 있어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대전사의 자격으로 나오신 겁니까?”
결투장에는 사회자와 결투 당사자들만 입장할 수 있다.
참관인들조차 결투장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코드란테스 백작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두 가지 경우가 다 해당된다. 내 제안을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받아들이면 서로 간에 싸울 일이 없다. 하지만 거부할 경우, 나는 동맹인 푸토코아 백작을 위해 대전사로 싸울 것이다.”
코드란테스 백작은 소드마스터의 체면상 라고아 남작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글랜 테일러 남작이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님, 코드란테스 백작님의 제안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대화로 풀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 말이 있다니 들어 볼 생각이다.
글랜 테일러 남작이 코드란테스 백작에게 말했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그 제안을 들어 보겠다고 했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코드란테스 백작이 입을 열었다.
“나도 라고아 남작과 푸토코아 백작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푸토코아 백작가에게 빌미를 제공한 것은 라고아 남작이 아닌가? 사죄의 뜻으로 푸토코아 백작이 라고아 남작에게 백만 골드를 지불하도록 하겠다. 이것은 라고아 남작이 히르헤라에서 세운 공을 생각해서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제안이다. 받아들이겠나?”
“백작님!”
푸토코아 백작이 황당한 얼굴로 소리쳤지만 코드란테스 백작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백만 골드의 제안은 자신을 대전사로 끌어들인 것에 대한 복수였다.
글랜 테일러 남작은 황급히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님, 코드란테스 백작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물으면서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받으십쇼.’
이런 제안은 무조건 받아야 했다.
분노한 푸토코아 백작의 얼굴만 봐도 그게 얼마나 파격적인 제안인지 알 수 있다.
이건 누가 봐도 소드마스터가 소드 익스퍼트에게 하는 제안이 아니다.
전날 밤에 있었던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건방진 언행을 생각하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환희에 차올라야 할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얼굴이 어째 이상했다.
뚱한 얼굴로 듣고 있던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글랜 테일러 남작에게 물었다.
“알바 누베스 산맥을 백만 골드로 살 수 있어요?”
“천만 골드로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럼 거절합니다.”
단호한 엘리오의 말에 글랜 테일러 남작의 얼굴이 굳었다.
백만 골드를 마련하려면 푸토코아 백작가는 수십 년 동안 개처럼 고생해야 한다.
더구나 그런 엄청난 제안을 한 사람이 소드마스터라면, 무조건 받아 주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거절이라니?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글랜 테일러 남작의 귀로 코드란테스 백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유감이군. 내 제안을 거부했으니 나는 푸토코아 백작의 대전사가 되겠다. 테일러 남작, 빠르게 진행해 주게.”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글랜 테일러 남작이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남작님께서 코드란테스 백작님의 제안을 거절함으로 푸토코아 백작과의 결투가 이루어졌습니다. 푸토코아 백작의 대전사는 코드란테스 백작님이십니다. 대전사에 이의가 없으시다면 결투를…….”
엘리오가 글랜 테일러 남작의 말을 끊었다.
“잠깐!”
순간 글랜 테일러 남작과 푸토코아 백작 간에 희비가 엇갈렸다.
두 사람은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최후의 순간에 변심해서 코드란테스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입에서 모두를 기함하게 할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코드란테스 백작을 이기면, 푸토코아 백작을 손봐 줘도 돼요? 아님 또다시 결투를 신청해야 돼요? 저 쥐새끼 같은 인간을 그냥 보내려니 아쉬워서.”
“…….”
글랜 테일러 남작은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푸토코아 백작이 파르르 떨 때 코드란테스 백작의 입에서 파안대소가 터졌다.
“푸하하핫! 나를 앞에 두고 다음을 생각한다고? 이거야 원, 내 이름이 벌써 세상에서 잊혀졌다는 건가? 그 기백을 높이 사서 내가 약속하지. 푸토코아 백작은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목숨만 붙여 놓는다면 뒷일은 내가 책임지지. 물론 내 손에서 살아남는다면 말이야.”
코드란테스 백작이 진한 살기를 내뿜었다.
지금은 교활하게 자신을 이용하려는 푸토코아 백작보다 어리석고 둔한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 대한 분노가 더 치밀어 올랐다.
대화가 파국으로 치닫자 글랜 테일러 남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경우에는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리석어도 저렇게 어리석을까.’
앞뒤 없이 돌진하는 야인의 특성을 모르지 않지만 해도 너무했다.
설마하니 소드마스터조차 안중에 두지 않고 일을 벌일 줄이야!
같은 후작가의 귀족이라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 했다.
“그 부분은 코드란테스 백작님께서 보증을 해 주셨으니 마음대로 하셔도 되겠습니다. 푸토코아 백작의 대전사인 마티아스 코드란테스 백작님과 엘리오 라고아 남작님의 결투가 시작됐음을 선언합니다.”
말을 마친 글랜 테일러 남작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푸토코아 백작도 묘한 미소를 지으며 푸토코아 진영으로 돌아갔다.
둘만 남겨지자 코드란테스 백작이 말했다.
“너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다.”
“왜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보다 푸토코아의 애송이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지금은 내가 더 마음에 안 든다?”
“그래. 너는 푸토코아를 향한 내 계획을 망치고,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후작에게는 미안하지만 너를 지워 버릴 생각이다.”
“나도 하나 물읍시다.”
“얼마든지.”
코드란테스 백작은 목숨까지 빼앗을 생각에 자비를 베풀었다.
“왜 푸토코아의 대전사가 됐습니까? 정이니 의리니 그따위 소리는 하지 마시고.”
“파이어 스톤 광산의 채굴권을 받았다. 더 궁금한 건 없느냐?”
“돈 받고 대신 싸워 준다는 거네요?”
“대전사란 본래 그런 것이다.”
물론 과거에는 대가 없이 도운 사람도 있지만 오늘날은 용병이나 다름없었다.
“사람 살아가는 건 어디나 비슷하네요. 여기는 좀 다른가 싶었는데. 돈 받고 칼질하러 왔다니 나도 덜 미안합니다.”
“입으로는 이미 소드마스터를 넘어섰구나.”
“내 칼이 입보다 무섭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구경하는 사람 생각해서 슬슬 싸웠으면 하는데. 쫄리면 도망가도 돼요. 백작님에게는 아득바득 쫓아가 죽일 정도의 원한이 없으니까.”
“크크큭! 살다 살다 너처럼 간덩이가 부은 놈도 처음이다. 죽여 달라고 사정을 하는구나. 그렇다면 죽어라!”
코드란테스 백작이 벼락처럼 롱소드를 뽑아 휘둘렀다.
심해처럼 진한 마나 블레이드 줄기가 엘리오를 향해 날아갔다.
슈아아악―!
그 가공할 기세에 놀란 ―엘리오 뒤쪽의― 구경꾼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마나 블레이드가 가까이 오자 엘리오는 천둔검을 설원에 박았다.
쩡―!
묵직한 울림과 함께 마나 블레이드가 두 토막 났다.
살겠다고 뒷걸음질 치던 구경꾼들의 몸이 다시 앞으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