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80
1080회. 잘하면 치겠다?
엘리오는 영지병들 앞에서 파비안에게 ―이곳에서 스왈로우 플라잉이라 불리는― 비연보(飛燕步)를 가르쳤다.
병사들이 보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마나를 각성하지 못하면 비연보는 우스꽝스러운 동작에 불과한 때문이다.
이미 마나를 혈관으로 이동시키는 요령을 터득한 파비안은 비연보를 쉽게 배웠다.
잠시 후 파비안은 성곽 가장자리를 물 찬 제비처럼 뛰어다녔다.
비연보를 흉내 내다 포기한 병사들이 존경의 눈으로 파비안을 우러러봤다.
같은 걸 배웠는데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니 그럴 만도 하다.
엘리오는 그런 병사들이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나의 각성은 어디까지나 신의 영역인 까닭이다.
성곽 둘레를 뛰어다니던 파비안이 허공에서 한차례 회전한 후 엘리오 앞에 떨어져 내렸다.
“헉! 헉! 굉장하네요! 마치 한 마리 제비가 된 기분입니다.”
“달리 이름이 스왈로우 플라잉이겠냐?”
“이 정도 체술이면 마물들도 따라오지 못하겠지요? 마물 새끼들, 다 죽었어!”
“아서라. 아직은 너보다 케르베로스나 블러디 카리브(붉은 순록형 마물)가 더 빠르다. 그거 믿고 설치다가 관짝으로 들어가는 수가 있다.”
“쩝, 말이 그렇다는 거죠. 소드 비기너에 불과한 제가 마물들 앞에서 설치기야 하겠습니까?”
“너 폴짝거리며 뛰어다니는 거 보니까 그러고도 남겠던데.”
“중대장님이 계시니까 믿고 그러는 거죠. 저 상당히 신중한 남자입니다.”
“그건 모르겠고, 난 이만 가 볼 테니까 경계나 철저하게 해. 윗분들이 불시에 둘러본다니까 괜히 딴짓하다가 걸려서 개망신 당하지 말고. 작위는 제때에 받아야지. 안 그래?”
“걱정하지 마십쇼. 달리 할 짓도 없습니다. 몸뚱아리만 겨우 빠져나왔는데요 뭘.”
“에혀. 말은 푸른 산 흐르는 물[靑山流水]이지. 내가 너 같은 인간하고 오래 생활해 봐서 아는데……. 걸리지나 마라.”
“그런데 ‘푸른 산 흐르는 물’이 뭡니까?”
“말은 잘한다고 인마. 간다.”
엘리오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파비안이야 필요에 의해 곁을 내어 주게 됐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최대한 거리를 둘 생각이다.
사람들을 깊이 알게 되면 그들의 죽음에 마음만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
다음 날.
간이 막사에서 일어난 엘리오는 서둘러 성곽으로 나갔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마기에 물든 하늘이 더 눈에 들어왔다.
시커먼 게 마치 먹물을 풀어 놓은 듯했다.
엘리오가 나타나자 성곽 끝에 몰려 있던 병사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그가 성곽 끝으로 걸어가자 파비안이 쪼르르 달려왔다.
‘어이쿠!’
5미터 높이의 성형요새 주변에 마수와 마물이 가득했다.
마치 마수와 마물의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다가온 파비안이 생기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많아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텔레포트가 아니면 빠져나갈 수 없겠죠?”
“그러게. 나도 이 정도로 많을 줄은 몰랐다.”
파비안이 소리를 낮췄다.
“이 정도면 몰살당하는 거 아닙니까?”
“너 내가 입방정 떨지 말라고 했지?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특히 재수 없는 말은.”
“아, 예.”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파비안은 선선히 지적을 받아들였다.
그때 기수인 레이 모건이 다가왔다.
“중대장님, 대장군님께서 중앙에 있는 폐성으로 오시랍니다.”
“어.”
엘리오는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성형요새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길 닿는 모든 곳에 마수와 마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수와 마물 특유의 역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던 엘리오는 서둘러 폐성으로 향했다.
글라체스 요새 중앙 석조궁.
중대장인 엘리오가 가장 늦게 도착했지만 누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활활 타오르는 파이어 스톤 주위에 둥그렇게 모여 있던 대귀족들이 일제히 쳐다보자 엘리오가 변명처럼 말했다.
“성곽을 둘러보느라 늦었습니다.”
“괜찮소. 오히려 한참 바쁠 텐데 일선 중대장을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하오.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하기 위해 모셨소.”
이제는 에스카토스 공작도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말을 놓지 못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마물들 앞에서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보여 준 압도적인 검술 때문이다.
엘리오는 대귀족들 사이의 빈자리에 대충 쪼그리고 앉았다.
에스카토스 공작은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착석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현재 요새 주변 상황이 어떤지 아실 테니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마물의 숫자가 예상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균열을 통해 밤사이에 더 많은 마물이 내려온 것 같습니다. 이제는 오늘 하루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글라체스 요새에서 시간을 끌려고 했지만 불가능하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베일럼 왕국의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족의 공격이 본격화되면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성형요새는 마물이 아니라 인간을 막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
라미노프 왕국의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다.
“동감입니다. 마족들이 움직이기 전에……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대귀족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마수와 마물이 글라체스 요새를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떠날 방법이란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텔레포트나 메가 텔레포트를 이용하는 것이다.
문제는 텔레포트와 메가 텔레포트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의 숫자다.
세 왕국의 마법사들은 7서클 미만인지라 메가 텔레포트는 꿈도 꾸지 못한다.
마법사가 텔레포트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근거리 텔레포트로 몇 차례 왕복해서 데려간다 해도 열 명이 한계다.
그 이상 텔레포트를 쓰다가는 자칫 마법사와 동행자가 사차원의 공간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대귀족들은 빠르게 폐성에 모인 숫자를 헤아렸다.
원수, 대장군, 부장군, 참모장 등을 포함 왕국별로 평균 다섯이다.
나머지 다섯은 폐성 밖에 있는 귀족들 중에서 골라야 한다.
대귀족들은 각자 자기 쪽 사람을 살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폐성의 중앙 홀이 조용해졌다.
이윽고 세 명의 공작을 중심으로 대귀족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에스카토스 공작이 베르나르도 후작과 코드란테스 백작에게 말했다.
“각 영지에서 한 명씩 추천하시오. 남은 두 자리는 엘리오 남작과 그가 추천한 사람에게 내어 줄 것이오.”
엘리오가 놀란 눈으로 에스카토스 공작을 보았다.
자신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자신에게 한 사람을 추천하라니!
공작은 푸토코아 백작가 대신에 자신을 선택한 셈이었다.
베르나르도 후작과 코드란테스 백작은 이미 알고 있었던지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두 백작은 자신들의 참모인 오스카 아비드 자작과 베인 마리노 자작을 선택했다.
곧이어 에스카토스 공작, 베르나르도 후작, 코드란테스 백작이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누굴 선택했는지 말해 달라는 눈빛이다.
그런데 엘리오의 대답은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저와 파비안은 글라체스 요새에 남아 있겠습니다. 누군가는 남은 병사들을 지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에스카토스 공작이 그를 만류했다.
“경의 신의와 충성심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에스카토스에는 경이 필요하오. 글라체스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오. 히르헤라를 장악한 마족들을 몰아내려면 경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베르나르도 후작과 코드란테스 백작도 후작을 거들었다.
“공작님의 말씀이 맞소. 경은 절대 글라체스에 남아 있으면 안 되오.”
“라고아 경, 이번 한 번만 참읍시다. 더 큰 전쟁이 경을 필요로 하고 있소.”
그러나 엘리오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 몇 사람을 데리고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글라체스를 빠져나갈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두 자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 주세요.”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대귀족들도 더는 반대하지 못했다.
북부 최고의 기사가 빠져나갈 수단이 있다고 하니 믿은 것이다.
엘리오의 양보로 만들어진 두 자리는 푸토코아 백작가로 돌아갔다.
그렇게 글라체스 요새를 탈출할 귀족들이 정해졌다.
세 왕국의 대귀족들은 즉시 데리고 나갈 귀족들을 폐성으로 불러 모았다.
폐성에서 세 왕국의 회의가 열린 지 1시간도 안 돼 탈출이 시작됐다.
한편 루퍼스 중대로 돌아간 엘리오는 파비안을 조용히 불러냈다.
“너만 알고 있어라. 대귀족들은 글라체스 요새를 포기했다. 지금 은밀하게 텔레포트로 글라체스 요새를 떠나고 있는 중이다.”
“예? 그럼 기사들과 병사들은요?”
엘리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신이 봐도 글라체스 요새의 병력을 데리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파비안이 기막힌 얼굴로 확인하듯 물었다.
“여기서 죽으라는 건가요?”
“달리 방법이 없잖아. 마족과 만나기도 전에 왕국군은 괴멸 직전이야. 그런데 마물은 밤사이에 더 늘어났어. 마족이 쳐들어오면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다 죽을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기사들까지 버리다니…… 너무한 것 아닙니까?”
“너는 기사를 버린 것만 억울하지? 너도 똑같은 놈이야. 대귀족들 욕할 거 없어.”
“기사는 기사니까요.”
“그래, 그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런 걸 거야. 대귀족은 대귀족이니까.”
“하아! 그럼 중대장님은요? 중대장님도 떠나시는 겁니까?”
“나는 남겠다고 했다.”
엘리오는 파비안에게 폐성에서 있었던 회의 내용을 들려주었다.
“……그랬는데 너와 함께 남겠다고 한 거야. 이런 게 의리지. 안 그래?”
엘리오가 묻자 파비안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중대장님! 미치셨습니까! 왜 생지옥에 저를 끌고 들어가십니까! 예에? 저는 살고 싶습니다. 무조건 살고 싶다고요! 이제 겨우 소드 비기너가 됐는데 이런 곳에서 죽으라는 겁니까?”
“누가 죽으래?”
“누가 죽으라고 해야 죽습니까? 죽을 자리에 처박혀 있으면 죽는 거지.”
분노한 파비안이 엘리오에게 눈을 부라렸다.
어차피 죽게 됐다고 생각한 그는 물불 가리지 않았다.
“잘하면 치겠다?”
“어이구! 제 마음 같아서는 진짜…… 자근자근 밟아 주고 싶습니다.”
“누굴?”
“몰라서 묻습니까? 여기 중대장님과 저 외에 누가 더 있다고.”
“어휴! 옛 현자들의 말씀이 틀린 게 없어.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그런 말 한 현자 없습니다.”
“내 고향에는 있어 인마.”
“중대장님도 너무하십니다. 중대장님은 스왈로우 플라잉을 완벽하게 익히셨으니 어찌어찌 달아날 수 있겠죠. 저만 꼼짝없이 죽게 된 거 아닙니까?”
“내가 빠져나갈 방법도 없이 너랑 남겠다고 했겠냐?”
순간 시커멓게 죽어 가던 파비안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있습니까? 역시! 저는 중대장님을 믿었습니다.”
“믿어? 나를 자근자근 밟아 주고 싶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저도 사람인지라 그런 마음이 살짝 생기려고 했습니다만, 사라졌습니다. 어떤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얼른 가시죠?”
“가긴 어딜 가?”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면서요? 마족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가야죠.”
“그냥은 안 간다. 너도 대귀족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냐?”
“전쟁이라는 게 본래 그런 겁니다. 희생이 없는 전쟁은 없습니다.”
“와아! 이 뻔뻔한 얼굴 봐. 아까는 기사를 버렸다고 펄펄 뛰더니……. 뭐? 희생이 없는 전쟁은 없어?”
엘리오가 황당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겪으면 겪을수록 심통이다.
“그래서 마족과 싸우시겠다는 겁니까?”
“당연하지. 혹시 아냐? 우리가 이길지.”
“그럴 일은 없습니다. 대귀족들이 어떤 사람들인데요. 그들이 달아났다면 결과는 뻔한 겁니다.”
파비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세 왕국의 소드마스터들과 마법사들이 남아 있다면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져 볼 수도 있지만, 지금은 틀렸다.
아무리 엘리오 중대장의 검술이 뛰어나도 혼자서 마족을 물리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