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81
1081회. 미안한 마음?
대귀족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글라체스 요새를 떠났다.
하지만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먼저 이상을 감지한 곳은 푸토코아 백작가다.
푸토코아 백작의 참모인 리노 페인 자작은 서기 휴고 라모스 남작을 이끌고 외진 곳으로 갔다.
“백작님이 무슨 일을 계획하고 계신 것 같은데, 혹시 그에 관해 아는 바가 있나?”
“왜 그러십니까?”
“아침 일찍 폐성에 다녀오신 뒤로 좀 달라지신 것 같아서 그러네.”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뭘 할 수 있는 여건이 못 되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한데…….”
리노 페인 자작이 눈을 찡그렸다.
폐성에 다녀온 뒤로 기사단장 콜라시오 키퍼 자작이 갑자기 백작과 다니는 게 영 신경 쓰였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폐성에 다녀온 뒤로 기사단장의 행동이 좀 이상해서 그러네. 백작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처럼 굴고 있잖나.”
“폐성에서 라고아 남작과 또 충돌한 걸까요?”
“백작님의 표정이 밝은 걸 보면 그건 아닐세. 폐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겠어. 코드란테스 백작가의 서기가 자네와 아카데미 동기라지?”
“예.”
“가서 만나 보게. 분명히 뭔가 있을 거야. 느낌이 좋지 않아.”
“알겠습니다.”
휴고 라모스 남작은 곧바로 코드란테스 백작가의 서기를 찾아갔다.
성형요새에서는 왕국군 단위로 뭉쳐 있었기에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휴고 라모스 남작의 말을 들은 코드란테스 백작가의 서기 아르민 바이어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것참 이상하군. 우리 백작님은 한 시간 전부터 보이질 않아. 참모님은 뭔가 아는 눈치인데 영 말씀을 안 하시고. 나도 궁금해. 폐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코드란테스 백작님이 사라졌다는 말인가?”
“그렇다니까. 글라체스 요새에서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안 보이는지 모르겠어. 설마 요새를 포기하고 달아난 건 아니겠지?”
무심코 던진 아르민 바이어 남작의 말에 휴고 라모스 남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법사는? 궁정 마법사 메이지 칼로스 경은 지금 어디 있지?”
“뭐야? 정말 달아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르민 바이어 남작이 황당한 눈으로 휴고 라모스 남작을 보았다.
“우리 백작님은 라고아 남작을 죽이기 위해 암살 조직까지 고용했어. 대귀족들도 벗겨 놓고 보면 그냥 보통 사람이라고.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걸?”
“…….”
아르민 바이어 남작은 반박하지 않았다.
글라체스 요새의 상황을 보면 왠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결국 두 사람은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서기 글랜 테일러 남작을 찾아갔다.
얼마 후 서기들은 에스카토스 왕국의 공작, 후작, 백작들이 글라체스 요새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휴고 라모스 남작은 곧바로 참모인 리노 페인 자작에게 달려갔다.
서기의 보고를 들은 리노 페인 자작이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귀족들이 글라체스 요새를 탈출했다고?”
“그렇습니다. 에스카토스 공작, 베르나르도 후작, 코드란테스 백작이 사라졌습니다. 궁정 마법사인 메이지 칼로스 경이 텔레포트 마법으로 탈출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만 그러는 건 아닐 테고……. 베일럼과 라미노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테지?”
“마법사가 텔레포트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인원은 한 명입니다. 근거리 텔리포트를 쓰면 최대 열 명까지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작위 서열대로 탈출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아! 왕국에서 열 명이라…….”
대충 계산을 해 봐도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오늘따라 백작이 자신을 찾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수고했네. 그만 물러가 보게.”
“예, 그런데 자작님.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군장에서 술병을 꺼낸 리노 페인 자작이 휴고 라모스 남작에게 물었다.
“한잔할 텐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자 리노 페인 자작은 지친 얼굴로 그만 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
영원한 비밀은 없다.
특히나 글라체스 요새처럼 폐쇄된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대귀족들의 탈출 소문이 기사들 사이에 번져 나갔다.
기사들은 부하들을 전장에 남겨 두고 탈출한 대귀족들을 비난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에스카토스 왕국에서 열 명의 대귀족이 자취를 감추었다.
한 명의 소드마스터와 여덟 명의 소드 익스퍼트가 사라지자 에스카토스 왕국 기사들은 절망에 사로잡혔다.
글라체스 요새에 버려진 기사들의 이목이 루퍼스 중대로 쏠렸다.
북부 최강자로 알려진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다.
기사들은 ‘라고아 남작이 야인 출신이라 제외됐다’고 떠들어 댔다.
완고하고 이기적인 대귀족들을 생각하면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그런 기사들에게 라고아 남작의 참모인 파비안이 일갈했다.
“무슨 헛소리야? 우리 중대장님은 글라체스 요새를 지키기 위해 남으셨다고!”
파비안의 말이 광풍처럼 글라체스 요새를 휩쓸었다.
그리고 에스카토스, 베일럼, 라미노프의 기사들이 루퍼스 중대로 모여들었다.
정오 무렵.
파비안이 간이 막사에 틀어박혀 있는 엘리오를 찾아갔다.
“중대장님.”
“또 왜? 마족이 오기라도 했어?”
“마족은 아니고……. 기사들이 몰려왔습니다.”
“기사들이 왜? 너 사고 쳤냐?”
엘리오의 추궁에 파비안이 펄쩍 뛰었다.
“사고라뇨? 글라체스 요새에서 칠 사고가 있기나 합니까? 사방이 마물로 꽉 막혀 있는데.”
“그런데 기사들이 왜 몰려와?”
“그야 중대장님 때문이죠.”
“나? 내가 뭘 어쨌다고?”
“에스카토스, 베일럼, 라미노프 왕국의 원수, 대장군, 부장군, 참모장, 궁정 마법사가 죄다 사라졌습니다. 최고 지휘관들이 다 빠져나갔다 이 말입니다.”
“그럴 거라고 말해 줬잖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기사들은 중대장님이 글라체스 요새를 이끌어 주기 바라고 있습니다.”
“됐어. 누가 이끌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그냥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라고 해.”
“방금 하신 그런 말씀을 기사들에게 해 주십시오.”
“누가 이끌어도 다 죽으니까 알아서 싸우라는 말을 하라고?”
“아, 그게 그런 뜻이었습니까?”
“그럼 뭐 다른 뜻인 줄 알았냐? 말했잖아. 다 죽을 거라고.”
엘리오는 들고 있던 책을 펴서 얼굴에 덮었다.
오래된 책 특유의 향긋하면서도 약간 시큼한 냄새가 코로 밀려 들어왔다.
문득 남궁연이 떠올랐다.
그녀라면 책에서 나는 이런 냄새를 좋아할 것 같았다.
파비안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엘리오 중대장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죽음을 앞둔 자들과의 대화를 좋아할 사람은 없으리라.
하지만 그럴수록 더 엘리오 중대장을 기사들 앞에 세우고 싶었다.
“중대장님은 기사들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희망입니다. 저들을 구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절망이 아니라 희망 속에서 죽게 해 주십시오. 그것도 안 됩니까?”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아.”
“그럼, 그냥 멀리서 얼굴만이라도 보여 주십쇼. 기사들은 중대장님을 본 것만으로도 용기를 얻을 겁니다.”
“파비안.”
“예?”
“기사들을 동정하는 거냐?”
“…….”
파비안은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자신에게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파비안이 슬그머니 돌아설 때 엘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정하지 말고 연민하는 마음을 가져라.”
“예…….”
엘리오가 파비안의 등짝을 툭 치고 지나가며 말했다.
“기죽을 거 없다. 누군가를 동정하는 것도 나쁜 건 아니니까.”
“중대장님은 기사들에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미안한 마음?”
“왜요? 중대장님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탈출하지 않고 남아 주셨는데 왜 미안해 하십니까?”
“그러게 말이다. 왜 내가 그러는 걸까.”
엘리오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소란스럽던 성곽 일대가 조용해졌다.
엘리오는 성곽 가장자리에 올라가 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에스카토스는 물론 베일럼과 라미노프 왕국의 기사들까지 많이도 모였다.
베일럼 왕국군 기사들 속에는 애나 로건과 줄리 그린우드 남작도 있었다.
자신과의 친분에도 불구하고 대귀족들의 탈출 행렬에는 끼이지 못했던 모양이다.
기대로 가득 찬 기사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한숨만 나왔다.
이윽고 엘리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슬래시 랜드의 영주이자 루퍼스 중대장인 엘리오 라고아 남작입니다. 여러분들은 왜 나를 찾아왔습니까?”
그러자 기사들이 소리쳤다.
“최고 지휘관들이 모두 달아났습니다! 라고아 남작님!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라고아 남작님! 저희를 구해 주십쇼!”
“남작님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산발적으로 외치던 소리가 가라앉았다.
묵묵히 듣고 있던 엘리오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죠. 나는 부대를 지휘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루퍼스 중대를 지휘하는 것도 벅차요. 여러분들을 이끄는 건 내 능력 밖입니다.”
그의 거절에도 기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남작님과 함께 싸우게 해 주십시오!”
“저희를 버리지 말아 주십쇼!”
기사들이 애걸복걸하자 마음 약한 엘리오는 더 이상 거부하지 못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지휘하지 않습니다. 승리를 약속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도 좋다는 기사들만 루퍼스 중대로 오십쇼.”
엘리오의 말에 기사들은 열띤 얼굴로 ‘와아아!’ 소리쳤다.
그 소리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
글라체스 요새 인근을 어슬렁거리던 마수와 마물 들이 일제히 요새를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글라체스 요새를 중심으로 인간과 마족의 전쟁이 재개됐다.
엘리오는 돌출한 성곽 끝에서 밀려오는 마수와 마물을 베어 넘겼다.
마수와 마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엘리오를 넘지는 못했다.
급기야 마수와 마물의 시체가 글라체스 요새 높이만큼 쌓였다.
동족의 시체를 밟고 마수와 마물 들이 전진했지만 엘리오의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엘리오는 승리를 약속하지 않았지만, 마치 신처럼 루퍼스 중대의 앞을 지켰다.
그러나 그의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글라체스 요새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성형요새의 다른 네 부위를 지키던 왕국 연합군들이 마수와 마물의 첫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왕국 연합군들은 싸움이 일어난 지 고작 10분도 안 되어 중앙의 폐성까지 밀려났다.
성형요새 대부분이 마수와 마물에 점령당하자 엘리오는 루퍼스 중대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을 이끌고 폐성으로 들어갔다.
등 뒤를 마수와 마물에 내어 준 채 싸움을 이어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폐성에 모인 병력은 삼백을 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성형요새를 지키던 천칠백이 사망한 것이다.
병사들이 창문과 문을 폐성에 굴러다니는 낡은 가구들로 틀어막았다.
마수의 일격에 가루가 될 테지만 엘리오는 병사들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그게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수와 마물 들이 가구를 부수고 들어와 인간을 낚아챘다.
어떤 이는 때마침 근처에 있던 기사들의 도움으로 살았지만, 많은 병사들이 마수와 마물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폐성 중앙 홀 곳곳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파이어 스톤의 불빛에 어두컴컴하던 중앙 홀 내부가 밝아졌다.
엘리오는 그중 하나의 앞에 앉아 하염없이 불길을 바라 보았다.
파비안에게 말했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끝내도 괜찮은 걸까?’
자신은 아직 능력을 다 드러내지 않았다.
드러낼 생각도 없었다. 최후의 순간 파비안만 데리고 탈출할 계획을 세운 것도 그래서다.
천자마와 금사를 죽이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그때 루퍼스 중대의 막내인 소년병이 파비안에게 다가가 뭔가를 내밀었다.
“뭐냐?”
“편집니다. 혹시 살아남으시면 저희 집에 전해 주십사 해서요.”
멈칫하던 파비안은 소년병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쪼그리고 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엘리오가 말했다.
“돌려줘라. 파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