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82
1082회. 볼 필요가 없다?
소년병과 파비안의 대화를 지켜보던 엘리오는 생각했다.
자신이 일찍 고향에 돌아가는 것과 저 사람들의 목숨 중 어느 게 더 중요한 것인지를.
‘제길. 너무 오래 있었다니까.’
그렇게 병사들과 거리를 두며 지냈는데 최후의 순간에 발을 못 빼겠다.
파비안은 편지를 돌려주라는 중대장의 말을 감히 거역하지 못했다.
그는 소년병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도리안요.”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리안에게 파비안이 편지를 돌려주며 말했다.
“도리안. 그런 건 네가 직접 해야 되는 거야. 알겠냐?”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살아 인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으라고. 북부 최강의 루퍼스 중대원이 죽는 거부터 생각하면 되겠냐?”
파비안도 양심이 있는지라 ‘중대장님을 믿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파비안과 엘리오의 눈치를 보던 도리안이 터덜터덜 제자리로 돌아갔다.
도리안이 막 불가에 쪼그려 앉을 때다.
콰자작―!
목재로 막혀 있던 창문이 터져 나가며 가시 돋친 촉수가 폐성 안으로 쑥 들어왔다.
‘그루브’라 불리는 마물의 입에서 나온 촉수였다.
가시 촉수가 눈 깜빡할 사이에 도리안을 휘감더니 끌어당겼다.
“악!”
도리안의 비명에 기사들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모두가 도리안이 끝났다고 생각할 때다.
쐐애액―!
빛살처럼 날아간 롱소드가 마물의 촉수를 단숨에 잘라 냈다.
도리안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라붙어 그의 몸에서 촉수를 떼어 냈다.
그러는 동안 기사들은 롱소드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촉수를 잘라 낸 롱소드는 놀랍게도 ―마치 자아를 가진 것처럼― 중앙 홀 위를 한 바퀴 돌더니 엘리오 중대장에게 돌아갔다.
그건 소드마스터들도 따라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천상의 검술이었다.
이 순간 기사들은 생각했다.
엘리오 중대장과 함께라면 글라체스 요새를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다 죽어 가던 기사들의 얼굴에 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기사들의 투기는 병사들에게도 전해졌다.
절망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기사와 병사 들의 눈빛이 조금씩 변해 갔다.
베일럼 왕국의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 애나 로건에게 속삭였다.
“애나. 방금 본 검술에 대해 알아?”
애나 로건이 줄리 그린우드를 구해 준 뒤로 두 사람의 관계는 아카데미 선후배로 돌아갔다. 지금은 눈이 마주치면 눈인사를 건넬 정도는 됐다.
“모르겠어요. 저도 처음 봐요.”
“자아가 있는 마법검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두 사람은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되돌아간 검을 마법검으로 생각했다.
물론 그런 마법검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러자 때마침 그녀들의 근처에 있던 롤프 프릿츠 남작이 짧게 말했다.
“마법검이 아니오.”
애나 로건과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 중년의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푸토코아의 롤프 프릿츠 남작이오. 라고아 남작님이 저 검으로 신발에 묻은 흙을 긁어내는 걸 보았소. 그러니 자아가 있는 마법검은 아닐 게요.”
두 여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다면 자아가 있는 마법검으로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롤프 프릿츠 남작이 계속해서 말했다.
“라고아 남작님의 검술은……. 대륙 검술과는 궤를 달리하오. 저것도 그중에 하나일 게요.”
“푸토코아 백작가와 라고아 남작님과의 이야기는 들었어요. 푸토코아의 기사들은 라고아 남작님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가 봐요? 아, 난 베일럼의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에요.”
“이전에는 잠깐 그랬던 적이 있소. 그러나 이곳에 남아 있는 기사들에게 라고아 남작님은 희망 그 자체요. 전에는 라고아 남작님의 강함이 원망스러웠는데,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할까. 아무튼 그렇소.”
“재밌군요. 그런데 기사들이 살아서 푸토코아로 돌아가도 문제겠네요. 몰래 달아난 백작이 반겨 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 푸토코아의 백작도 달아난 거 맞죠?”
“작전상 후퇴라고 합시다. 반겨 주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내치지도 않으실 게요. 푸토코아를 운영하려면 기사들의 힘이 필요하니까.”
“남작님은 긍정적인 분이시네요. 지금과 같은 때에 푸토코아 영지의 운영이 가능할 것 같으세요? 에스카토스 왕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베일럼 왕국의 귀족들도 반쯤은 포기한 분위긴데.”
롤프 프릿츠 남작이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힐끔 보았다.
“현실은 그런데 왠지 라고아 남작님이라면……. 북부가 무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오. 뭐, 정확히는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고 있소.”
주변에 있던 푸토코아의 기사들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바람과 달리 어둠의 에테르[魔氣]는 더욱 강하게 폐성을 뒤덮었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진땀이 흘러내릴 정도였다.
정신력이 약해진 병사들은 환각이나 환청을 듣고 미쳐 날뛰기도 했다.
중앙 홀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나를 각성한 기사들을 제외한 일반 영지병들에게 어둠의 에테르는 치명적이었다.
영지병들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고, 발작하는 병사들도 급속도로 늘어 갔다.
급기야 병사 하나가 칼을 들어 옆사람에게 휘두르기까지 했다.
병사들을 둘러보던 파비안이 엘리오 중대장에게 다가갔다.
“중대장님. 이제 그만 움직이시지요.”
“움직이자고?”
“중대장님의 마음은 알지만……. 최후는 보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파비안은 엘리오 중대장의 마음이 약해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엘리오의 발을 잡고 있는 건 그게 아니었다.
“병사들이 어둠의 에테르에 잠식당하고 있습니다. 기사들까지 어둠의 에테르에 잠식당하면……. 마족이 오기 전에 스스로 자멸할 겁니다. 구태여 그런 것까지 보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볼 필요가 없다?”
“예.”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비안은 엘리오 중대장이 결심을 굳힌 줄 알고 그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 마법이든 뭐든 써서 자신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가 기대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리오가 파비안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아무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 성 밖에는 어둠의 에테르가 더 강해서 나가자마자 바로 미쳐 날뛸 거야. 구멍이라는 구멍은 다 막고, 안에서 기다리게 해.”
“기다리게 하라니요? 설마 저를 두고 혼자 도망가시겠다는…….”
“누가 도망간대? 마족들을 글라체스 요새에서 쫓아내야지. 그러려고 남은 거였잖아.”
순간 파비안의 얼굴이 굳었다.
뒤이어 ‘엘리오 중대장이 자신을 버리고 혼자 빠져나가려 한다’ 착각한 그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쇼. 제가 도리안처럼 어리바리한 애인 줄 아십니까? 중대장님 혼자서 무슨 수로요? 세 개 왕국 연합군도 포기한 작전입니다. 소드마스터 할아비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라고요. 저를 데리고 떠날 기회가 있었잖습니까? 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렇게 저를 죽이고 싶으셨습니까?”
“뭐래 이놈이. 너 뭐 잘못 처먹었냐? 아니면 어둠의 에테르에 벌써 잠식당한 거냐?”
“말 돌리지 마십쇼! 저를 이곳에 남겨 두고 중대장님 혼자서 나가신다니 그러는 거 아닙니까!”
“나가면 뭐? 네가 마족과 싸울 수 있어?”
그러자 파비안이 한껏 소리를 낮춰 호소했다.
“누가 싸운 답니까? 최후의 순간이 오면 저를 데리고 빠져나가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저더러 남아 있으라니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내가 생각을 바꿨다.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다 살리기로. 왜? 너만 살고 다른 사람은 싹 다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냐?”
“아니, 마음은 알겠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파비안.”
“예?”
“닥치고 구멍이나 잘 막아. 에혀! 눈으로 봐야만 믿는 심통 같은 새끼.”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엘리오가 중앙 홀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성 밖에 어둠의 에테르가 가득하니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습니다! 그동안 나는 마족의 군주를 찾아 싸우든 협상하든 해 보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예!”
기사들이 이미 어둠의 에테르에 잠식당한 병사를 대신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흡족한 얼굴로 지켜보던 엘리오가 천둔검을 뽑아 어깨에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쿵 소리와 함께 중앙 홀로 통하는 출입문이 막혔다.
단단히 막힌 문을 보던 엘리오가 중얼거렸다.
“안 보게 하면 되는 거지.”
사실 구멍을 다 틀어막아 어둠의 에테르를 막는다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폐성의 구멍을 막은 건 목격자를 없애기 위한 꼼수에 불과했다.
“설마하니 이세계에서 마족이 신들과 호형호제하고 지내는 건 아니겠지?’
엘리오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냈다.
그렇다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지만, 그런 것까지 고려할 상황은 아니었다.
이윽고 그는 가볍게 발을 굴러 성탑 위로 날아올랐다.
성형요새는 이미 마수와 마물 들로 가득했는데, 그중 일부는 마치 담쟁이덩굴처럼 성벽에 달라붙어 있기도 했다.
나와서 보니 폐성이 아직까지 함락당하지 않은 게 이상해 보일 정도다.
“마족을 기다리는 건가?”
그의 말에 답이라도 하듯 마수와 마물을 양편으로 가르며 마족들이 몰려왔다.
선두에 선 것은 지난번에 살려 보낸 아나킨이라는 마족이고, 그들의 뒤를 머리에 사슴뿔을 가진 거인 수백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저건 또 뭐지?”
정체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나타나자 마기는 더욱 짙어져 눈알까지 따가울 정도였다.
급기야 또렷하던 사물이 두세 개로 겹쳐 보이기까지 하자 엘리오는 무심코 소요종의 안법인 추도영법(追到靈法)을 펼쳤다.
그제야 폐성 일대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족의 등장과 함께 한동안 잠잠하던 글라체스 요새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성벽에 가만히 붙어 있던 마물들이 갑자기 꿈틀꿈틀 움직였고, 폐성 주변을 맴돌던 마수와 마물 들도 일제히 폐성으로 몰려갔다.
성탑 위에 서 있는 그에게도 흡혈 파리들이 새까맣게 날아들었다.
부우우―.
시커먼 구름 덩이가 몰려오자 엘리오는 천둔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구천구검 육 식 뇌풍상여(雷風相與)가 펼쳐졌다.
천둔검 끝에서 일어난 바람이 흡혈 파리들을 한데 모으자, 그 중심에서 벼락이 호응하듯 일어났다.
휘우우웅― 번쩍―!
단 일검에 흡혈 파리들이 새카맣게 타서 성형요새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내친김에 엘리오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소요종의 절기인 천산검영(千山劍影)이다.
천백억이나 되는 ‘검의 화신(化身)’이 마기로 물른 하늘을 가득 채웠다.
엘리오가 천둔검을 아래로 긋자 ‘검의 화신’들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퍼퍼퍼퍽―! 퍼퍽―!
폐성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 ‘검의 화신’이 꽂혔다.
상위 마물의 경우 피부만 찢어졌지만, 그 아래 마물과 마수 들 몸통에는 구멍이 났다.
마족이라고 무사한 것은 아니다.
하위 마족인 아나킨들은 온몸에 피를 철철 흘리며 ‘검의 화신’을 피해 뛰어다녔다.
그보다 강한 용족 드라고니안들에게도 ‘검의 화신’은 위협적이었다.
아나킨들이 중상이라면, 드라고니안들은 경상 수준이지만, 우박처럼 퍼붓는 절대적인 양이 문제다.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는 말이 있듯, 경상이 중첩되면 중상으로 발전하는 법.
승리를 확신하고 온 드라고니안들이 기함을 할 정도로 ‘검의 화신’은 많았다.
‘검의 화신’이 한차례 쓸고 지나가자 모래알처럼 가득하던 마수와 마물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마족들은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벌써 기진맥진한 얼굴들이다.
예기치 못한 치욕에 이를 갈던 드라고니안의 지도자인 드라고드가 성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곳에 인간의 우두머리가 있다!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