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25
1125회. 친구의 친구는 내 친구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입술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오른팔과 같았던 수하에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마일로 워커 자작은 십오 년이라는 세월을 그와 함께했다.
오랜 세월 함께한 만큼 가족들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모르는 사람은 두 사람을 형제로 오해할 정도였다.
그런 관계가 단 몇 달 만에 깨진 것이다.
깨진 정도가 아니다.
마일로 워커 자작은 소드마스터의 문턱에 도달한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제거하기 위해 독까지 먹였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그의 친위대가 마일로 워커 자작과 정체 모를 기사들에게 쫓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악에 받친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피를 토하며 한마디 더했다.
“마일로 워커! 네놈이 그러고도 기사냐!”
그러자 마일로 워커 자작이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 치졸하게 굴지 말고 기사답게 가십쇼. 백작과 나는 이미 갈라섰고, 피차 적입니다. 백작도 소싯적에는 독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개구리가 되니 올챙이 적 시절을 잊은 겁니까?”
“나는 동료에게 독을 먹인 적은 없다. 네놈은 웃는 얼굴로 다가와 나에게 독을 먹이지 않았느냐!”
“그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나는 2왕자가 왕위에 오르던 날 백작과 결별했습니다. 그리고 새로 모실 주인을 찾았지요. 새 주인이 백작의 목을 원하고 있습니다. 기사로서 당연히 주군의 바람을 들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싸움에 패했다고 적을 모욕하는 것이야말로 기사의 도리가 아니지요. 베일럼의 호랑이도 죽을 때가 되니 마음이 약해지시나 봅니다. 남 탓을 하는 걸 보니.”
“뱀 같은 혓바닥이로구나. 네놈이 뭐라고 하든! 세상은 너를 주군에게 독을 먹인 배신자로 기억할 것이다!”
그에 마일로 워커 자작은 냉소를 날렸다.
“흥! 과연 그럴까? 세상은 패자를 기억해 주지 않아. 지금까지 당신과 내가 죽인 귀족들을 떠올려 봐.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 건, 그들을 죽인 우리밖에 없어. 알아? 당신도 권력 다툼 중에 죽은 이들 중 하나일 뿐이야. 독? 배신? 당신의 직계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당장의 세상은 승자를 칭송한다고.”
“네놈의 배덕과 악행은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푸흐흣! 역사? 나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면 돼. 죽은 뒤의 역사 따위에는 관심 없어. 그리고 어차피 우리 이름은 역사에 남지도 않을 거야. 소드 익스퍼트는 많잖아. 아, 실컷 떠들었더니 개운하다. 그만 가 주시죠. 백작님.”
마일로 워커 자작이 주변의 기사들에게 턱짓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 세 명의 기사가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달려갔다.
챙! 챙! 채앵―!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지만 악착같이 버텼다.
그러는 동안 숲으로 숨었던 총사대가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냈다.
마력총의 총구가 백작의 친위대를 향했다.
퍼퍼퍼펑―!
다시 두 명의 친위대 기사가 머리에 마력탄을 맞고 쓰러졌다.
남은 다섯 명의 친위대 기사들이 정면으로 돌격했다.
철벽처럼 버티고 있던 스물일곱 명의 기사와 친위대가 뒤섞였다.
총사대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빠졌다.
마일로 워커 자작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그의 친위대를 번갈아 보았다.
‘5분 안에 정리가 되겠군.’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역사 운운했지만 모두 허튼소리다. 사실 폴 허먼 백작과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이야말로 역사의 중심이었다.
재야인사인 제럴드 로건 백작에게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지킬 힘이 없다.
새 왕의 관심이 다른 데로 쏠리면, 폴 허먼 백작 측에서는 원수인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제거할 터였다.
자작에 불과한 자신도 함께 쓸려 나갈 것은 자명한 사실.
그래서 적이었던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다행히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제거에만 관심이 있었다.
어차피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사라지면 그 아래 귀족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함께 죽느냐?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의 휘하로 들어가 영화를 누리느냐?
그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은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을 선택했다.
왜냐고?
귀족이 정쟁에 뛰어드는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다.
누가 성공이 보장된 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 간단 말인가!
“크윽!”
비명 소리에 힐끔 돌아보니 백작의 친위대 하나가 주저앉고 있었다.
‘쯧! 줄을 잘 섰어야지.’
친위대 기사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오늘 아침까지 그들과 웃고 떠들며 농담도 주고받았다.
저들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서 비껴 났기 때문에 죽는 거다.
그뿐이다.
상념에 빠진 마일로 워커 자작의 곁으로 기사 하나가 다가갔다.
“베일럼의 호랑이답게 오래 버티는구려. 자작의 협조가 아니었으면 도리어 당했을 것이오. 소드마스터에 근접했다고 하더니…… 휴우!”
마일로 워커 자작이 고개를 돌렸다.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의 충신인 스벤 하우저 자작이었다.
자신에게 독을 건네준 당사자이기도 하다.
정가의 귀족들은 스벤 하우저 자작을 개, 자신을 늑대라 했다.
주군에게 독을 썼으니 이제는 다른 별명이 붙겠지만 말이다.
그때 뒷걸음질 치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나무 뿌리에 걸려 나동그라졌다.
순간 스벤 하우저 자작이 중얼거렸다.
“이제 끝났군.”
마일로 워커 자작은 그건 차마 못 보겠는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사지에 힘이 풀린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일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꾸물거리는 그를 세 명의 기사가 에워쌌다.
이윽고 그들이 상처 입은 호랑이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 할 때다.
“뭐야? 도둑인 줄 알았는데 기사네? 봐 봐! 기사 맞지?”
“예, 베일럼의 내분이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안 끝났나 보네요.”
“아니, 지금 때가 어느 땐데 한가하게 집안싸움이래? 이거 왕을 잘못 세운 거 아냐?”
“제발 그런 말씀 하지 마시라고요. 누가 들으면 큰일 납니다.”
“큰일은 개뿔. 힘이 넘쳐서 자기들끼리 물어뜯는 걸 보고도 그런 소리야?”
“정쟁은 어느 왕국에나 있습니다.”
“…….”
씩씩거리던 젊은 사내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친위대를 몰아붙이던 기사들은 잠시 멈춰 선 채로 숨 조절에 들어갔다.
기묘한 침묵이 다크포레스트에 감돌았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세 명의 기사는 칼끝으로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겨눈 상태에서 고개를 돌렸다.
불청객들의 난입에 당황해 어찌해야 할지를 묻는 것이다.
마일로 워커 자작은 후미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축 늘어져 있으니 불청객부터 처리할 요량이었다.
십여 명의 기사들이 빠르게 불청객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물고기가 그물에 갇히자 마일로 워커 자작은 불청객들에게 다가갔다.
“보아하니 기사들인 것 같은데 소속이 어디냐?”
파비안이 떨떠름한 얼굴로 나섰다.
“저는 에스카토스 왕국의 기사인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마일로 워커 자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인데 더 이상은 모르겠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면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내가 누군지는 알 것 없다. 에스카토스 왕국의 기사가 베일럼에는 무슨 일인가?”
“자작님을 모시고 제도로 가는 길입니다.”
“자작이라고?”
마일로 워커 자작이 남작의 옆에 있는 청년을 보았다.
“작위를 세습받았나 보군. 선친이 누군가?”
그는 상대가 누군지 정도만 알아낸 후에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자 파비안이 턱을 빳빳이 세우고 말했다.
“우리 자작님은 작위를 세습받지 않았습니다. 히르헤라에서 세운 공적으로 작위를 받으셨지요. 정식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슬래시 랜드의 영주이시며, ‘히르헤라의 수호자’로 알려진 엘리오 라고아 자작님이십니다. 참고로 미천한 저는 ‘균열의 기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
순간 마일로 워커 자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째 귀에 익은 이름이다 했는데 히르헤라 주둔지의 영웅들이라니! 다 잡은 물고기인 줄 알았는데 감당할 수 없는 괴수였다.
“나, 나는 마일로 워커 자작이오. 북부의 영웅들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마일로 워커 자작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 앞에서 버벅거릴 때, 스벤 하우저 자작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 주위에 있는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죽여라.’
그는 지금이 백작을 죽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 크게 문제 삼지는 않으리라.
세 명의 기사들이 칼끝을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갑옷 사이로 밀어 넣으려 할 때다.
멀뚱멀뚱 서 있던 엘리오가 준비하고 있던 동전을 튕겼다.
따다당―!
동전에 맞은 기사들의 롱소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스벤 하우저 자작의 기사들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명성에 눌려 슬그머니 검을 거두었다.
그들의 지휘관인 스벤 하우저 자작도 그런 기사들을 탓하지 않았다.
소드마스터는 물론 마족들까지도 꺾은 북부 최강의 검사가 금지하는 일이니 무조건 따라야 했다.
그렇다 해도 이대로 맥없이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
스벤 하우저 자작은 미소를 지으며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다가갔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님,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님의 휘하에 있는 스벤 하우저 자작입니다.”
그는 같은 작위임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존대를 사용했다.
그것이 초면의 상대에게 호감을 이끌어내는 효과적인 방법인 까닭이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입니다.”
존대의 효과일까?
스벤 하우저 자작을 보는 엘리오의 시선은 마일로 워커 자작 때와 달랐다.
거기서 용기를 얻은 스벤 하우저 자작이 슬쩍 운을 뗐다.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과 제럴드 로건 백작은 모두 2왕자인 리베라토 3세 전하의 충신입니다. 그러나 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다르지요. 그는 1왕자를 위해 리베라토 3세 전하의 측근을 암살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제럴드 로건 백작에게 간 것은…….”
“거기까지.”
엘리오가 스벤 하우저 자작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눈을 끔뻑이는 스벤 하우저 자작에게 말했다.
“나는 남의 나라 정치에 관심 없어요.”
“그러시다면 왜…….”
“내 고향에 이런 말이 있어요. 친구의 친구는 내 친구다.”
말과 함께 엘리오가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손을 뻗었다.
죽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그에게 날아왔다.
엘리오는 날아온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자신의 옆에 눕힌 뒤, 황망한 얼굴로 서 있는 마일로 워커 자작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당신. 해독제 내놔. 없으면……. 두 팔을 자를 거야.”
엘리오는 딱히 의리를 중시하지 않지만, 뒤통수 치는 건 혐오했다.
게다가 독이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독을 이용해 주군의 뒤통수를 친 마일로 워커 자작은…… 사람도 아니었다.
마일로 워커 자작은 즉시 품에서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크기의 종이 약봉투를 꺼냈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기예를 본 직후라 반항은 생각지도 못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엘리오가 눈짓하자 마일로 워커 자작은 마지못한 얼굴로 약봉투를 펼쳐 ―그 속에 있던― 가루약을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입에 털어 넣었다.
잠시 후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제야 엘리오는 스벤 하우저 자작과 마일로 워커 자작 일행을 쫓아내듯 돌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