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48
1148회. 그것 때문에 내가 화가 난다고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말에 파비안은 떨떠름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하늘의 뜻이라니.
소드마스터가 되더니 백작이 조금 달라진 느낌이다.
호구 잡힌 물주에서 갑자기 현자가 된 것 같다고나 할까?
문득 저러다 대수림까지 따라나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백작님.”
“뭔가?”
“아, 아닙니다.”
파비안은 ‘언제 베일럼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물으려다 참았다.
자신이 백작과의 동행을 꺼려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파비안을 힐끔 보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가도 가도 갈림길이 나오지 않자 엘리오가 마부에게 소리쳐 물었다.
“하비 씨! 얼마나 더 가야 다른 길이 나오나요?”
“제 기억에 두 시간은 가야 합니다.”
순간 엘리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통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거마창(拒馬槍)과 목책에 막혀 이고생이라니!
지금이라도 마차를 돌리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후아! 파비안.”
“예?”
“이 세상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것 같아.”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강물은 말이지 상류로 올라갈수록 맑거든. 사람들이 위의 세계[上界]를 우러러보는 것도 같은 이치야. 아래 세계[下界]보다 위의 세계가 좋다고 믿는 거지. 그래서 심신 수련도 하고, 길[道]도 닦고 해서, 어떻게든 위의 세계로 넘어가려고 발버둥을 치거든.”
“길을 닦는 게 위의 세계로 가는 데 도움이 됩니까? 그런 막노동으로는 귀족이 되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닥치고 들어 봐.”
“예, 예.”
“그런데 말야. 위의 세계가 맑지가 않아. 그냥 위에 있을 뿐이지 하는 짓은 아래 세계와 비슷해. 아니 그냥 똑같아. 뭐, 그러니까 카마 데비아스(천자마)와 우샤스 운드라(금사) 같은 게 나왔겠지? 아래고 위고 더럽기는 마찬가지다 이 말이야. 아까 그 피데스 뭐시기라는 자작만 해도 그래. 우리가 여행자들인 거 알았으면 그냥 보내 줘도 되잖아? 우리는 자기들과 아무 상관 없는, 말 그대로 지나가는 사람들이잖아. 그런데 왜 길을 막고, 빙빙 돌아가게 하느냐 이 말이야. 왜 그런다고 생각해?”
“물류와 인적 교류 모두를 틀어막기 위해서 그러는 거겠죠.”
“아니야.”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어, 말했잖아. 맑지가 않다고. 뭐라고 핑계 대도 근본이 구질구질해서 그런 거야. 이 세계 인간성도 역시나 글러 먹었다고! 씨발!”
엘리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갈 길이 멀고, 시간은 없는데, 하찮은 이유로 발목을 잡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상계라더니, 강호에서 만났던 인간 군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도를 닦는 것일까?
상계의 진면목을 본 엘리오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상계의 인간들이면 하계의 인간보다 인간성이 뛰어나야 하는데, 겪어 보니 똑같다.
생불(生佛)이나 신선들이 살 줄 알았는데 사방 천지에 개새끼들 뿐이다.
파비안은 길길이 날뛰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도 막돼먹은 용병들처럼 귀족 앞에서 가래침을 찍찍 뱉으면서, 왜 이 세상 사람들의 인간성을 욕하는지 모르겠다.
“자작님, 진정하십쇼. 피데스 마텔로 자작과 같은 귀족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바로 그거야. 선량하고 고상한 귀족이 없다는 거. 그것 때문에 내가 화가 난다고.”
“그게 어때서요?”
“…….”
파비안의 반문에 엘리오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건 하계의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배신감인 까닭이다.
잠시 후 갈림길이 나오자 마부는 가볍게 채찍을 휘둘렀다.
말들이 힘차게 앞으로 치고 나가자 마차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석양이 질 무렵, 천천히 속도를 줄이던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마차에서 내린 엘리오 일행에게 마부, 하비가 말했다.
“산이 점점 깊어지는데 인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쯤에서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에게 밤길은 아무리 그것이 잘 닦인 길이라 해도 위험하다.
돌을 잘못 밟거나, 구덩이에 발목이 삐끗하면 큰 부상을 입기 때문이다.
엘리오 일행은 노련한 하비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숲속이라 그런지 기온이 떨어지자 하비는 나무를 주워 모닥불을 피웠다.
엘리오 일행은 딱히 추위를 느끼지 않았지만 하나 둘 모닥불에 모여들었다.
하비는 익숙한 동작으로 솥을 걸고 고기 스튜를 끓였다.
빵을 찢어 스튜에 찍어 먹던 파비안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이대로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며 이를 갈던 피데스 마텔로 자작이 신경 쓰여서가 아니다.
히르헤라에서 지겨울 정도로 싸웠던 파비안은 모처럼의 평화가 좋았다.
아까 한차례 다 쏟아 낸 엘리오는 시들한 얼굴로 빵과 스튜를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하비는 가까운 물가로 솥단지와 나무 접시들을 가지고 가서 닦았다.
엘리오가 하비를 보며 중얼거렸다.
“참 부지런한 사람이야. 마부들은 여기나 거기나 비슷하네.”
이제 상계와 하계가 같다는 건 두 번 말하면 입이 아플 지경이다.
엘리오는 더 이상 상계에 대한 환상을 품지 않기로 했다.
그는 마하담(공간 창고)에서 군용으로 제작된 간이침대를 꺼내 모닥불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하나씩 던졌다.
천막은 치고 걷는 게 귀찮아 사용하지 않은 지 여러 날이다.
이윽고 엘리오와 라르바 오마르 백작, 파비안은 각자의 간이침대를 펼쳤다.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온 하비도 하나 남은 간이침대를 뚝딱뚝딱 설치했다.
이미 여러 차례 사용했는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손놀림이다.
***
자정 무렵.
선두에 있던 황금 방패 기사단 단장 얼 그레이가 재빨리 손을 들어 올렸다.
숲길을 전진하던 30명의 기사단원이 우뚝 멈춰 섰다.
얼 그레이 기사단장이 옆사람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저 마차요?”
피데스 마텔로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모닥불 주변에서 자고 있는 저 네 사람이 그들이오.”
얼 그레이 기사단장이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부 하나를 제외하면 귀족이 셋.
백작의 투기가 예사롭지 않다지만 이게 기사단까지 투입할 일인지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에스쿠도 백작의 지시가 떨어졌으니 오늘 밤 저들을 이곳에 묻어야 한다.
그는 부단장 버스터 룩 남작에게 손을 까딱였다.
총병과 궁수를 데리고 적당한 곳에 매복하라는 지시다.
마력총은 가격이 비싸 황금 방패 기사단의 다섯 명에게만 지급되었고, 나머지 다섯은 석궁을 가지고 다녔다.
열 명의 기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실 일반 총병만 해도 압도적인데 마력 총사 다섯이니 저들은 시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기사단장은 부단장이 사라지고 5분쯤 지난 뒤에 다시 살금살금 움직였다.
‘확실한 게 좋겠지. 사자는 사슴 한 마리를 잡아도 전력을 다하니까.’
에스쿠도 백작이 황금 방패 기사단에게 이번 일을 맡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물론 저들이 아에토스 백작가의 지원군이라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눈곱만큼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사전에 처리하는 게 맞다.
북부 귀족들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는 위치까지 전진한 기사단장은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오랜만의 암습에 긴장했는지 심장이 주책맞게 벌렁거렸다.
그가 막 어딘가 숨어 있을 부단장에게 신호를 보내려 할 때다.
네 사람 중 하나가 부스스 상체를 일으키더니 이내 땅에 내려섰다.
그가 꺼져 가는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자 불길이 화르륵 일어났다.
불빛에 단단한 얼굴이 드러났다.
베일럼의 호랑이라 불리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었다.
백전노장인 그가 얼 그레이 기사단장이 있는 곳을 향해 말했다.
“기사라면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피차 누군지는 알고 손을 써야 하지 않겠나.”
얼 그레이 기사단장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기사단장의 체면이 있지 저런 소리를 듣고도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깊게 잠들지 않았던 파비안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란 통에 일어나려던 마부를 엘리오가 격공점혈로 재웠다.
마부가 다시 눕고, 엘리오가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그는 간이침대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한쪽 팔을 머리에 괴고 길게 드러누워 구경하는 자세를 취했다.
얼 그레이 기사단장은 재빨리 이방인들을 살폈다.
오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기사가 백작일 테니 그만 주의하면 되리라.
‘백작의 경지는 알 수 없지만 마력 총사가 다섯이나 되니 걱정할 일은 없겠지.’
젊은 기사가 제법 노련한 척하지만 저 정도는 석궁으로도 제압이 가능하다.
게으름 피우는 기사와 마부를 마지막으로 처리하기까지, 넉넉잡아도 5분 안에 정리가 될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한 얼 그레이 기사단장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에스쿠도 백작가의 황금 방패 기사단장 얼 그레이 자작이오. 귀하는 누구요?”
백작이 자연스럽게 마부를 가리고 섰다.
일반인에 불과한 마부를 기사단의 공격에서 지키기 위함이다.
“나는 베일럼 왕국의 기사인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다. 에스쿠도 백작가의 기사단과 우리가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했던가?”
그러자 피데스 마텔로 자작이 뒤에서 소리쳤다.
“백작도 라고아 자작이 우리 백작님을 모욕하는 걸 보지 않았소! 에스쿠도 백작님을 모욕했는데 우리가 그냥 넘길 거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어쩌겠다고 야심한 밤에 떼거리로 몰려왔나?”
그에 대한 대답은 얼 그레이 기사단장이 했다.
“왜 왔겠소? 죽이려고 왔지.”
말과 함께 얼 그레이 기사단장이 손을 까딱였다.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마력총이 불을 뿜고, 석궁이 화살을 쏟아 냈다.
퍼퍼퍼펑―!
촤촤촤촥―!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롱소드를 휘둘렀다.
따따따땅―!
롱소드에 잘린 마력탄이 불꽃을 내며 허공으로 튀었다.
파비안도 스왈로우 플라잉[飛燕步]의 수법으로 도약하여 화살을 피한 뒤, 마차 지붕 위로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그의 신묘한 움직임에 얼 그레이 기사단장과 피데스 마텔로 자작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두 사람은 급히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숲에 은신한 총사와 석궁수 들에게 사격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그때 비스듬히 누워 있던 엘리오의 검결지가 총사와 석궁수 들이 은신한 숲을 가리켰다.
순간 천둔검이 숲으로 날아들고, 밤하늘에서 우렛소리가 들려왔다.
구천세법 육 식 천뢰무망(天雷無望)이다.
우르르릉―! 콰콰콰콰쾅―!
벼락은 나무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때렸다.
혼비백산한 총사와 석궁수 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엘리오가 총사와 석궁수를 정리하는 동안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얼 그레이 기사단장과 기사들을 제압해 무릎 꿇렸다.
피데스 마텔로 자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는 그저 백작님의 명령에 따른 것뿐입니다.”
그에 비하면 얼 그레이 기사단장은 확실히 침착했다.
“나는 론디니움 제국의 귀족입니다. 제국 귀족은 제국 법정에서 재판받을 권리가 있으며, 왕국 귀족은 제국 귀족을 체포하거나 신문할 수 없습니다. 이를 어길 시 제국법에…….”
“닥치고, 왜 우리를 죽이려고 했는지부터 말해 봐.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제국법 어쩌고 하면 혀를 뽑아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