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01
1201회. 너는 나를 아느냐?
녹색 섬 위의 하늘에 마치 환영처럼 떠 있는 거대한 성.
엘리오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전설의 천공성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천공성은 이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잘못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만큼 찰나지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녹색 섬이 마의 해역에 숨겨져 있던 것처럼 천공성도 ―비록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머리 위에 존재함을 확신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히페리온의 사자 간 싸움이 다시 치열해졌다.
그런데 히페리온의 사자 움직임이 조금 변했다.
히페리온의 사자는 이전처럼 대놓고 파비안을 무시하지 않았다.
사자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공격하면서 파비안을 경계했다.
덕분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한결 안정적으로 히페리온의 사자를 상대할 수 있었다.
‘대단한 놈이군.’
엘리오는 히페리온의 사자가 가진 능력에 탄복했다.
소드마스터와 ―비록 반쪽짜리지만― 소드 익스퍼트의 합공이면 마족도 물리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히페리온의 사자는 오히려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을 몰아붙이고 있다.
이대로라면 마나의 고갈로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이 쓰러질 게 분명하다.
소드마스터보다 월등하게 강한 생명체가 있다니!
‘하기야 그 정도 되니 수천 년 동안 천공성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겠지?’
문득 사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히르헤라에서 지겹게 상대한 마물보다는 왠지 신수(神獸)에 가까운 것 같았다.
엘리오가 다시 히페리온의 사자를 보았다.
역시나 마물의 상징과도 같은 어둠의 에테르는 느껴지지 않았다.
신수가 지키는 천공성에 흑마법사의 우두머리가 드나들다니?
조금 이상한 느낌이다.
그때 히페리온의 사자를 견제하던 파비안이 ‘윽!’ 소리와 함께 물러났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공격하던 히페리온의 사자가 돌연 그를 덮친 것이었다.
자꾸 귀찮게 구니 상대적으로 약한 파비안부터 정리하려는 모양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엘리오는 즉시 천둔검을 날렸다.
입을 쩍 벌리고 파비안의 머리를 물려던 히페리온의 사자가 뒤로 펄쩍 뛰었다.
파비안과 히페리온의 사자 사이를 천둔검이 쾌속하게 가르며 지나갔다.
히페리온의 사자가 거리를 두자 싸움은 자연히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해 볼까 했는데 무리군요. 라고아 경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격하게 숨을 몰아쉬던 파비안도 소리쳤다.
“헉! 헉! 더는 못 하겠습니다! 검을 쥘 힘도 없습니다!”
그제야 엘리오는 히페리온의 사자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크허헝―!
더 다가오지 말라는 듯 히페리온의 사자가 위협적인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나 엘리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히페리온의 사자에게 다가갔다.
그의 도발에 히페리온의 사자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그를 덮쳤다.
한순간 히페리온의 사자에 가려 엘리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퍽!’ 하는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히페리온의 사자가 뒤로 날아갔다.
사자의 주저앉은 콧잔등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단 일격에 공포를 느꼈는지 뒷다리 사이로 꼬리마저 감췄다.
뒷걸음질 쳐 거리를 확보한 히페리온의 사자가 입을 쩍 벌렸다.
화르륵―!
붉은 화염이 엘리오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엘리오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저돌적으로 화염의 중심부를 향해 달렸다.
파란 강기막 위로 화염이 넘실거렸다.
인간이 불길을 뚫고 다가오자 히페리온의 사자는 급히 달아났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엘리오가 사자의 갈기를 우악스럽게 움켜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이 개새끼가! 죽을라고!”
퍽! 퍽! 퍽!
뼈가 주저앉고, 찢어진 거죽 사이로 피가 튀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마나 블레이드도 막아 내던 피부가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엘리오의 전신이 히페리온의 사자가 쏟아 낸 피로 붉게 물들어 갔다.
그래도 엘리오의 주먹질은 계속됐다.
마치 이대로 히페리온의 사자를 때려죽일 기세였다.
언제부터인가 엘리오의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부지불식중에 꾹꾹 눌러 두었던 심마가 고개를 쳐든 것이다.
찌푸린 얼굴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중얼거렸다.
“설마 광포화 상태로 접어든 것인가?”
“광포화는 아닙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나?”
“광포화는 죽기 직전까지 몰려야 발동하는데, 라고아 백작님은 사자의 공격에 닿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어둠의 에테르도 느껴지지 않고요.”
“하지만 눈빛을 보게.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것 같지 않나?”
“광포화보다는 잠깐 폭주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폭주라……. 라고아 경이 스스로 이성을 되찾으면 그렇다고 인정하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히페리온의 사자가 축 늘어졌다.
인간의 손에 맞아 죽은 것이다.
그제야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엘리오가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을 향해 돌아섰다.
여전히 붉은 눈에 한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은 긴장한 얼굴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응시했다.
붉은 눈으로 두 사람을 보던 엘리오가 말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히페리온의 사자를 죽였음에도 천공성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순간 울컥한 엘리오가 텅 빈 하늘을 향해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카마 데비아스! 숨어 있지만 말고 나와! 나오란 말이다!”
강력한 외침에 땅이 진동하고 파도가 십여 미터 높이까지 치솟았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비틀거렸고, 파비안은 두 손으로 귀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순간 환영처럼 하늘에 천공성이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천공성은 약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이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울컥한 엘리오가 다시 욕설을 퍼부으려 할 때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서둘러 나섰다.
“라고아 경!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급한 그의 부름에 엘리오가 고개를 슬쩍 틀었다.
여전히 눈동자는 마족처럼 붉었지만 살기가 느껴지지 않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그를 향해 걸어갔다.
광포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파비안의 말처럼 폭주 상태도 아닌 것 같았다. 폭주 상태라면 자신의 말에 따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누군가 ‘조금 흥분한 것으로 마족처럼 변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엘리오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평소와 같은 반응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내심 안도했다.
분위기로만 보면 다짜고짜 살인적인 주먹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은데, 엘리오 라고아 백작은 짜증에 그쳤기 때문이다.
“아까 히페리온의 사자가 포효할 때, 그리고 방금 라고아 경이 소리 질렀을 때, 잠깐씩 천공성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강력한 소리가 비밀을 풀 열쇠인지도 모릅니다.”
“소리요?”
“소리를 천공성이 있는 허공 한 지점에 집중하면……. 천공성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말이지요.”
“아! 있습니다. 밀랍 남은 거 있으면 파비안의 귀를 좀 막아 주세요.”
“예.”
그가 파비안을 걱정하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얼굴이 비로소 부드럽게 풀렸다. 광포화나 폭주가 아니라는 확신이 든 때문이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남은 밀랍을 꺼내 파비안에게 건넸다.
그러는 동안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눈동자도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파비안은 밀랍으로 귀를 막았지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그러지 않았다.
소드마스터나 돼서 소드 비기너처럼 궁상맞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파비안이 귀를 막자 엘리오는 즉시 허공을 향해 사자후를 발출했다.
“이야아아아아―!”
천지가 진동했지만 홧김에 소리를 내지를 때와는 조금 달랐다.
쩌저적―!
뭔가 갈라져 나가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하늘에서 반투명한 껍질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잠시 후 마치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하늘에 거대한 성채가 나타났다.
누군가 성을 뿌리째 뽑아서 하늘에 고정해 놓은 듯한 형상이다.
이뿌리처럼 뾰족한 천공성 하부에 흙과 암석이 생생하게 매달려 있었다.
엘리오는 그걸 보고 마치 무 뿌리에 붙은 흙 같다고 생각했다.
사자후가 끝난 뒤에도 천공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입을 쩍 벌리고 위를 올려다보던 파비안이 중얼거렸다.
“조금 전의 소리로 마법진이 깨진 모양입니다?”
그렇다 해도 천공성은 무려 오십여 미터 위에 떠 있어서 사람이 오가기는 어려웠다.
엘리오는 천공성으로 올라가기 위해 다시 운종술을 펼쳤다.
잠시 후 엘리오 일행을 태운 구름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천공성.
하늘에서 내려다본 천공성은 태양신의 거처답게 아름다웠다.
엘리오는 천공성으로 내려가기 전에 먼저 구석구석 살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천공성 어디에도 어둠의 에테르는 느껴지지 않았다.
히페리온의 사자처럼 천공성의 기운은 맑고 담백했다.
마그눔 오프스가 히르헤라에서 벌인 행동과 달라도 너무 다른 분위기다.
고개를 갸웃하던 엘리오는 구름을 천천히 천공성 안뜰에 내려놓았다.
세이렌이나 히페리온의 사자가 지키던 것과 달리 천공성은 텅 빈 것 같았다.
세 사람이 내성으로 걸어갈 때, 누군가 내성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얼굴을 본 엘리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카마 데비아스(천자마).”
그 얼굴은 분명히 ‘왕들의 하늘’에서 자신이 죽인 천자마였다.
침입자들을 둘러보던 카마 데비아스의 눈이 청년에게서 멈췄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마치 나를 알아보는 것 같은 표정이군? 그런데 이상한 건 나도 너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거다. 너는 누구냐?”
“엘리오 라고아.”
“처음 듣는 이름이군. 너는 나를 아느냐?”
“알고말고. 자칭 태양신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개만도 못한 쓰레기! 너를 다시 죽이기 위해 무수히 많은 차원을 건너왔다!”
“워워! 흥분하지 말고 먼저 상황부터 정리하지. 나를 다시 죽인다는 말은 뭔가? 그리고 차원을 건너왔다는 것도 설명해 주기 바란다.”
상대가 정중하게 나오자 엘리오는 무턱대고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역시 카마 데비아스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엘리오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을 슬쩍 쳐다본 후에 답했다.
“좋아, 가르쳐 주지. 너는 시간과 공간을 주무르니 알아서 새겨들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너는 강해졌지만, 타락했대. 너를 타락하게 만든 것은 뒤틀린 너의 욕망이라나 봐. 마나 프트라스는 네가 이 세계를 혼돈으로 빠트리기 전에 너에게서 뒤틀린 욕망을 빼내, ‘왕들의 하늘’이라는 감옥으로 보냈어. 너의 더러운 욕망은 그곳에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할 운명이었지. 그런데 내가 그 족쇄를 풀어 준 모양이야. 무슨 말인고 하니, 내 손에 죽자 어쩐 일인지 너의 뒤틀린 욕망은 감옥이 아니라,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 버렸어. 감옥에서 너를 따라다니던 존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우샤스 운드라야. 물론 우샤스 운드라 역시 내 손에 죽었고, 너를 따라 본래의 세계로 가 버렸어. 믿거나 말거나지만 나한테 운명의 사슬을 끊는 힘이 있는 것 같아. 여하튼 그 뒤 나는 타락할 게 뻔한 너희를 완전히 끝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곳에 온 거야. 어때 이해가 가?”
카마 데비아스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타락할 것 같으니까 죽여 달라고 했다는 것이냐?”
“나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네가 흑마법사들을 조종한 마그눔 오프스냐?”
“그것도 이 세계의 창조신인 마나 프트라스가? 태양신인 나를?”
“대답해! 네놈이 마그눔 오프스냐고!”
카마 데비아스와 엘리오는 상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소리만 질러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