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78
1278회. 어비스는 대체 누가 만든 걸까요?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던 길이 내륙 방향으로 휘어졌다.
길을 따라 3시간 넘게 걸어도 해안선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완전히 내륙으로 접어든 것이다.
어비스의 내륙은 대수림이 아니라 중부 지대를 닮아 있었다.
숲속에서도 하늘이 훤히 보였다.
개척 지역이라 그런지 쉬어 갈 만한 곳마다 야영을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돌로 화덕을 만든 흔적과 검게 탄 숯 조각은 양호한 편이다.
야영지로 사용한 곳 주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변이 그득했다.
그걸 본 엘리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이, 메르 씨, 여기 왜 이렇게 더러워?”
“모험가와 용병 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라 그렇습니다.”
“여기 뭐가 있다고 자주 다녀?”
“개척 지역을 크게 한 바퀴 도는 거니까요. 어비스에 처음 들어온 모험가와 용병 들은 기본적으로 거쳐 갑니다. 이렇게 한 바퀴 돌면서 자기들이 할 일을 정하곤 합니다.”
“개나 소나 한 번쯤은 거쳐 간다는 소리네?”
“맞습니다.”
“아니, 그럼 야영지에 화장실 같은 건 좀 만들어 놔도 되잖아.”
“다시 올 일 없으니까 뒷일은 신경 안 쓰는 거죠.”
“이런 젠장. 그놈의 인간성들 하고는.”
엘리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계나 상계나 사람들 심보는 왜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다.
“에이, 퇘! 퇘! 내가 여길 다시 오면 사람이 아니다.”
투덜대는 엘리오에게 루나 마일러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다시 올 일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설마요. 우샤스 운드라도 더러워서 이런 곳에는 있지 않을 거예요.”
“그렇기는 하네.”
엘리오의 말에 일행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눈에도 야영지는 다시 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더러웠기 때문이다.
오후 5시쯤 되자 파비안이 선두의 메르데프에게 소리쳤다.
“메르데프! 오늘 저녁은 좀 깨끗한 곳에서 먹자! 조금 이르다 싶어도 괜찮은 장소가 보이면 멈추라 이 말이다.”
“예!”
메르데프는 큰 소리로 답했다.
어제 야영지에서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은 정체불명의 똥을 밟았다.
그 뒤로 입만 열면 ‘깨끗한 곳’ 타령을 했다.
클라우드 남작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개척 지대 야영지 중에 그런 곳은 없다.
그래도 충격이 가실 때까지 최대한 깔끔한 야영지를 찾을 생각이다.
메르데프가 눈에 힘을 주고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다.
갑자기 타인록이 손을 들어 올렸다.
전방에 뭔가 나타는 뜻이다.
메르데프는 타인록의 경지가 자신보다 한참 위이기에 숨을 죽이고 속도를 늦췄다.
자연스럽게 타인록이 앞장서 걸어갔다.
숲길을 꺾자 갑자기 탁 트인 벌판이 나타났다.
열흘쯤 전 파르톤 산을 내려가자마자 사막이 펼쳐진 것처럼,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벌판에는 그 흔한 둔덕조차 보이지 않았다.
낯선 풍광에 타인록이 움찔할 때 뒤따라온 메르데프가 말했다.
“에브리마 평원입니다. 개척 지역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지요. 우리가 벌써 이만큼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노천 금광이 있다는 그곳인가?”
“예, 여기부터는 모험가와 용병을 자주 만나게 될 겁니다. 초보자들에게 가장 만만한 곳이니까요.”
“금을 발견한 사람도 있나?”
“천 명 중에 한 명 꼴로 금이나 은 따위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잠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른 일행이 숲을 벗어났다.
모두가 지평선이 보이는 평원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대부분이 아카데미 출신이지만 실제로 보니 기가 막힌 모양이다.
문득 파비안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마차다!”
1킬로미터쯤 앞쪽에 세 대의 짐마차와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벌판을 보던 엘리오가 메르데프에게 물었다.
“메르 씨, 여기도 길이 있어?”
“길은 없습니다. 별자리를 보며 가는 겁니다.”
“언제까지?”
“가다 보면 평원 끝에 페트라 산이 보일 겁니다.”
“채굴 광산이 있다는 곳?”
“예. 그곳에서 엑소도까지 하루면 갑니다.”
“페트라 산을 넘는 거야?”
“아니요. 산을 넘어가면 미개척 지역입니다. 산 아래 길을 빙 둘러가다 보면 엑소도가 나옵니다.”
“페트라 산이 미개척지와 붙어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거 위험하지 않아?”
미개척지에서 어떤 마수와 마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하는 말이다.
“위험하지만, 채굴만큼 돈벌이가 확실한 것도 없으니까요. 왕국에서 직접 관리하는 곳이라 일반 모험가와 용병은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금지 구역이라는 거네?”
“페트라 산의 출입은 막지 않습니다. 넓어서 막을 수도 없지만요. 왕국에서 개발 중인 광산의 입구만 통제하고 있습니다.”
“다른 광산을 개발할 수도 있어?”
“물론 개발은 자유입니다만……. 광산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을 모험가와 용병이 감당할 수가 없어서……. 사실상 왕국에서만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험가와 용병은 포기했다?”
“아닙니다. 요즘 고대 유물의 소문이 돌아서 채굴하겠다고 깨작거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왕국처럼 제대로 된 개발이 아니라서 흉내만 내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고대 유물?”
“남부 왕국과 제국의 전쟁도 그 고대 유물을 독차지하기 위한 거라고 합니다.”
“아…….”
엘리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도 시대의 강철 골렘을 고대 유물이라고 칭하는 모양이다.
강철 골렘이 전장에 투입됐는데 아직 모르는 걸 보면 진짜 잘 숨겼나 보다.
가만히 듣던 파비안이 떠보듯 물었다.
“고대 유물이 뭔지 아나?”
“골렘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남부 왕국에서 어찌나 꼭꼭 숨기는지.”
“골렘이라는 소문은 어떻게 난 건가?”
“피난민들이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전선에서 이상한 괴물을 봤다고. 그 괴물 이야기를 들은 마공학자가 ‘골렘 같다’는 말을 했답니다.”
“그럼 골렘이 맞겠네.”
“그 옛날에 골렘이 있었습니까?”
“왜 없을 거라 생각하나?”
“마탑의 쟁쟁한 마공학자들도 아직 골렘을 못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옛날 사람들이 무슨 수로…….”
“옛날 마공학자들이 지금보다 못하다는 증거 있나?”
“그거야 당연히 기술적으로 보나 학문적으로 보나……. 요즘이 낫지 않습니까?”
“나는 검사니까 물으나 마나야. 숙영지나 잘 찾아보라고. 저 사람들하고 거리를 둬야겠지?”
말과 함께 파비안이 출발하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메르데프는 떨떠름한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한 후 다시 타인록과 걸어갔다.
세 대의 마차를 삼각형 모양으로 세워 놓고 그 안쪽에서 쉬던 고스람 용병단원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엘리오 일행을 살폈다.
아홉 명이면 어비스를 다니기에 위험한 숫자인데, 필수라고 할 만한 짐마차도 없다.
마물에게 습격당해 잃었다고 하기에는 행색이 너무도 편안해 보인다.
어쩌면 저들 중에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고위 마법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용병들은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녀를 둘이나 봤음에도― 애써 못 본 척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무리에도 욕정에 눈이 멀거나, 자의식 과잉인 남자들이 존재한다.
속닥거리던 사내 셋이 벌떡 일어나 마차 밖으로 빠져나갔다.
곧이어 그들은 후미에 있던 남녀 한 쌍의 앞을 자연스럽게 막아섰다.
“잠깐, 나는 고스람 용병단의 토미요. 보아하니 우리 뒤를 따라온 것 같은데, 뭐 하는 사람들이오?”
앞서가던 메르데프와 타인록을 시작으로 그 뒤를 따라가던 파비안, 하워드 솔론 남작, 크레아까지 가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와는 반대로 성기사와 함께 일행의 끝에 있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걸음을 빨리했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대신해 용병과 대화를 할 생각으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엘리오의 대응이 빨랐다.
“그 전에 한 가지 지적하지. 먼저 우리는 당신들 뒤를 따라오지 않았어. 그리고 당신 질문에 답하자면, 우리는 모험가야. 됐나?”
“말이 짧군. 너희가 우리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나?”
“증거? 많지. 오마르 경, 이 사람이 우리 능력을 보여 달라는데요? 저기 보이는 마차 세 대를 부수면 알아먹을지도 모르겠네요.”
엘리오가 손끝으로 벌판 한쪽에 모여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자비로우신 결정이십니다.”
말을 마친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질풍처럼 달려가 롱소드를 휘둘렀다.
마나 블레이드를 덧씌운 롱소드에 마차 세 대가 풀썩 주저앉았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온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마치 불기둥처럼 타오르는― 마나 블레이드를 거둔 뒤 납검했다.
눈앞에서 마나 블레이드를 본 세 남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엘리오가 말했다.
“이 정도면 우리가 당신들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는 걸 믿을 수 있겠지? 왜 대답이 없어? 아직 부족하다는 거야?”
엘리오가 검결지를 까딱였다.
순간 사내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롱소드가 스르륵 빠져나와 마차를 향해 날아갔다.
콰앙―!
폭발음과 함께 주저앉아 있던 마차 한 대가 산산조각이 났다.
“더 보여 줘야 믿겠어?”
엘리오의 말에 얼 띤 표정으로 서 있던 토미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제가 착각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쇼!”
어느 틈에 돌아온 롱소드가 다시 토미의 검집으로 들어갔다.
토미와 사내들을 물끄러미 보던 엘리오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가 봐.”
토미와 용병들이 허겁지겁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주저앉은 마차들 안쪽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용병들에게 엘리오가 소리쳤다.
“고스람 용병단 여러분! 토미 씨가 시키는 대로 한 거니까 할 말이 있으면 토미 씨에게 하세요!”
그걸 본 루나 마일러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짓궂기는.”
“헤헤,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죠.”
대충 상황이 정리된 듯하자 메르데프와 타인록은 다시 움직였다.
평원은 숲이나 산속과 달리 아무 곳에서나 야영이 가능하다.
메르데프는 고스람 용병단의 마차가 보이지 않을 만큼 이동한 후에 멈춰 섰다.
엘리오는 마하담(공간창고)에서 천막과 침상 따위를 꺼냈다.
메르데프와 타인록, 하워드 솔론 남작이 달라붙어 천막을 치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루나 마일러스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지평선을 바라보던 엘리오가 문득 말했다.
“누님, 어비스는 좀 미친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노을이 지는 방향이 제각각이잖아요. 여긴 동서남북도 없는 거 같아요.”
“용케도 그런 걸 눈여겨봤네?”
“진짜 동서남북이 없어요?”
“말했잖아. 어비스는 카오스의 공간이라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하늘고래’와 ‘부유 해파리’ 기억 안 나?”
“그 깊은 땅 밑에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어비스는 대체 누가 만든 걸까요? 아무리 봐도 마나 프트라스가 만든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아니라고 생각해?”
“마나와 영기의 사용에 제약을 받으니까요. 마나 프트라스가 만든 세상이면 그럴 리 없잖아요.”
“똑똑하네.”
“누님에 비해 멍청한 거지 나도 알고 보면 괜찮은 머리라고요.”
“인정할게.”
“그래서 누가 만들었어요?”
“나도 아직 거기까지는 모르겠어. 누군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누군데요?”
“그건 조금 더 확신이 서면 가르쳐 줄게. 너도 알아 두는 게 좋을 테니까.”
루나 마일러스는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추측이 틀렸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