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80
1280회. 왔다 간 흔적
하늘고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엘리오 일행은 다시 움직였다.
메르데프는 괜한 시비를 피하기 위해 부상당한 용병들을 크게 우회해서 돌아갔다.
얼마나 많은 물이 쏟아졌던지 용병들 주위로 온통 물웅덩이였다.
엘리오는 호기심에 그중 하나를 가로질렀다.
발바닥에서 찰박거리던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자 그는 어린아이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와아! 깊다! 누님! 물이 엄청 깊어요! 그런데 이거 바닷물인가?”
그러자 엘리오 못지않게 호기심 왕성한 파비안이 손바닥으로 물을 떠 핥았다.
“에 퇘! 짭니다! 바닷물이에요!”
엘리오와 파비안의 돌발 행동에 메르데프는 용병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그들은 피해를 수습하느라 다른 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메르데프는 걸음을 빨리했다.
용병들에게 찍히면 나중에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용병들과 충분히 거리를 벌린 뒤에야 메르데프는 평소의 속도로 돌아갔다.
주변을 둘러보던 타인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주변에 마차가 많이 보이는군. 에브리마 평원은 다른 곳에 비해 안전한가?”
그걸 질문으로 받아들인 메르데프가 답했다.
“야수가 많지만 모험가들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평원에 용병과 모험가가 많아서 어쩌다 마물이 출현해도 다 처리됩니다. 에브리마 평원에서만큼은 사람이 더 위험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돕니다.”
“그렇겠군. 마차 하나를 봤는데 혼자 다니는 사람도 있나?”
“예. 소규모로 다녀도 되는 곳이 에브리마 평원과 파르톤 산입니다. 파르톤 산이 마물 퇴치가 완료돼서 그렇다면, 에브리마 평원은 사람이 많아서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거든요.”
“마물은?”
“가끔씩 페트라 산을 타고 온 마물들이 평원까지 진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사람들이 많아서 잘 걸러집니다. 그걸 믿고 혼자 돌아다니는 거죠.”
“강도를 만나면 어쩌려고?”
“자기 몸 하나 지킬 정도의 자신은 있으니까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능력자라 이건가?”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어비스에서 동료를 잃었거나, 파티에서 쫓겨난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
돌연 메르데프가 빠르게 한곳으로 가더니 허리를 숙였다.
“금이다!”
허공을 향해 치켜든 그의 손에서 어린아이 주먹만 한 금덩이가 반짝였다.
그는 금덩이를 들고 엘리오에게 달려갔다.
“백작님! 금입니다. 이곳에 금이 있습니다!”
메르데프의 손에 들린 금덩이를 보던 엘리오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금덩이를 그렇게 줍는다고?”
“에브리마 평원이 노천 금광으로 유명합니다. 이 부근에 금이 더 있을 겁니다. 저도 멀리서 뭐가 반짝이길래 혹시나 하고 가 봤더니, 금이지 뭡니까! 이런 금덩이가 땅 위에 그냥 굴러다닌다는 게 믿어지십니까?”
얼마나 흥분했는지 메르데프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높아졌다.
“축하해. 그럼 잠시 쉬었다가 갈까? 금 때문이 아니라 성녀님 피곤할까 봐 그러는 거야. 성녀님, 여기가 명당 같은데 잠깐 쉬었다가 가시죠?”
“그래.”
속이 뻔히 보였지만 루나 마일러스는 반대하지 않았다.
우샤스 운드라(금사)를 찾는 건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깐 쉬었다가 가자고 하더니 엘리오는 마하담에서 천막 하나를 꺼냈다.
야영지도 아닌데 대낮에 천막을 꺼내자 파비안이 물었다.
“이곳에서 야영을 하시게요?”
“천막을 쳐 둬야 주인이 있는지 알 거 아냐.”
“주인요?”
“자리 주인 몰라? 노천 금광이라잖아. 자리를 맡아 놔야지.”
“잠깐 쉬었다가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잠깐을 쉬더라도 편안하게 쉬자는 거지. 뭘 꼬치꼬치 캐물어?”
“아니, 대낮에 갑자기 천막을 꺼내시니까 놀라서 그러지요.”
“그래서, 너는 금 안 찾아볼 거야?”
“찾아야죠.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천막은 성녀님을 위해 준비하는 거야. 성녀님이 구차하게 금을 찾으러 다닐 수는 없잖아. 다들 들었죠? 잠시 쉬었다가 갈 테니 각자 알아서 할 일들 하세요.”
금 앞에서 다 같이 한마음 한뜻인지 누구도 언제까지 쉴 거냐고 묻지 않았다.
메르데프와 하워드 솔론 남작, 타인록이 천막을 치는 동안 파비안과 크레아는 메르데프가 금을 발견한 곳으로 향했다.
성녀와 성기사를 제외한 모두가 금을 찾아다녔다.
그중에 가장 열심인 사람은 엘리오다.
사실 그는 메르데프가 금 줍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마치 장터에서 땅에 떨어진 동전을 줍듯 금덩이를 줍다니!
강호는 물론 구주에서도 그런 일은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이세계에서는 그게 가능한 모양이다.
견물생심이라고, 눈앞에서 메르데프가 금덩이 줍는 걸 보니 다른 건 생각나지도 않았다.
만약 금광에서 곡괭이질을 해야 한다거나, 사금처럼 모래를 걸러 내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땅에 떨어진 걸 줍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어딨냐? 나와라.’
엘리오는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그런데 주변을 몇 바퀴 돌아도 금덩이는커녕 금 부스러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 바퀴만 더 돌아보자고 다짐할 때 크레아의 찢어지는 듯한 외침이 또 들려왔다.
“금이다아―!”
힐끗 돌아보니 자신이 몇 번이나 지나친 곳에서 크레아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들려 있는 건 무려 밤톨만 한 금덩이였다.
‘아니, 왜 내 눈에는 안 보였지?’
엘리오는 툴툴거리며 다시 지면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몇 시간을 빙빙 돌아다녔지만 금은 눈에 띄지 않았다.
‘재물과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생각하며 터덜터덜 걷는데 뒤에서 누가 불렀다.
“라고아 백작님.”
무심히 돌아보니 하워드 솔론 남작이다.
“모험가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아, 예……. 모험가님.”
“왜?”
“저어, 드릴 말씀이 있어서…….”
“뭔데?”
“저도 모험가님에게 마법과 검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엘리오는 대답에 앞서 하워드 솔론 남작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자 하워드 솔론 남작은 서둘러 말을 이어 갔다.
“무, 물론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모험가님에게 빚도 있고, 뭘 가르쳐 달라고 할 주제가 못 됩니다만…….”
“알았어.”
“예?”
“귀 막혔어? 가르쳐 준다고. 거 뭐 어려운 일이라고.”
어차피 대단한 것도 아니고, 이미 몇 사람에게 가르친 바도 있다.
거기에 하워드 솔론 남작 하나 더 늘어난다고 큰일이 날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하워드 솔론 남작의 인간성이 괜찮았다.
다만 검술은 가르쳐 줄 수 있지만 마법은 좀 그렇다.
자신도 마법을 모르는데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워드 솔론 남작은 감동한 얼굴로 연거퍼 머리를 조아렸다.
무려 그랜드 마스터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마법은 어려울 것 같아.”
“예?”
마검사인 하워드 솔론 남작이 의아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내가 익힌 건 마법이 아니라…… 야인 부족의 주술 같은 거거든.”
“아! 그렇습니까?”
“가르쳐 줘도 배우지 못할 거야. 마나가 아니라 영적인 힘을 사용하는 거라서.”
“그렇군요. 검술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말로만?”
“…….”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끔뻑거리던 하워드 솔론 남작은 급히 품에서 밤톨만 한 금덩이를 꺼내 들었다.
“저어, 부족하지만 이거라도…….”
“그거 크레아 씨 거 같은데?”
“제게 줬습니다.”
“뭐야!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제, 제가 재정을 담당하고 있어서…… 저에게 넘긴 겁니다.”
“정확하게 말해. 괜히 나까지 도둑놈 만들지 말고. 크레아 씨가 준 거야? 맡긴 거야?”
“줬습니다.”
“그렇고 그런 사이 맞지?”
“……그런 거 같습니다.”
하워드 솔론 남작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답하자 엘리오가 혀를 찼다.
“쯧쯧! 그런 거 같은 건 또 뭐야? 하워드!”
“예?”
“도로 집어넣어. 그리고 확신이 서기 전까지 크레아 씨의 물건을 마음대로 처분할 생각 하지 마. 알겠어?”
“예…….”
하워드 솔론 남작은 꺼냈던 금덩이를 다시 갈무리했다.
“그리고 누가 너한테 돈을 달라고 했냐? 대충 말로 끝낼 생각 말고, 마음과 정성을 다하라는 뜻이다. 알겠냐?”
“예!”
“내가 돈을 밝히는 속물 같아?”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 다짜고짜 금덩이를 들이밀어?”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됐고, 내기 빚은 꼭 갚아라. 검술은 공짜로 가르쳐 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예, 갚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워드 솔론 남작이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금덩이는 사양하면서 내기 빚은 꼭 갚으라니 진심을 모르겠다.
엘리오는 그자리에서 하워드 솔론 남작에게 ‘작은 하늘 회로(small heavenly circuit, 小周天)’를 가르쳤다.
“들어도 모르겠지?”
“……예.”
“파비안에게 물어봐. 경험자니까 요령을 가르쳐 줄 거야. 작은 하늘 회로에 성공하면 다시 찾아와. 가 봐.”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워드 솔론 남작은 꾸벅 인사를 한 뒤 다른 곳으로 떠났다.
흥이 깨진 엘리오는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맥 빠진 얼굴로 돌아온 엘리오를 본 루나 마일러스가 웃으며 말했다.
“하나도 못 찾은 얼굴이네?”
“금과 인연이 없나 봐요.”
“그럴 수도 있지. 솔론 남작과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한 거야?”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하더라고요.”
“아. 어쩐지 요 며칠 계속 네 주변을 맴도는 것 같더라니. 가르치기로 한 거야?”
“네. 파비안과 오마르 경을 보니까 마나와도 잘 맞아요.”
“그랬구나. 이세계에 ‘엘리오 라고아식 검술’이 추가되겠네.”
“헤헤, 본의 아니게 왔다 간 흔적을 남기네요.”
“왔다 간 흔적이라…… 그거 마음에 든다. 나도 ‘루나 마일러스식 검술’을 남겨 볼까?”
“그거 좋네요. 사람들에게 우리가 사실은 부부라는 것도 알려 주자고요. 그럼 우리 유파의 기사들을 통해 대대손손 전해질 거예요.”
엘리오는 그런 식으로라도 루나 마일러스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
루나 마일러스의 눈이 빛났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듣고 보니 괜찮았다.
마침 가까이에 재능 있는 여검사도 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크레아를 끝으로 더 이상 금을 발견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땅거미가 뉘엿뉘엿 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 천막으로 돌아왔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엘리오는 마하담(공간 창고)에서 천막과 침구류, 탁자 등을 꺼냈다.
여느 때처럼 메르데프, 하워드 솔론 남작, 타인록이 개미처럼 달라붙어 천막을 세웠다.
이윽고 사위가 어두워지자 캄캄한 에브리마 평원 곳곳에 불빛이 피어났다.
모험가들과 용병들이 피운 모닥불의 불빛이다.
엘리오와 나란히 서서 불빛을 응시하던 루나 마일러스가 중얼거렸다.
“어비스의 별은 땅에서 떠 하늘로 오르는지도 모르겠다.”
듣고 있던 엘리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사람들이 우라지게 많기는 하네요.”
그들의 뒤에 병풍처럼 서 있던 성기사 알메트 하레브가 인상을 찌푸렸다.
성녀님의 보석같은 말씀에 라고아 백작이 초를 치니 그런 것이다.
‘끄응! 저렇게 격이 안 맞는데 뭐가 마음에 들어서 함께 다니시는 건지…….’
성녀님과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조합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신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