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24
324회. 사조(師祖)는 무슨
독심귀랑 양소란의 단호한 어조에 천지맹 총사 신기수사 제갈승운은 한순간 숨을 멈췄다.
엄포가 아니라 진심이 느껴졌다.
유명교에서 왜 ‘백 년’이라는 기간을 정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천하에 이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 알리려는 것이다.
그래서 백 년이든, 십 년이든, 삼 년이든 금제가 필요한 것이었다.
‘하아! 삼 년은 피할 수 없겠군.’
그나마 백 년이나 십 년이 아닌 게 어디란 말인가!
맹주와 칠파일문 장문인들에게는 어떻게든 기간을 줄여 보겠다고 말해 두었다.
달리 생각하면 삼 년은 성공적인 결과물이다.
칠파일문과 사대세가가 문파를 추스르려면 그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따져 봐도 최소한 삼 년은 유명교와의 싸움을 피해야 한다.
어차피 판을 깔아 줘도 싸우지 못할 상황이니 금제를 걸어도 상관없으리라.
땅에 떨어진 체면이 문제인데, 이미 세상 사람들은 승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
눈 가리고 아웅 할 바에야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제갈승운은 대답에 앞서 공손일랑 공손기, 벽력도 팽만호, 벽검문 문주 소상검 한백상, 승천문 문주 일검진천 마곤과 눈을 맞추었다.
공손기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제갈승운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협상 자리에서 만족한 표정을 보이다니?
권모술수와 거리가 먼 저런 단순함은 법가(法家) 출신의 한계다.
강호에서 닳고 닳은 팽만호는 마지 못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아직 상황 파악조차 못 한 한백상과 마곤은 바쁘게 눈알만 굴려 댔다.
제갈승운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기와 팽만호의 의사만 확인하면 되는데 둘이 승낙했으니 끝난 셈이다.
“알겠습니다. 종전 후 삼 년간 칠파일문과 사대세가가 유명교를 적대시하지 않는 것으로 하지요.”
그러자 양소란이 한마디 덧붙였다.
“천지맹의 해체도 빠트리면 안 되지요.”
“천지맹을 해체하고, 이후로 삼 년간 칠파일문과 사대세가는 유명교를 적대시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정도면 납득할 수 있어요.”
이번에는 듣고 있던 팽만호가 끼어들었다.
“우리야 그렇게 약조한다 칩시다. 그렇다 해도 유명교가 칠파일문과 사대세가를 칠 수도 있지 않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할 거요?”
“후후, 다시 상기시켜 드려야 하나요? 본교에서는 단 한 번도 먼저 칼을 든 적이 없어요.”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억만 가지고 있구려. 녹림만 해도 유명교에서 먼저 건드려 천지맹에 참전하지 않았소? 유명교 고수들이 강호 일에 관여하여 칠파일문과 사대세가를 적대시할 수도 있거늘.”
팽만호의 날카로운 지적에 협상단의 시선이 양소란에게 집중됐다.
유명교 고수가 강호의 분쟁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서로 다른 진영에서 싸울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본교는 교당 차원에서 강호 방파의 이권분쟁에 관여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개개인의 일탈이야 막을 수 없겠지요. 그건 칠파일문과 사대세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팽만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한마디로 개인의 싸움은 어찌할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구려. 천하에 흩어진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도 없는 노릇. 유명교 교당이 나서지 않는다면 칠파일문과 사대세가도 관여하지 않을 것이오.”
“그거야말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칠파일문과 사대세가가 방파의 세력을 동원하지 않는 한, 유명교 교당도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세부적인 내용까지 나오자 제갈승운이 말했다.
“허면 협정서에도 그와 같은 문구를 넣도록 하지요. 개인의 싸움에 방파를 동원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우리는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자세로 살아왔어요. 다수의 힘으로 본교를 억압한 것은 언제나 칠파일문과 사대세가였지요.”
양소란은 손해 볼 일이 없는지라 태평스러웠다.
칠파일문과 사대세가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십두마병부터다.
십두마병들은 방파의 힘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렵다.
그들을 죽이기도 어렵지만, 죽여도 뒷감당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허면 불초가 지금까지의 논의를 기반으로 협정서의 초안을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더 추가할 내용이 있으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제갈승운이 무덤덤한 얼굴로 양소란을 보았다.
그녀가 십두마병을 믿고 대담하게 나오는 건 알고 있었다.
‘흥! 착각이 심하군. 십두마병에 대해 모를 때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 같으냐?’
칠파일문과 사대세가에서 술법과 법보를 활용하면 굳이 방파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
‘검진이나 진법진 하나만 제대로 만들어도 상대할 수 있거늘.’
유명교 교당의 전력이 아니라면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없어요. 글이 많아 봐야 오히려 지키기만 어려워져요. 지금까지 나온 세 가지 내용만 제대로 지켜진다면 본교와 정파연합이 다툴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갈승운은 탁자에 종이를 펼치고 일필휘지로 글을 적어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내용의 문서 두 개가 만들어졌다.
제갈승운은 그중 하나를 양소란에게 내밀었다.
“내용에 어긋남이 있는지 확인해 보시지요.”
양소란은 협정서 초안을 꼼꼼히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봤어요. 더도 덜도 없이 지금까지 우리가 합의한 이야기들이네요.”
“허면 이제 정식 협상에 대해 논의를 하도록 하지요. 얼마간의 시간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닷새 후에 백마사에서 만나는 것으로 하지요.”
백마사라는 말에 공손기가 눈을 찌푸렸다.
상대방에게 자신들의 진영으로 오라는 것은 꽤나 무례한 요구였다.
공손기가 법도를 따지기 전에 제갈승운이 나섰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장소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전쟁을 끝낸다는 게 중요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양소란이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세요. 현명한 결정을 내리셨어요. 장소를 두고 몇 날 며칠 동안 말씨름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네요. 전쟁을 끝내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지요. 그럼 닷새 후에 백마사에서 뵙지요.”
말과 함께 양소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천지맹 협상단이 미처 응대하기도 전에 풍월루를 떠났다.
뒤늦게 공손기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총사. 우리가 백마사로 가는 건 바람직한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천하인들이 비웃겠지요.”
“헌데 왜 그러셨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전쟁을 끝내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요녀의 말대로 몇 날 며칠 동안 시간을 끌어 봐야 우리만 손해입니다.”
“그래도…….”
“어차피 협정문의 내용이 천하에 알려질 겁니다. 이미 땅에 떨어진 체면인데 손가락질 좀 받으면 어떻습니까? 천지맹의 재정이 바닥난 지 오랩니다. 시간을 끌수록 칠파일문과 사대세가의 부담만 늘어날 뿐입니다. 정파 연합을 빚 위에서 시작하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재정 문제가 심각합니까?”
“수입은 없는데 지출이 계속되니 그럴 수밖에요. 최대한 빨리 천지맹을 해체해야 합니다. 상방들에 지급해야 할 돈이 벌써 삼만 냥이나 밀렸습니다.”
“…….”
공손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빚이 삼만 냥이나 쌓였다면, 그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
칠파일문과 사대세가는 협상단이 가져온 협정문 초안에 동의했다.
그리고 다음 날, 천지맹 고수들은 칠리하촌을 떠났다.
칠리하촌에서 백마사까지 사나흘 거리라 일찌감치 출발한 것이다.
무림은 물론 관부와 황실까지도 천지맹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그와 더불어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강호의 전쟁이 끝났다.”
“천지맹이 막판에 유명교를 칠 것이다.”
“유명교가 천지맹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백마사로 끌어들였다.”
“정파와 녹림이 원수가 됐다.”
“연적하가 총사를 건드려 정파와 녹림이 갈라섰다.”
“전쟁이 끝난 것은 정사파의 분열 탓이다.”
터덜터덜 관도를 걷던 연적하가 구천노도 심통을 힐끔 쳐다보았다.
심통은 월아와 금아 사이에서 희희낙락한 얼굴이었다.
“흐흐, 공자님. 뭘 그렇게 보십니까? 부러우면 공자님도 제자를 들이시든가요.”
“심 노인, 솔직히 말해. 제자야 시녀야?”
“제자라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믿어져야 말이지.”
연적하가 사나운 눈으로 심통을 쏘아보았다.
월아와 금아는 초연(招延) 기루에서 일하던 십 대의 예기(藝妓)들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제자라며 데리고 다니니 기가 막힐밖에.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어 거두어들였다나?
모두 시산마도 혁무춘의 죽음과 귀영자군의 팔이 잘린 탓에 생긴 일이었다.
그 둘을 따르던 녹림도들이 차중래를 압박하는 바람에 기루에서 쫓겨난 것이다.
일자리를 잃은 월아와 금아는 심통을 찾아갔고, 마침내 사제의 연으로 이어졌다.
“기루에서 불러 주지 않는다는데 어쩝니까? 먹고살게는 해 줘야지요.”
“흥! 헛소리.”
“저도 갑자기 짐이 생겨서 아주 골치가 아픕니다.”
“짐이면 슬쩍 내려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이가 왜 짐을 짊어지고 다녀?”
“저 애들을 보니 작고하신 스승님 생각이 나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스승이 도적이었다면서. 왜 명문 정파 흉내를 내고 그래?”
“아이고, 제가 속을 썩인 게 생각났다는 뜻으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주루 주인이 되겠다면서 무슨 제자야?”
“저 애들과 돈을 모아서 차리려고요. 저 혼자 모으는 것보다 빠를 겁니다.”
“와아!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저 어린 애들을 부려먹으려고 받아들인 거였어!”
“어이구! 아닙니다. 그럼 제가 천벌을 받지요. 일석이조라고 생각해 주십쇼. 제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주루는 어차피 저 애들의 것이 될 텐데요 뭐.”
“어느 세월에? 아마 그 전에 다 시집가게 될걸?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지. 심 노인이 돈을 그냥 퍼 줄 사람도 아니고. 하여튼 무서운 늙은이야.”
연적하의 말에 월아와 금아가 발끈해서 한마디 했다.
“우리 스승님은 그런 분이 아니거든요!”
“맞아요! 그리고 우린 시집 안 가요!”
두 소녀의 말에 연적하가 냉소를 쳤다.
“흥! 지금이야 그런 말을 하겠지. 심 노인에게 무공 배워서 유명해져 봐. 돈 많고 잘생긴 남자들이 줄을 설 텐데. 퍽도 시집을 안 가겠다.”
“그, 그래도 안 가요!”
“왜 그렇게 못된 말만 하세요!”
월아와 금아가 연적하에게 말대꾸하는 것을 보고도 심통은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얼굴로 만면에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와아, 역시 그 스승에 그 제자네. 바락바락 대드는 것 좀 봐.”
월아가 샐쭉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제자가 스승 닮는 게 당연하죠.”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키우던 개에게 물린 기분일세.”
말싸움에서 진 연적하는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심통이 나섰다.
“월아야, 금아야,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자님을 욕해도, 너희는 그러면 안 된다.”
“어디서 헛소리야! 누가 나를 욕한다고.”
연적하의 지적에 심통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흐흐, 도리가 그렇다는 겁니다. 제가 공자님에게 무공을 배웠으니, 공자님은 이 아이들의 사조(師祖)가 아닙니까? 그러니 무조건 공경해야지요.”
‘사조’라는 말에 월아와 금아가 흠칫 놀란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연적하를 성질머리 고약한 윗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스승의 스승이란다!
예기 출신답게 월아와 금아는 금방 표정을 바꾸었다.
“사조님! 미처 알지 못해 함부로 말했어요.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성심성의껏 모실게요!”
귀엽고 재기 발랄한 소녀들이 떠받들자 연적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조는 무슨. 오라버니라는 좋은 말을 두고.”
하지만 그건 심통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자님, 오라버니는 아닌 것 같습니다. 차라리 공자님이라 부르는 게 낫겠습니다.”
심통의 지적에 눈치 빠른 월아와 금아가 재빨리 허리를 조아렸다.
“공자님! 잘 모실게요!”
“예쁘게 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