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82
482회. 은자 세 냥
습관은 무섭다.
무림세가인 당가는 사천성은 물론 천하에서 군소 방파의 눈치를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시비가 일어나면 그들은 항상 선제적으로 행동했다.
독과 암기의 특성상 선공(先攻)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당가에서 은밀하게 손을 쓰는 것은 비겁한 짓이 아니라 능력이었다.
그래서 내각 장로 당기로는 삼보절명 당운망이 호법당 당주 귀혼산수 당자안과 옥신각신할 때, 움직였다.
당가의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선수필승(先手必勝)은 진리니까.
그는 마치 거문고를 연주하듯 손가락을 튕겼다.
고슬취생(鼓瑟取生).
거문고를 타는 것처럼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인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하지만 당가 외에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다.
옷깃으로 손을 감추기도 하지만, ‘고슬취생’의 대상은 모두 죽었으니까.
당기로의 손에서 흘러나온 독기가 그물처럼 퍼져 당운망을 조여 갔다.
그때다.
번쩍하고 눈부신 뇌전(雷電)이 당기로와 당운망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창궁무애검법의 ‘소소천뢰(昭昭天雷)’다.
파파파팟-.
뇌기가 독기를 불사르면서 허공에 독연(毒煙)의 흔적이 길게 남았다.
화들짝 놀란 당운망이 급히 거리를 벌리며 소리쳤다.
“암습이냐!”
‘의형검기’로 만들어진 뇌전을 코 앞에서 목격한 당자안은 굳어 버렸다.
뒤늦게 석경장이 용담호혈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온 것이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석경장은 유명교 팔황을 물리칠 정도로 강하다.
그런 곳에서 주인 허락도 없이 독을 쓰다니?
“당 장로! 멈추시오!”
그의 외침에 당기로는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움츠렸다.
당자안이 당기로를 위해 변명하려 할 때다.
한 손에 고색창연한 검을 든 남궁연이 허공에서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 당자안은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켜야 했다.
무려 십전무후다.
그녀의 앞에서 뻔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집주인 앞에서 살수를 쓰다니. 석경장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인가요?”
남궁연이 불쾌해하자 연적하도 덩달아 화를 냈다.
“어이 영감님들! 손님이라고 대접해 줬더니 주인을 무시해요? 유명교만 무섭고 석경장은 만만해 보여요?”
‘대접해 줬다’는 말에 당하연은 조금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차 한 잔 내오지 않고 무슨 대접이라는 건지…….
하지만 대접은 둘째치고 어쨌거나 당기로 숙부가 잘못을 하기는 했다.
“죄송해요. 저희 당 숙부께서 마음이 너무 앞서는 바람에 실례를 했어요. 당 숙부님?”
당하연이 당기로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제야 당기로가 머뭇거리며 남궁연과 연적하에게 사과를 했다.
“노부가 서두르다 실수를 했소. 절대 석경장을 무시해서 그런 것은 아니외다. 당가의 반도를 잡겠다는 생각에 그만 앞뒤 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당운망이 버럭 소리쳤다.
“당기로야! 내가 왜 반도냐! 있지도 않은 일로 거짓 누명 씌우지 마라!”
“너, 너…….”
당기로는 당운망을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방계 출신의 범죄자에게 하대를 들으니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이다.
한편 당운망은 당가 사람들이 한발 물러서자 남궁연에게 하소연했다.
“안주인도 알다시피 나는 저 당가 놈들의 괴롭힘을 피해 당가를 떠난 사람이오. 그런데 석경장까지 찾아와 도둑 취급을 하다니. 정말 억울해 죽겠소.”
‘안주인’이라는 말에 남궁연은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자신과 대화할 때는 호칭을 생략하더니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남궁연은 검을 거둔 뒤에 연적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가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연적하와 나란히 선 남궁연이 당운망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 노인.”
“예.”
당운망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는 직감적으로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당가주가 도둑의 누명을 씌웠다면 자신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백팔독정’은 당가의 보물.
숨어 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당 노인은 석경장의 은인이에요.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게 인지상정. 만약 당 노인이 원한다면 석경장의 식솔로 받아 줄 수도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의 제안에 당기로가 즉각 반대했다.
“불가하오! 그는 당가의 반도외다. 당가의 ‘백팔독정’을 훔쳐 간 반도를 식솔로 받겠다니! 십전무후의 눈에는 정녕 우리 당가가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순간 연적하가 불쾌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이봐요. 노인장. 우리 누님이 왜 당가를 봐야 되는데? 누님은 나만 보면 돼. 다시 한번 그따위 헛소리를 하면 혀를 뽑아 버릴 거야!”
“…….”
당기로는 기막힌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은데 왜 지금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말실수를 했나?’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니 자신이 흥분해서 뭔가 실수를 한 모양이다.
“오해를 한 것 같은데 노부의 말은……”
“당신은 이제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마.”
연적하의 일방적인 지시에 자존심이 상한 당기로는 당가의 이름을 앞세웠다.
“나는 당가 내각의 장로요! 아무리 남천 대협이라 해도 나에게……. 악!”
당기로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런 미친…….’
당가의 일원으로 천하를 종횡하면서 주먹질을 당하기는 처음이다.
당기로는 아찔할 정도로 분노했지만, 감히 발작하지 않았다.
어느 틈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는 연적하를 보니 소름이 오싹 돋았다.
만약 그가 살심을 가졌다면 자신은 죽었다.
위기를 느낀 당기로는 일단은 참아 넘기기로 했다.
소나기가 내릴 때는 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
‘크윽! 놈은 그저 소나기다. 소나기에 맞았다고 펄펄 뛰면서 화를 내서야…….’
말도 안 되는 가정이건만 신기하게도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연적하의 거침없는 손속에 놀란 건 당기로만이 아니다.
당자안과 당하연도 가슴이 철렁했다.
첫째는 그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가공할 신법에 놀랐고, 둘째는 그가 남궁연보다 더 노골적으로 당가를 무시한다는 것에서다.
두 사람은 그런 연적하를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당가 사람들이 침묵하자 당운망은 재빨리 남궁연에게 머리를 숙였다.
“가모님! 부족하지만 식솔로 받아 주신다면, 석경장을 위해 분골쇄신 노력하겠습니다!”
나이에 맞지 않는 결기 어린 다짐이다.
천하에서 그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 남궁연과 연적하뿐이니 당연하다.
남궁연이 웃으며 연적하를 돌아보았다.
“그를 받아들여도 괜찮겠지?”
“당연하죠. 누님 뜻대로 하세요.”
연적하는 어린아이처럼 헤실헤실 웃었다.
남궁연이 그를 향해 생긋 웃어 보인 후에 당자안에게 말했다.
“당 대협, 보신 대로예요. 당운망은 우리 석경장의 사람이 되었어요. 당가 가주께 전하세요. 당운망에게 용무가 있으면 먼저 연 장주를 찾아오라고. 참고로 누구라도 석경장의 식솔을 허락없이 건드리면……. 우리 부부가 열 배로 돌려줄 거예요.”
당자안은 감히 왈가왈부 말하지 못했다.
행여나 자신마저 연적하에게 당했다가는 그런 개망신도 없기 때문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당자안이 객청 위의 연적하 부부에게 읍을 올렸다.
“실례가 많았소이다. 우리는 단지 ‘독질려’와 ‘독모래’를 석경장에 반입한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러 왔을 뿐이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소.”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소리다.
그를 빤히 보고 있던 연적하가 뚱한 얼굴로 화답했다.
“이봐요, 노인장. 오늘은 당가주 얼굴을 봐서 그냥 보내 주는 거예요. 다음에는 국물도 없어요. 우리가 팔황을 말로 타일러서 돌려보낸 줄 알아요?”
그의 노골적인 협박에 당자안은 이를 갈았다.
강호에서 이런 식의 협박을 받아 보기도 처음이다.
기분은 말도 못 하게 더러웠지만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석경장 사람들은, 비록 숫자는 셋밖에 안 되지만, 추측하기 어려운 고수였다.
‘가주가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어쩌면 석경장과의 전면전을 선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싸움에서 당가가 얻게 되는 건 전혀 없다.
그에 반해 잃을 건 너무도 분명하다.
‘남궁세가와의 교분’과 힘들여 쌓아 올린 ‘천하인들의 신망’이 그렇다.
‘지금 석경장을 건드리면 누구라도 유명교의 주구라고 비웃겠지?’
당가에서 무슨 말을 가져다 붙여도, 정황상 그렇게 보일 것이다.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던 당자안이 돌아섰다.
객청에 남아 있던 당하연이 남궁연과 연적하에게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숙부들을 따라갔다.
당가 사람들은 무림세가에 어울리지 않는 축 처진 어깨로 석경장을 떠났다.
일은 잘 마무리됐지만 어째 구천노도 심통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자신보다 한발 앞서 당운망이 석경장에 뿌리를 내리게 돼서다.
어제까지 손님이던 당운망이 이젠 식솔이다.
그건 상대적으로 자신의 지위가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으로 끙끙 앓던 심통은 당운망에게 시비를 걸었다.
“당가야, 너는 당가 가주인 암영무흔 당세호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당운망은 그가 당세호를 언급하자 살짝 긴장했다.
“내가 눈이 삔 건가? 당가 놈들이 너를 만만하게 여기니 이상해서 그러지.”
연적하와 남궁연의 시선이 당운망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심통 말대로 당가 사람들은 당운망을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았다.
당운망이 가주보다 뛰어난 고수라면 조금 더 긴장했어야 할 텐데 말이다.
“그, 그건, 그들이 나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는 게다. 그들은 내각 사람들이고 나는 외각 사람이니까. 내각과 외각은 같은 당가지만 사실상 왕래가 없다.”
“당세호는 어떻게 알았는데?”
“그는 소가주 시절에 나와 같은 독공을 연성한 적이 있다. 그때 ‘만독동’이라는 곳에 함께 들어갔는데, 눈치 없게 내가 먼저 출동(出洞)해 버렸다. 뭐, 나도 어려서 호승심이라는 게 왕성한 때였으니까. 어쨌든 그날 이후로 그에게 시달리기 시작했다.”
“호승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확인할 길이 없다고 막 던지는 게냐?”
“거 참 생긴 대로 의심 많은 늙은이로세.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당세호를 찾아가서 물어보든가.”
“흥!”
말문이 막힌 심통은 연신 콧방귀만 뀌었다.
혼자서 ‘흥! 흥!’거리고 있는 심통을 향해 연적하가 말했다.
“코 막혔어? 더럽게 왜 그러고 있어?”
“공자님.”
“왜?”
“아무래도 석경장을 위해서라도 제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무슨 헛소리야? 주루 구하기가 어려워서 그래? 돈 빌려줘?”
“아니요. 당가 놈들까지 설치는 마당에 저만 나가서 마음 편하게 살면 되겠습니까?”
“어, 심 노인은 그래도 돼. 앞으로 얼마나 더 산다고 그래. 남은 인생을 즐겨.”
“그럴 수 없습니다. 그냥 가까운 오우촌 호반(湖畔)에 주루를 만들고, 석경장에서 지내겠습니다.”
이대로 석경장에 눌러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남궁연이 한마디 했다.
“제자들과 석경장에서 지내려면 한 달에 은자 세 냥을 내야 할 거예요.”
심통이 뜨악한 얼굴로 남궁연을 보았다.
“헉! 사모(師母)님, 당가 놈은 그냥 지내게 하셨으면서 왜…….”
“당 노인은 약제당에서 일을 하니까요.”
석경장의 안주인인 남궁연은 계산이 분명했다.
한참 동안 당운망을 노려보며 갈등하던 심통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예.”
훗날 사람들은 말했다.
여강현의 명물인 금월주루가 석경장에 편입된 시발점이 바로 이 은자 세 냥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