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3
53회. 난 대붕(大鵬)이야
구밀복검 심양각은 양심이 찔렸던지 지옥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헐! 지옥요?”
“구천현녀도 있는데 지옥이 없을라고. 심 노인이 외운 심법은 구천현녀에게 직접 배운 거야.”
“사실입니까?”
심양각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연적하를 힐끔거렸다.
구천현녀는 신화 속의 여선(女仙)이다. 전설에나 나오는 구천현녀에게 직접 배웠다니 기가 막혔다. 그런데 연적하가 그렇다고 하니 마냥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심 노인이 믿든 말든 상관없어. 다만 심 노인이 삼백 자 구결로 내공을 되찾으면 ‘아! 지옥이 기다리고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살라고.”
“그, 그건 왜 그렇습니까?”
심양각은 ‘내공을 되찾는다’는 말에 기쁘다가도, ‘지옥 어쩌고’ 하니 불편했다.
“말했잖아. 선녀가 있으면 지옥도 있다고. 아무나 막 죽이고도 잘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내공 잃은 것도 벌이라고 생각할 정도면.”
“…….”
심양각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살면서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빼앗고, 때리고, 죽이는 일만 봐 와서 그랬다.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았다면 모르고 살았을 일이다.
그러나 독심낭인 황요명 같은 놈에게까지 무시를 당하다 보니 뭔가 느껴진다. 강자에게 대책 없이 밟혀야 하는 약자의 서러움 같은 거 말이다.
연적하의 말대로 지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옳고 그름의 경계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정파와 사파의 구분과는 다른 것이었다.
“연 형님.”
“왜?”
“십 년간 창고에 갇혀 있던 아이가, 혹시 연 형님입니까?”
연적하를 보고 있노라면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진다. 그에게는 따스한 봄날의 햇살과 여름에 몰아치는 폭풍우 같은 광폭함이 있다.
연적하는 인간의 난잡한 사심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마치 단 한 번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천혜의 자연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뭐라고? 이 몸이 그렇게 약해 보여?”
“흘흘흘…….”
심양각이 푸들푸들 웃었다.
저 연적하가 또래의 철부지들처럼 허세를 부리는 게 새로웠다.
“심 노인.”
“예.”
“우리가 익힌 심법이 뭔지 알지?”
“구천여일진경 아닙니까?”
“그래, 진경의 마지막에 ‘앉은 자리에서 금꽃을 피우면 물고기가 대붕이 된다[天花亂墜 鯤化爲鵬]’는 글이 적혀 있어. 언젠가 천지상인이 이 ‘곤화위붕’에 대해 말해 주더라고. 물고기가 새로 변하는 게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말이야. 생각해 봐. 물고기와 새는 생김새부터 많이 다르잖아.”
“아!”
심양각이 허허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통은 누구보다 그 자신이 더 절감하고 있다.
어쩌면 자신은 대붕이 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심 노인은 나처럼 십 년씩이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예…….”
그제야 심양각은 연적하가 십 년간 갇혀 지낸 세월을 어떻게 받아들이려는지 알았다.
“돌이켜 보면 말야. 그곳은 정말 물속 같았어. 숨을 쉬어도 답답하고, 나만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고, 멀리 볼 수도 없었지.”
“…….”
“심 노인도 지금 그렇지?”
“흐흐,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닙니다.”
“오봉십걸은 백 자, 심노인은 삼백 자를 익혔어. 그게 뭘 의미하는 줄 알아?”
“모릅니다.”
“구천현녀가 가르쳐 준 완벽한 구천여일진경은 구백 자야. 백자구결에는 백 자만큼의 힘이 주어질 테고, 삼백 자에는 삼백 자만큼의 힘이 주어질 거야.”
“그렇군요.”
“심 노인이 최소한 오봉십걸들보다 세 배는 더 강해질 거라는 얘기지.”
순간 심양각은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오봉십걸들은 백자구결만으로 언젠가 성급 고수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세배는 더 강해질 거라니?
“너무 좋아할 건 없어. 심 노인이 그 전에 늙어 죽을 수도 있으니까.”
“헐! 설마요. 그랬다면 저에게 하늘이 삼백 자나 허락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응? 설마 심 노인 같은 마두가 ‘하늘의 뜻’이라는 걸 믿기로 한 거야?”
“흐흐, 저 같은 폐인에게 마두라니요.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젠장. 그렇게 좀 웃지 마. 그러니까 사람들이 구밀복검이라고 부르는 거잖아.”
계면쩍은 얼굴로 수염을 매만지던 심양각이 물었다.
“연 형님은 금꽃을 피우셨습니까?”
“당연하지. 난 대붕이라고.”
“존경합니다, 형님.”
연적하가 흠칫 몸을 떨었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이상한 모양이다.
***
여주.
보광사.
소림사 장로인 공백 대사와 다섯 나한의 방문으로 보광사가 발칵 뒤집어졌다. 주지인 무광과 수좌승들이 공백 대사 앞에 우르르 나왔다.
“나무아미타불. 대사님, 이곳에는 어쩐 일로…….”
무광은 공백 대사가 불쑥 찾아온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광사는 무림과 무관한 평범한 사찰인 까닭이다. 승려들은 그 흔한 체력 단련조차 하지 않고 있는데 소림사의 무승들이 왜 온 걸까?
공백 대사가 반수 합장으로 화답한 뒤 말했다.
“양원 스님께서 보광사에 승적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양원 스님은 열흘 전 출타하신 뒤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만.”
공백 대사와 양원 스님의 관계를 모르는 무광이 당황한 눈으로 수좌승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수좌승들 역시 내막을 모르는 터라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실은 양원 스님은 저의 친형님이십니다. 양원 스님과 한방을 쓰시던 정명 스님만 그걸 알고 계셨지요.”
“아, 그랬군요.”
“며칠 전 정명 스님의 서찰을 받았습니다. 양원 스님께서 실종되셨다고 하더군요.”
“시, 실종입니까? 소승은 그저 개인적인 일로 멀리 가신 줄로만…….”
무광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 정도로 장기간 자리를 비울 거였으면 정명 스님에게 언질이 있었을 겁니다. 평소처럼 탁발을 나가신 뒤에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하더군요.”
공백 대사는 더 이상 주지인 무광과 대화 나눌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양원 스님과 같은 방에 계셨다는 정명 스님을 만나고 싶군요.”
“아, 예. 정명 스님이라면 숙소에 있을 겁니다.”
무광은 서둘러 공백 대사를 숙소로 안내했다.
“오셨군요.”
숙소에서 불경을 읽고 있던 정명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 않았다.
“연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원 스님께서 탁발 중에 사라진 게 맞습니까?”
“예. 따로 어딜 가신다는 말씀이 없으셨으니까요.”
“양원 스님이 평소 탁발 다니는 곳을 아십니까?”
“주로 매산과 상하 일대를 다니셨습니다. 매산의 풍광과 상하의 중생들을 좋아하셨거든요.”
공백 대사의 눈에서 신광이 번득였다.
이제야 뭔가 한 가닥 실마리를 잡은 것 같다.
공백 대사는 즉시 정명에게 작별을 고하고, 다섯 명의 나한과 함께 매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매산 일대를 하루 종일 돌아다녔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다음 날 공백 대사 일행은 상하로 이동했다.
상하를 오전 내내 돌아다녔지만 누구도 열흘 전의 탁발승을 기억하지 못했다.
소득이 없어 공백 대사가 슬슬 지쳐 갈 무렵이다.
골목 어귀에서 구걸을 하던 노인이 공백 대사에게 손짓했다.
좌우를 힐끔거리던 노인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속삭였다.
“여하(汝河)로 갔어.”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하.”
노인은 답답한 듯 손가락으로 강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내 엉덩이에 깔고 앉았던 거적을 말아 들고는 자리를 떠났다.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공백 대사는 나한들과 함께 강변으로 나갔다.
이제 막 물이 오르는 갈대가 봄바람에 흐느적거렸다.
막상 강변으로 나왔지만 공백 대사 일행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강가에는 낚시꾼은 물론 그 흔한 나룻배 한 척 보이지 않았다.
일단 공백 대사와 나한들은 넓게 흩어져 강변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두 시진(4시간)이나 지났을까?
갈대숲을 뒤지던 나한, 문곡이 소리쳤다.
“사백님! 여기 뭔가 있습니다!”
문곡의 주위로 공백 대사와 나한들이 빠르게 모였다.
얕게 묻혀 있던 헝겊이 비와 바람에 쓸려 그 모습의 일부를 살짝 내비치고 있었다.
공백 대사가 눈짓하자 문곡이 잡고 있던 걸 힘주어 당겼다.
투둑.
흙 위로 헝겊이 살짝 딸려 올라왔다.
그것은 커다란 포대의 일부였다.
그러나 포대는 어딘가에 걸린 듯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포대는 문곡과 나한들이 주변의 흙을 두 손으로 파내자 그제야 빠졌다.
문곡이 포대를 묶고 있던 줄을 풀었다.
놀랍게도 포대 안에서 나온 것은 분리된 사람의 몸통과 머리였다.
공백 대사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확인했다.
“헉! 혀, 형님…….”
부패가 진행된 머리는 실종된 양원의 것이었다.
공백 대사의 승포가 돌풍에 휘말린 듯 세차게 펄럭였다.
잠시 후 노기를 가라앉힌 공백 대사는 양원의 몸통을 주의 깊게 살폈다.
“으음……. 유명교.”
몸통이 마치 목내이(미이라)처럼 바싹 말라 있다.
이것은 유명교의 제물로 사용된 시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
낙양.
공현(鞏縣) 삼향주루.
네 남자가 거대한 원형의 탁자를 중심으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그들은 백세상방의 방주 이세창과 대행수 이연복, 그리고 삼진상방의 방주 천태상과 대행수 천약수였다.
정면에 마련된 화려한 무대에서 아름다운 예기(藝妓)가 비파를 타며 흥을 돋우고 있었지만, 정작 남자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네 남자의 뒤쪽에 아홉 명의 호위 무사가 담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중 넷은 와룡장 무사고, 나머지 다섯은 무문관 무사였다.
방주와 대행수들 표정이 굳어 갈수록 호위무사들 안색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그러다 마침내 한 사람이 탁자를 후려치며 소리쳤다.
삼진상방의 대행수 천약수였다.
“듣자 듣자 하니 너무하구려! 지금 우리 삼진상방의 공현요(鞏縣窯, 도자기 생산처)를 거저먹겠다는 거요?”
공현요는 당삼채라 불리는 자기를 생산하는 곳이다. 당삼채는 녹색, 백색, 갈색의 유약으로 장식된 자기로 낙양의 특산품이기도 하다.
백세상방의 대행수 이연복이 냉소를 쳤다.
“흥! 거저라니? 삼진상방이 그동안 우리 백세상방에 빌려 간 돈이 얼만데? 빚을 탕감해 주는 대신에 공현요의 관리를 넘기라는데, 그게 왜 거저요?”
그러자 천약수가 거칠게 받아쳤다.
“이런 젠장! 고작 은자 일만 냥에 공현요를 넘기라니 그런 도둑놈 심보가 어디 있소? 공현요를 삼사 년만 관리하면 그 돈을 다 갚고도 남음이 있는데!”
삼진상방의 입장에서는 도둑도 이런 도둑이 없다.
공현요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일 년에 삼천 냥이 넘는다. 그걸 빚 일만 냥에 가져가겠다니 칼만 안 들었지 강도가 따로 없다.
“어허! 도둑이라니! 말이면 다인 줄 아나! 남의 돈을 떼먹으려는 네 놈이 도둑이지!”
이연복의 욕설에 분위기는 급전직하로 떨어져 이젠 주먹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게 됐다.
삼진상방의 천태상과 천약수가 이를 갈며 이연복을 노려보았다. 방귀 뀐 놈이 도리어 성낸다고, 날강도 같은 놈이 펄펄 뛰니 기가 막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