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59
859회. 정말 책에 귀신이 붙어 있어요?
사월 중순.
하남성.
영하(颍河) 적룡채.
정오 무렵.
간만에 등천각에서 운기를 하던 혈제 종리목이 눈을 번쩍 떴다.
이윽고 부산한 발소리와 함께 외각의 수하와 낯선 남자가 마당을 가로질러 왔다.
깨달음의 순간을 방해받은 종리목이 사나운 눈으로 수하를 쏘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채주님. 오봉산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오봉산채?”
종리목이 수하의 옆에 선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봉산채는 오봉십걸을 배출한 산채로 녹림에서 꽤나 존중받고 있었다.
종리목과 눈이 마주치자 전풍이 꾸벅 인사했다.
“오봉산채의 전풍입니다.”
“왜 왔느냐?”
“태상호법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어서 찾아봤습니다.”
“태상호법이 너를 보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라는 말이 무엇이냐?”
잠시 머뭇거리던 전풍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태상호법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장 상방 사람들을 풀어 주고, 무백 형님과 함께 나를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
한동안 기이한 침묵이 등천각을 감돌았다.
이윽고 종리목이 스산한 눈으로 전풍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태상호법이라 해도 다른 산채의 행사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음을 아느냐?”
“송구합니다만 저는 단지 태상호법님의 말씀을 전한 것뿐입니다.”
전풍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혈제가 미친놈이라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엄하신 태상호법의 말에 저렇게 날 선 반응을 보일 줄이야!
이러다가 괜히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따르지 않겠다면?”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단지 태상호법님의 말씀을…….”
“그래, 전한 것뿐이라 이거지? 그건 알고 있으니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내가 따르지 않겠다면 태상호법이 어떻게 할 것 같으냐?”
“저는 잘…….”
“내가 잡아 온 놈들을 모조리 죽이면? 그럼 어찌 될 것 같으냐?”
순간 전풍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혈제는 미친놈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아니, 그러고도 남았다.
전풍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까딱 잘못했다가는 혈제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풍이 침묵하자 종리목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만약 십이마군이 그따위 소리를 했으면 정말 죽여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연적하는 다르다.
미친놈은 미친놈을 알아본다.
자신도 미친놈 소리를 듣고 있지만 뒤로는 남몰래 혈족들을 돕는다.
그에 반해 태상호법은 제 혈족까지 죽이는 잔악한 놈으로 소문이 났다.
최소한 살육의 광기에서 태상호법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소리다.
그의 지시를 거절하면 그의 칼이 어디로 향할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당장 죽이겠다고 달려오겠지?’
자신이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천하십대고수와는 비교할 수 없다.
‘씨벌…….’
치욕스러웠지만 그의 지시를 거절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태상호법에게 공치사 한번 하려다가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인지 모르겠다.
당연히 찾아와 ‘살려 둬서 고맙다’고 인사를 할 줄 알았는데, 데리고 오란다.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던 종리목이 전풍에게 물었다.
“태상호법은 어디에 있느냐?”
“서안에서 만나 뵈었으나 성도로 가시는 중이었으니……. 지금은 거지반 도착하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연무백과 함께 성도로 가야 한다?”
“……예.”
전풍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답했다.
한편으로는 저런 혈제에게 심부름을 보낸 연적하가 원망스러웠다.
종리목이 수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예!”
“들었지? 상단 놈들과 연무백을 데리고 와라.”
“알겠습니다.”
혈제의 명에 사내는 허겁지겁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적룡채 도적들이 상단의 생존자들을 등천각 앞으로 끌고 왔다.
종리목은 연무백만 남기고 상단 관계자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그리고 무덤덤한 얼굴로 서 있는 연무백에게 다가갔다.
“네가 태상호법의 형제라지?”
“그래서 문제 있소?”
종리목은 뻣뻣한 연무백의 태도에 ‘울컥’ 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네놈은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다.”
“내가 응해야 하오?”
“응하지 않을 자신은 있고?”
종리목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연무백이 순순히 따라나서지 않으면 점혈을 해서라도 끌고 갈 생각이었다.
점혈이 오래되면 신체에 좋지 않다.
이처럼 연무백을 죽일 수는 없지만, 그에게 해를 끼치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연무백은 혈제가 강제로 자신을 끌고 다닐 것이라는 걸 알았다.
피할 수 없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나았다.
“그럴 자신이 없으니 응하리다.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 생각이오?”
“네놈의 잘난 동생인 태상호법이 너를 데리고 오라는구나.”
“허면 청성산으로 가는 거요?”
“성도가 될지, 청성산이 될지는 가 봐야 알겠지.”
연무백이 기이한 눈으로 혈제를 보았다.
그가 본 혈제는 살육에 미친 악귀였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사람들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웃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살인귀가 지금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말하고 행동하니 꽤나 낯설었다.
“왜 그런 얼굴로 보느냐?”
“귀하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그러오.”
“나 같은 사람?”
“살육에 미친 살인귀.”
“크크크…….”
종리목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불쾌하게 여겼겠지만 그는 오히려 뿌듯한 얼굴을 했다.
“연무백. 천하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사람이 딱 하나 있다. 그게 누군지 아느냐?”
“설마 태상호법이라고 말하려는 거요?”
“맞다. 나는 태상호법이 무섭다. 나뿐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할 게다.”
연무백은 혈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혈제와 같은 살인귀가 연적하를 무서워하다니?
연적하는 무위가 뛰어나지만 혈제처럼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런데 혈제는 뭐가 무섭다는 것일까?
그때 갑자기 종리목이 주변에 있는 수하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태상호법이 연무백을 데리고 오라 했다. 지금부터 나는 연무백과 함께 태상호법을 만나러 갈 것이다. 내가 없다고 농땡이 치지 말고, 비어 있는 창고를 채워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쇼!”
수하들이 화답하자 종리목은 연무백에게 측근 둘을 붙인 뒤 적룡채를 나섰다.
***
사천성.
성도.
해거름 무렵.
짐마차와 짐꾼, 상인 들이 성도로 들어섰다.
머뭇거림 없이 번화한 거리를 가로지른 그들은 곧장 금인상방으로 들어갔다.
금인상방의 장양 방주가 환하게 웃으며 등원용 대행수 일행을 맞이했다.
“먼 길을 오가느라 수고했네. 연 대협,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장양 방주가 등원용 뒤편에 따로 서 있는 연적하에게 읍을 해 보였다.
“고생은요 무슨.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장양은 연적하가 만나자마자 돈타령부터 했지만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돈은 돈이고, 고생은 고생이지요.”
“인사는 됐고 잔금이나 줘요. 얼른 가족들에게 가야 하거든요.”
그가 재촉하자 장양은 총관에게 눈짓을 했다.
총관이 급하게 안채로 뛰어 들어가더니 이내 봉투 하나를 들고나왔다.
장양이 고개를 끄덕이자 총관은 들고나온 봉투를 연적하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많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금 더 준비했습니다. 아무쪼록 귀향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연적하는 얼마가 들었는지 금액을 확인하지 않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나도 간만에 좋은 경험을 했네요. 그럼, 많이 버세요.”
짧은 인사를 끝으로 연적하와 심통의 신형이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눈을 끔뻑이며 텅 빈 자리를 보던 장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오늘 밤 환영회에 참석해 주십사 말하려고 했는데……. 벌써 가 버렸네.”
그러자 등원용 대행수가 웃으며 연적하를 위한 변명을 했다.
“사천성에 들어오면서부터 줄곧 따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두 달이 넘도록 따님 얼굴을 못 보셨다고 탄식하시더군요.”
“의외로군. 그렇게 자상한 아버지일 줄은 몰랐는데.”
“저도 연 대협에게서 그런 인간적인 면모를 보게 되어 많이 놀랐습니다.”
장양이 갑자기 소리를 낮춰 물었다.
“연 대협에 대한 소문을 들었네. 화산에서 홀로 수백 명의 마교 고수들을 참살했다는 말이 있던데. 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연 대협에 대한 소문은…… 들으신 모든 것을 사실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말 그렇게 많은 마교 고수들을 혼자 처리했다는 건가? 정사파 고수들이 연합해야 겨우 할까 말까 한 일을 연 대협 혼자서 했다고?”
“연 대협은 신인(神人)입니다. 방주님도 연 대협이 구름을 타고 다니는 걸 보셨지 않습니까?”
“술법과 무공은 또 다르지 않은가. 신인은 조금 과한 표현 같구먼. 연 대협처럼 속세의 인연에 연연하는 신인이 있다면 말해 보게.”
방주의 지적에 등원용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연적하의 행보는 보통의 무림고수들과 달라도 많이 달랐다.
입신의 경지에 든 사람은 오욕칠정을 끊어 무정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딸과 부인 자랑을 할 때의 연적하는 평범한 팔불출이었다.
장양이 우두커니 서 있는 등원용의 어깨를 다독였다.
“여하튼 수고했네. 자네는 최근 십 년 이내에 가장 큰 이윤을 냈어.”
“별말씀을요.”
대행수의 노고를 치하하던 장양은 이내 다른 상인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
사월 중순.
청성파 산문 앞 서촉관(西蜀館).
반 시진(1시간) 가까이 아기를 안고 어르던 연적하가 생각난 듯 말했다.
“참! 누님. 서안에서 진기한 책을 구했는데 드려요?”
“진기한 책?”
남궁연이 짐을 꾸리다 말고 돌아보았다.
가뜩이나 책을 좋아하는데 진기하기까지 하다니 귀가 솔깃한 것이다.
“불이문(不二門)이라고 삼정상방의 방주에게 얻은 책이에요.”
연적하는 마하담(공간창고)에서 책 하나를 꺼내 남궁연에게 건넸다.
“대자은사의 대안탑에서 나온 책이라고 하더라고요.”
연적하는 상행 중에 삼정상방의 유하원 방주와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 방주의 딸이 그걸 읽다가 귀신이 씌웠다나? 여하튼 퇴마의식을 해 주고 얻은 책이에요. 누님도 그 책에 귀신이 붙은 것 같아요?”
남궁연은 대답 대신에 찬찬히 불이 문을 읽었다.
장수가 몇 되지 않아 정독을 하는 데 채 반각(약 7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남궁연은 불이문을 내려놓았는데 그녀의 표정이 기이했다.
연적하가 긴장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누님? 정말 책에 귀신이 붙어 있어요?”
“그럴 리가.”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퇴마의식 중에 별다른 일은 없었니?”
“있었어요. 귀신이 씌웠다는 여자 애가 불이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뭐라고 했기에?”
“내가 ‘너 뭐냐? 어디에서 왔어? 고서에 숨어 있었냐? 아니면 다른 데서 튀어나온 거냐?’고 물었거든요. 그랬더니 그게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곳이 어디겠어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진짜 나도 소름이 오싹 돋았어요. 그러더니 자기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한 곳에서 왔다나?”
그날 밤의 일을 떠올리던 연적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