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1
91회. 얼굴이 같아서요
늦가을의 낙양 거리는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연적하와 구천노도 심통은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면서 쉬지 않고 움직였다.
“상조상방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왜 이렇게 안 보여? 이 길이 맞아?”
계속된 연적하의 푸념에 심통이 웃으며 말했다.
“흐흐, 저기 등운객점을 보니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아까 당과 팔던 상인이 등운객점을 지나면 바로 보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쩝, 당과 하나 더 먹고 싶다.”
심통은 연적하의 동문서답을 한 귀로 흘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한순간 아이처럼 소리쳤다.
“공자님, 찾았습니다! 저기 있네요!”
연적하의 눈이 심통의 주름진 손끝을 따라갔다.
과연! 오십 보쯤 떨어진 곳에 상조상방의 간판이 보였다.
십이 년 만에 다시 남궁연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그녀의 얼굴은 잊었지만 그래도 왠지 설렜다.
긴장을 했는지 상조상방으로 다가갈수록 연적하의 걸음이 느려졌다.
느려진 보폭에 맞춰 걷던 심통이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공자님. 아까는 왜 정 관주의 제안을 거절하셨습니까?”
“미쳤어? 돈 받고 사람을 죽이게?”
“아…….”
심통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연적하를 힐끔거렸다.
유명교에 대한 반감으로 당연히 수락할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 의외다. 녹림에 몸담고 있는 그가 청부 살인을 싫어할 줄이야.
돌이켜 보니 그가 아직 누군가를 죽인 적은 없는 것 같다.
대력귀를 죽였지만 그때 그는 인간이 아니라 불사의 괴물이었으니 예외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상조상방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때마침 밖으로 나가던 행수 손학은 낯선 방문객들을 보고 멈춰 섰다.
손님을 맞는 것은 일꾼들이 할 일이지만, 노인과 소년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도검을 보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무슨 용무로 오셨소?”
손학은 노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의 시선을 받은 심통이 연적하를 대신해 나섰다.
“이곳에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안에 있느냐?”
“그렇습니다만……. 뉘신지요?”
손학은 상조상방의 행수였지만 상대가 무림인인지라 자세를 낮췄다.
“가서 연 공자께서 찾아왔다고 전하거라.”
심통의 일방적인 말에 손학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무림인들의 무례함을 보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까.
“마침 저도 그분들에게 볼일이 있었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손학은 상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앞장서 걸어갔다.
나름 소소한 반격을 시도한 셈이다.
한참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규모가 큰 전각이 나타났다.
현판에 적힌 글은 수려각.
그 앞에선 손학이 슬쩍 고개를 돌려 방문객들을 확인한 후에 크게 외쳤다.
“남궁 소협, 안에 계십니까?”
잠시 후 풍운검 남궁천이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방문자들을 둘러보다 연적하를 발견한 남궁천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헛! 연 아우?”
급히 밖으로 나온 그는 대충 신발을 꿰어 신고 연적하에게 다가갔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지나던 길에 들린 것이냐?”
“예, 겸사겸사.”
쑥스러운 듯 연적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남궁세가와 그 사이에 애써 찾아다닐 만큼의 친분이 없기에 그런 것이다.
“자, 자, 안으로 들어가자. 연이가 너를 보면 좋아할 게다.”
남궁천이 연적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전각으로 이끌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동생과 네 이야기를 했었다. 오늘 너를 만나려고 그랬던 모양이지? 세상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정말 반가운지 남궁천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의 호들갑에 심통과 손학은 뒤쪽으로 밀려나 멀뚱멀뚱 구경만 해야 했다.
남궁천이 연적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마당에는 심통과 손학만 남았다.
“너는 남궁세가 사람들에게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퉁명스러운 심통의 물음에 손학이 뒤늦게 ‘아!’ 하고 제 머리를 쳤다.
“그런데……. 함께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손학은 소년만 콕 찍어서 데리고 간 남궁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궁세가의 손님은 공자님이지 내가 아니다.”
“아, 예에.”
손학은 건성으로 대꾸한 뒤 굳게 닫힌 전각에 시선을 고정했다.
남궁세가에 전할 말이 있어서 온 건 사실이다.
그러나 급한 일도 아닌데 다시 남궁천을 불러내려니 미안했다.
잠시 생각하던 손학은 노인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왔던 길을 돌아갔다.
***
남궁연, 화용독심이라 불리는 그녀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연적하의 얼굴이 굳었다.
아! 어찌 그 모습을 잊을까!
구천현녀경에서 보았던 선녀다.
비록 여섯 살 때 만난 남궁연의 얼굴은 잊었지만, 구천현녀경의 선녀는 어제 본 듯 생생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눈앞의 남궁연은 그때 구름을 타고 사라진 선녀와 똑 같았다.
“어, 어…….”
연적하가 남궁연을 가리키며 버벅거리자 남궁천이 요란하게 웃었다.
“푸하핫! 연 아우, 뭐가 ‘어어’야. 십삼 년 만에 만났으면 제대로 된 인사를 하라고.”
우아하게 자리에 앉은 남궁연은 맞은편의 연적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찬찬히 뜯어보니 여섯 살 무렵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엄마와 누나도 구별할 줄 모르던 아이가 장성한 걸 보니 대견했다.
그렇게 모진 학대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구나.
좁고 냄새나던 창고에서 탈출해 녹림도가 되었다더니 눈빛은 여전히 맑았다.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던 어린 시절의 그날처럼.
눈빛이 변하지 않아 다행이다.
힘든 과거를 간직한 그가 세속에 찌들었다면, 하늘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게 고맙고 기특해서 남궁연은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용기를 얻은 연적하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누, 누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끄덕끄덕.
평소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가족들과도 대화하지 않는 그녀였다.
“저는, 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창고에서 지냈어요. 그러다가 도망쳐서……. 늙은 거지를 만났는데, 아! 맞다. 그 거지가 깨진 바가지도 줬어요. 저를 거지로 알았나 봐요. 하하.”
남궁연은 눈을 빛내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서없는 이야기였지만 그가 살아온 날들이 그린 듯 눈에 선했다.
“……산에서 길을 잃고 거의 죽을 뻔했는데, 그때 형님들이 구해 줬어요.”
한창 떠들던 연적하가 목이 마른 듯 차를 마셨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남궁천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까 연이를 보고 꽤나 놀라던데 왜 그랬던 거냐? 연이가 한 미모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놀란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아, 형님. 그게 사실은요.”
연적하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남궁연과 남궁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서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선녀를 보았는데 그게 연 누님이었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사실은 뭐?”
남궁천의 재촉에 연적하가 탄식하며 말했다.
“하아! 제 이야기를 듣고 비웃으면 안 돼요. 사실 왜 그랬냐면 말이죠.”
연적하는 큰마음 먹고 ‘거울에서 본 구천현녀의 얼굴이 남궁연과 똑같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
남궁천은 진지한 연적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외롭고 힘들어서 헛것을 본 게 분명하다.
좁은 공간에 오래 갇혀 있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더구나 한창 꿈 많은 어린 시절이 아니던가.
분명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던 시절의 추억일 것이다.
“험, 험, 그 선녀가 구천현녀라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거울에 적혀 있었으니까요.”
“아! 선녀의 이름이?”
“예.”
남궁천은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린 나이에 마음이 허해서 본 것 치고는 그럭저럭 앞뒤를 잘 맞춘 것 같다.
“그 뭐냐, 불경에 보면 ‘모든 게 마음에 달려 있다’라는 말이 있다. 험, 험, 네가 봤다니까 본 거겠지. 그래도 참 신기한 우연이구나. 선녀와 연아가 똑같았다니. 그렇지 않느냐? 연아야?”
갑작스러운 남궁천의 물음에 남궁연은 웃기만 했다.
과묵한 남궁연을 대신해서 남궁천이 대화를 이끌어 갔다.
가뜩이나 말 많은 연적하도 지지 않았다.
그렇게 남궁연을 사이에 두고 남궁천과 연적하는 쉴 새 없이 수다를 이어 나갔다.
남궁연은 때로는 웃음과 간단한 고갯짓으로 둘의 대화에 참여했다.
한낮에 시작된 담소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끝났다.
연적하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천이 뒤늦게 물었다.
“참! 머물 곳은 정했느냐?”
“아직요. 이제 도착한걸요.”
“우리는 수일 내에 정주로 거처를 옮길 생각이다. 낙양은 월하교당과 너무 가까워서. 나중에라도 꼭 대연상방으로 찾아오거라.”
“예…….”
뜻밖의 말에 연적하는 기분이 착잡했다.
잠시 후 연적하와 남궁천, 남궁연 남매가 마루로 나왔다.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심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헐! 심 노인, 기다리고 있었어?”
“예.”
“가까운 주루에 가서 술이라도 마시고 있지 그랬어.”
“흐흐,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푹 졸았습니다.”
“풋! 왜 불편하게 앉아서 졸고 있어? 피곤하면 아무 데나 드러눕지. 귀하게 컸어? 잠자리를 꽤 가리네?”
“아닙니다. 이제 곧 나오겠지, 나오겠지, 하다가 그렇게 된 겁니다.”
심통은 좀 억울했다.
녹림의 도적치고 잠자리 가리는 사람은 없다.
술이 빠진 자리라서 적당히 끝날 거라고 생각한 게 실수였다. 끝날 듯, 끝날 듯 이어지던 대화를 생각하면 소름이 다 돋는다.
***
개봉.
용희루.
늦은 밤이지만 용희루는 취객들과 기녀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술시 말(저녁 9시)쯤 됐을까?
한 취객이 침방으로 안내하던 기녀, 소향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악!”
소향이 복도 바닥에 나뒹굴었다.
술 취한 사십 대 사내가 야수처럼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걷어찼다.
퍼억. 퍽. 퍽. 퍽.
“이 씨벌 년아! 내가 분명히 다른 년 데리고 오라고 했지! 그런데 왜 내 말을 무시해! 내가 이런 데 드나드니까 만만해 보이냐? 엉? 몸이나 파는 년이!”
버둥거리던 소향은 정신을 잃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남자는 미친놈처럼 소리를 꽥꽥 지르며 계속해서 그녀를 밟았다.
이미 바닥에 피가 흥건했지만 그의 발길질은 점점 더 강해졌다.
놀란 기녀들이 호위무사를 부르러 달려갔다.
가장 먼저 온 사람은 마침 근처를 지나던 왕보강이다.
“멈추시오!”
왕보강이 취객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사내는 슬쩍 허리를 비틀어 피한 뒤 오히려 언성을 높였다.
“뭐야! 이 새끼들! 창녀들과 짜고서 손님을 치네? 너 뭐하는 새끼야! 주인 나오라 그래!”
“무슨 헛소리야?”
기가 막힌 왕보강이 다시 상대를 잡아갔다.
그때 사내의 손이 벼락처럼 왕보강의 가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크악!”
왕보강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용희루의 경호 책임자인 풍연초가 도착한 건 그때였다.
장내를 살피던 풍연초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녀는 핏물 위에 기절해 있고, 쓰러진 왕보강은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산적 생활을 할 때도 이렇게 기막힌 꼴은 보질 못했다.
풍연초가 황당한 눈으로 취객을 바라보았다.
“너 뭐 하는 새끼냐?”
기녀 머리에 발을 얹고 있던 사내, 칠살 마천우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