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59
959회. 마음도 나이를 먹는 거 같아요
칠월 말.
합비.
여강현 석경장.
남맹과 호천맹의 전쟁으로 남직례성이 떠들썩했지만 최근 들어 석경장 식솔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은 청류신이었다.
청류신이 석경장에 들어온 지도 어언 삼십오 일.
중년 미부(美婦)였던 그녀는 이제 심통과 당운망의 동생쯤으로 보였다.
노파가 됐다는 소리다.
삼사십 대의 미부가 한 달 만에 노파로 변하니 주목을 끌지 않을 수가 없다.
일꾼들은 뒤에서 ‘청류신이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됐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청류신에 관한 소문은 석경장의 담을 넘어가지 않았다.
교류하는 사람이 없는 탓이다.
여강현 사람들도 석경장 일꾼들을 두려워해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소문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청류신이 늙자 남궁연은 그녀를 집안일에서 손을 떼고 쉬게 조치했다.
그때부터 청류신은 당운망, 심통 등과 함께 어울렸다.
정오 무렵.
객청.
두 노인이 마당을 내려다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심통과 청류신이다.
담소를 나누던 청류신이 갑자기 말했다.
“지안이와 월아, 금아의 노는 소리가 안 들리니 집안이 적적하네요.”
“그 아이들이 좀 시끄럽기는 했지.”
“그런 게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지요. 어디 갔나요?”
“장이 서는 날이라고 공자님 내외와 함께 나갔다.”
“훗! 그런데 심 대협은 왜 장주님을 공자님이라고 부르시는 건가요?”
“입에 붙어서 그런다.”
심통이 머쓱한 얼굴로 염소수염을 매만졌다.
사실 입에 붙어서만은 아니다.
‘장주님’이라 부르는 당운망과의 차별을 위해 ‘공자님’ 소리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었다.
“장주님도 이상할 텐데 뭐라 하지 않으시는 것 같고. 심 대협과 장주님을 보면 재밌어요.”
“우리가 본래 재밌는 사람들이니라.”
“호호홋!”
웃는 것도 힘든지 청류신의 상체가 들썩거렸다.
뒤늦게 호흡을 가다듬은 청류신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젠 마음껏 웃는 것조차 어려운 몸이 되고 말았다.
심통이 안쓰러운 눈으로 그런 청류신을 보았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득 청류신이 입을 열었다.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그렇지.”
“아닌 것 같아요.”
“…….”
심통이 의아한 눈으로 청류신을 보았다.
곱게 늙은 그녀를 보니 명치에 뭔가 걸린 듯한 느낌이 든다.
거리를 떠돌던 어린 시절, 부모 손을 잡고 가는 또래의 예쁜 계집아이를 보던 때처럼 가슴이 먹먹했다.
다시 생각해도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 시절의 감정이 다 늙어서도 이토록 생생한 걸 보면 틀림없다.
청류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요즘은 잠이 들면 깨어나지 못할까 봐 살짝 걱정이 돼요. 그런 걸 보면 마음도 나이를 먹는 거 같아요. 젊어서는 그런 생각 안 하잖아요.”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런 걸 기우(紀®)라고 한다. 어리석어서 그러는 거지 늙어서 그런 게 아니다.”
심통의 퉁명스러운 말에 청류신이 또 ‘깔깔!’ 웃었다.
“심 대협은 정말 재밌으세요. 젊어서도 인기가 많으셨죠?”
“없었다. 지금이야 기루에 가면 여자들이 달라붙지만, 젊은 시절에는 돈이 없어서 기녀도 옆에 오지 않았다.”
“아닌데……. 여자들은 재밌는 남자 좋아하는데…….”
“흥! 그거야말로 개가 풀 뜯어 먹는 소리다. 남자든 여자든 얼굴이 받쳐 줘야 인기가 많은 법이다. 너는 인물이 고우니……. 아니구나.”
심통은 하던 말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팔황신모가 아닌 본래 청류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서다.
그러자 청류신이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쳇! 본래의 제 얼굴도 지금 이만큼은 됐거든요?”
“아 그러냐? 그러면 너도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가 많았겠구나. 그게 세상의 이치니라.”
“저는 신모(神母)를 따라 산중 생활을 해서 그런 거 몰랐어요.”
“저런!”
장단을 맞추는 심통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왜 그렇게 좋아하세요?”
심통이 머뭇거릴 때 누군가 손에 꾸러미를 들고 마당을 가로질러 왔다.
당운망이었다.
심통은 얼른 당운망으로 화제를 돌렸다.
“당가야. 약당의 귀신이 이 시간에 웬일이냐?”
“너를 만나러 온 거 아니니까 신경 끊어라.”
심통의 말을 일축한 당운망은 객청으로 올라와 들고 있던 꾸러미를 청류신에게 불쑥 내밀었다.
“받거라.”
“이게 뭔가요?”
“보신단이라고 당가 비전의 약이다. 이름 그대로 몸에 좋은 약이니 아침저녁으로 하나씩 먹거라.”
“어머! 감사해요. 그런데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자신에게 남은 날이 십사 일에 불과한데 꾸러미가 묵직해 해 본 소리였다.
“보름치니 얼추 맞을 게다.”
“아…….”
한순간 객청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보신단을 보고 배가 아팠던 심통은 ‘이때다’ 싶어 화를 버럭 냈다.
“에라! 이 눈치 없는 늙은이야! 병 주고 약 준다더니 딱 그 꼴이구나. 어디 할 말이 없어서 그런 말을 입에 담느냐?”
“아니, 나는 그저……. 바빠서 이만 먼저 가야겠다.”
머리를 긁적이던 당운망은 슬그머니 돌아섰다.
그러자 청류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당 대협, 감사해요. 잊지 않고 잘 챙겨 먹을게요.”
“그래, 혹시 어디 안 좋은 데 있으면 바로 약당으로 찾아오고.”
당운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청류신은 심통에게 쓴소리를 했다.
“아니 왜 당 대협에게 면박을 주세요? 저를 위해서 귀한 약까지 지어다 주신 분인데.”
“당가가 너무 입방정을 떨어서…….”
“저를 위하시는 마음은 고마운데 당 대협과 친하게 지내세요. 심 대협도 아프면 당 대협의 도움을 받아야 하잖아요.”
“쩝…….”
심통은 반박하지 않았다.
틀린 말도 아닐뿐더러 청류신과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는 동안 꾸러미를 연 청류신은 목함에서 보신단의 절반을 취하고, 나머지 절반을 심통의 앞으로 밀어 보냈다.
“이건 심 대협 드세요.”
“아니다. 나보다는 네가 먹어야지.”
심통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녀의 약을 뺏어 먹는단 말인가!
하지만 청류신도 고집을 꺽지 않았다.
“저는 건강과 상관없이 십사 일 후에 죽잖아요. 솔직히 보신단은 저에게 아무 의미도 없어요. 정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당 대협에게 조금 더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게요. 심 대협도 이제는 몸 생각을 하셔야 돼요. 제 마지막 소원 들어주는 셈치고 받아 주세요.”
그렇게까지 말하자 심통은 마지못해 보신단을 품에 챙겼다.
두 사람은 점심 식사 시간이 되도록 담소를 이어 갔다.
***
여강현.
장터.
장날이라 거리는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지안은 월아와 금아의 호위 속에 장터를 종횡무진으로 휘젓고 다녔다.
그 뒤를 연적하와 남궁연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점심 식사 시간이 되자 연적하는 지안을 불러들인 후, 가족들과 함께 가까운 요리점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월아와 금아는 자청해서 지안을 먹이겠다고 나섰다.
연적하가 흐뭇한 미소로 지안이 먹는 걸 보자 남궁연이 물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장터에까지 따라왔어?”
평소 연적하는 장터 근처에도 가질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지안이 가자는 대로 따라다니니 의아할 수밖에.
“왜요? 나하고 함께 다니니까 불편해요?”
“그럴 리가. 네가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러지.”
“그냥, 우리가 이런 게 나중에 다 추억이 된다 생각하니 좋아서요.”
“그런 소리 하는 걸 보니 너도 나이를 먹긴 먹나 보네?”
“철들었다는 칭찬이죠?”
“그럴 수도 있고.”
남궁연은 연적하의 그릇에 고기 몇 점을 발라 얹었다.
그렇게 연적하의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다.
요리점 앞길로 한 떼의 사람들이 우르르 지나갔다.
그들의 손에 들린 몽둥이와 식도(食刀)를 본 연적하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살벌하네.”
때마침 옆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일행에게 말했다.
“오늘 양은주가의 양 가주가 날을 잡았네. 날을 잡았어.”
“무슨 날?”
“지평주가와 그동안 주류 거래를 두고 계속 마찰이 있었잖나.”
“아! 지평주가도 만만한 상대가 아닐 텐데.”
“그래도 지평주가가 준비를 하지 않았으면 오늘 된통 당할걸?”
“그러게. 저 정도 인원이면 그냥 쓸어버리겠는데?”
그러나 그들의 말과 달리 일각(15분)쯤 지나자 양은주가의 사람들은 다시 뒤로 쭉 빠졌다.
뒤이어 몽둥이와 식도는 물론 손도끼까지 든 사람들이 반대편에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누가 봐도 양은주가 패거리들이 밀리는 모양새다.
후퇴하던 양은주가 패거리에 지원이 붙자 판세는 다시 비등비등해졌다.
잠시 대치하던 양측은 본격적인 싸움에 앞서 서로를 향해 질펀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야이! 개…….”
“니 에미…….”
개에서 시작된 욕이 집안 어른들 안부를 묻기에 이르렀을 때다.
닭다리를 입에 물고 창밖을 보던 지안이 월아에게 물었다.
“에미 뭐야?”
“지안아. 그건 나쁜 말이니까 듣지 마.”
말과 함께 월아가 지안의 귀를 두 손으로 막았다.
보다 못한 연적하가 창밖으로 머리를 쑥 내밀고 한마디 했다.
“어이! 형씨들! 여기 어린애들도 있는데 욕은 좀 자제하지?”
대치하고 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적하를 향했다.
양은주가의 사내들 중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야이! 씨벌 놈아! 주둥이를 확 찢어 버리기 전에……. 악!”
사내가 말하다 말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곧이어 다시 일어난 사내가 입에서 뭔가를 파냈다.
부러진 이빨과 닭뼈가 나왔다.
그걸 본 사내는 기가 질린 얼굴로 눈만 끔뻑거렸다.
저토록 먼 거리에서 닭뼈를 던져 사람을 상하게 한다?
그건 즉 상대가 무림의 고수라는 소리다.
양은주가와 지평주가의 싸움은 자연히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지평주가 쪽 사람 하나가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갔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저는 지평주가의 서문진이라 합니다. 어디의 뉘신지요?”
“내가 누군지는 알 거 없고. 욕을 하려면 다른 데 가서 싸워. 자라나는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
상당히 거만한 태도지만 서문진은 그걸 시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 주의하겠습니다.”
그는 더 묻지 않고 지평주가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누구랍니까?”
지평주가 사람 하나가 묻자 서문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누구라고 말은 하지 않았는데……. 누군지 알 것도 같다.”
“누군데요?”
“그의 옆에 경국지색의 미녀가 앉아 있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미녀였다. 십전무후가 틀림 없다.”
“헉! 남천 대협?”
서문진은 술렁거림을 뒤로하고 양은주가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양은주가의 양악소가 고까운 눈으로 서문진의 아래위를 훑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대가리를 디미느냐?”
“양악소. 그만하자.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
“왜? 쫄려? 쫄리면 꿇어! 이 새끼야!”
양악소가 눈을 희번득거리자 서문진이 이를 갈며 나직이 말했다.
“이 미친놈아. 요리점에 남천 대협 내외가 있다. 네 부하의 이빨을 부러뜨린 사람이 남천 대협이란 말이다.”
“그, 그게 정말이냐?”
양악소가 놀란 눈으로 요리점과 서문진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반신반의했지만 요리점으로 가서 확인할 담력은 없었다.
머뭇거리던 양악소는 서문진에게 소리 없이 쌍욕을 퍼붓고 돌아섰다.
금방이라도 박 터지게 싸울 것 같던 양은주가와 지평주가 사람들이 좌우편으로 갈라서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거리가 텅 비게 되자 지안이 다시 음식으로 관심을 돌렸다.
잠시 멈춰졌던 식사가 재개됐다.
물끄러미 지안이 먹는 걸 보던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내 생각이 짧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네요.”
“무슨 소리야?”
“사람은 늘 저렇게 싸우면서 살아가는데……. 나는 그걸 막아 보겠다고 생난리를 쳤잖아요. 그 바람에 장인어른이나 형님과도 멀어지고.”
남궁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제는 총명한 그녀도 알 수가 없었다.
그게 연적하의 미숙함 때문에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시운이 맞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