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88
3.
전서를 내민 용인성은 맹주 명세기의 표정이 여러 가지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단한순간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심계가 깊고 냉정해.’
명세기에 대한 판단을 새삼 내리던 용인성은 얼른 시선을 수습했다. 전서에 눈길을 박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소림의 광인대사와 무당의 원율도장께서 불의한 사고를 당하시었소.”
자리를 함께한 인물들, 병무당주 은발야와 그를 보좌하는 오세명과 호일도, 부맹주 조두량과, 집법당주 위홍, 모두가 뜻밖의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읽어들 보시는 게 빠를 것이오.”
명세기는 전서를 내밀었다. 그것을 부맹주 조두량이 받아서 읽었다. 입을 딱 벌리는 그의 손에서 다시 위홍에게로, 은발야와 오세명과 호일도에게 넘어갔다.
전서의 내용을 본 모두는 충격과 놀람을 금치 못했다.
“원율도장의 손목이 잘리고 광인대사의 허리가 부러졌다니……”
파랑검 호일도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중얼거림을 흘렸다.
그것이 모두의 심정이었다.
아무리 대력황호채의 모가형제를 죽였다고는 하지만 이건 엄청난 일이다.
소림과 무당의 전력은 궤멸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십팔나한과 광법대사와 그 제자들의 죽음, 무당이십팔검 중의 십일인이 죽고 원율도장의 손목이 잘린 결과, 이것을 승리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항주무림맹의 입장에서 보면 승리다.
비록 흑호단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는 희생을 치렀다고는 하지만, 소림과 무당에 기탁했던 남궁세가의 비급을 되찾았고 대력황호채를 점령했다.
출정나간 그 병력만으로 전투를 치러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으니 대단한 대승이다.
더불어 강호인들의 입에도 오르내릴 것이다.
항주무림맹이 비급과 정의를 되찾았다고.
명세기가 입을 열었다. 이젠 완연한 맹주의 위세를 갖춘 표정과 어투로서.
“전서에서도 언급했듯이 녹림본산에서 보복행동이 있을 것이오. 우리는 이에 대한 대비를 신속히 해야만 하오. 하지만 현재의 병력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오. 맹도들을 뽑는 작업이 계속 이뤄지고는 있지만 아직 옥석조차 구분하지 못한 상태, 이번일은 강호무림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옳다고 보오이다. 항주무림맹의 이름으로 무림첩을 발송하고자 하오이다.”
무림첩이란 말에 모두가 술렁거렸다. 특히나 남궁세가의 무림첩을 받은 경험이 있는 조두량은 더 했다. 그래서 그가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혹, 반발을 사지는 않겠습니까? 남궁세가가 무림첩을 돌리고 추악한 결과가 나온 것이 얼마 되지 않은 마당입니다. 강호무림에서 염오를 느낄 수도……”
“경우가 확연하게 다르오.”
단호하게 말을 자른 명세기는 항주무림맹주로서의 위엄을 만면에 담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우리는 남궁세가와 혁리세가의 불의와 악행을 응징하고 결성한 항주무림맹이오. 우리가 대의로서 행한 일, 남궁세가의 비급을 소림과 무당에 기탁한 일에 차질이 생겼소. 대력황호채가 소림과 무당인사들을 해치고 비급을 빼앗아 간 것이오. 이에 우리는 분연히 일어서 산적들을 징치 하고 다시 비급을 회수하였소. 그 와중에 광인대사와 원월도장께서 사고를 당하시었소. 그러한 불의에 맞서고자 하는 일이오. 그것을 적극주장하고 강호동도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원활히 이뤄지리라 보오이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해봐야 알지 않겠느냐는 말을 조두량도 갈홍도 내지 못했다.
이어 나온 명세기의 단호한 목소리 때문이다.
“소림과 무당은 진노할 것이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일 것이 분명하오. 십팔나한이 몰살했고 무당이십팔검의 반가량이 희생했소. 광인대사는 허리가 부러졌고 원율도장은 검을 잡을 수 없게 됐소. 그들이 처음부터 우리 동료가 아님에도 호법원의 자리를 내어준 이유를 모두 아실 것이오. 우리는 그들을 이용해야 하오이다. 소림과 무당의 힘을.”
대호의 그것처럼 번득이는 명세기의 눈을 마주한 모두가 어금니에 힘을 줬다.
* * *
정오를 알리는 해가 뜨겁게 머리 위로 올라갈 무렵 전서구가 도착했다. 그것을 비격은 목계백에게 전했다. 맹주의 친서다. 무천당주인 허일관에게 가는 전서는 따로 있다. 하지만 목계백이 받는 것이 진짜 전서다.
“무림첩이라, 괜찮은 방법이군.”
끄덕이는 목계백을 향해 비격은 이미 읽은 내용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
“자칫 반발을 사지는 않을까? 남궁세가의 전례가 있으니까?”
“그럴 염려가 아주 없지는 않지. 하지만 항주무림맹의 위상은 이전과 달라.”
“이전과 다르다?”
“소림과 무당이 함께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강호무림이 적극 동조할 것이다?”
“당연히, 항주인근의 무림문파들은 기회로 여길지도 모르지. 항주무림맹에 들어오는 기회 말이야. 소림사와 무당파가 합세한 항주무림맹이다. 그러한 곳에 적을 둔다면 더없이 좋을 일이지. 이번 분쟁의 이유나 원인과 상관없이 승패만을 따질 것이야. 당연히 소림과 무당의 승리를 점치겠지.”
비격은 심각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겠군. 소림과 무당은 더 이상 작은 행보에 연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이야. 이런 일을 당했으니 당연하겠지. 무림의 거두인 두 문파가 합세한다면, 아무리 녹림이 방대하고 세가 많다고 해도 무리지.”
전서를 손바닥으로 비벼 없애버린 목계백은 다른 걸 물었다.
“산채 주변의 불은 다 진화한 건가?”
“다 했지. 잔불까지 다 잡았다. 녹음이 우거지는 시기라서 불이 제대로 번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지. 자칫 황산 안에서 불길에 갇힐 뻔 했어.”
“이 큰 산에서 그렇기야 했겠나. 빠져나갈 길이야 얼마든지 있지.”
“뭐,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서 우린 이산을 나가야 해.”
“뭐?”
눈썹을 홱 틀어 올린 비격에게 목계백은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 했다.
“도망친 산적들이 어디로 어떻게 도망갔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건 거꾸로 말하면 그들이 어디로 어떻게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말이 되지. 우린 이 산채에서 편이 잠들어선 안 돼. 녹림도들이 소리 없이 다가와 칼을 들이밀 테니까.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지. 여기 뭐가 있다고 그래야 하나?”
너무나 당연하게 말하는 목계백을 비격은 눈을 껌벅이며 바라봤다.
“그러니까…… 비급도 어차피 되찾았고, 이 산채에 놈들이 남긴 재물을 가지고 돌아가자? 그러면 놈들이 쫓아올 것이다. 항주에서. 우리가 유리한 곳에서 놈들을 맞자? 놈들에게 안마당과 같은 산속이 아닌 곳에서?”
“갈수록 머리가 좋아지는 구나.”
비격에게 미소를 던지며 목계백은 이후 행동을 지시했다.
“맹주에게 이 상황과 계획을 알려. 맹주의 지시인 것으로 밀고 나갈 테니 준비하라고 해.”
바로 돌아선 목계백은 원율도장과 광인대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남궁세가의 비급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원율도장은 목계백의 방문을 받고 눈동자에 힘을 줬다.
“하고자 하는 말이 있다고?”
목계백은 정중하게 목례하며 입을 열었다.
“맹주의 전서가 도착하였습니다. 이후의 행동과 계획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결론은 산채를 버리고 회맹 하는 것입니다.”
원율도장의 흰 눈썹이 늘어진 미간이 꿈틀 솟았다.
“회맹? 항주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허, 이러한 희생을 치르고 점령한 이곳을 버리고 그냥 돌아간다? 왜?”
“맹주께서는 당연히 원율도장과 광인대사께서도 두루 살피고 인지하신 내용일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하지만 입장이 다르고 형세를 보는 눈이 다른 강호의 어르신들인지라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항주의 현실을 생각해 주십사 하고 간청 드린다 하셨습니다.”
“항주의 형세를 생각해 달라?”
“두 분 어르신이 인지하고 계실 것이 분명한 것처럼, 우리는 이 산의 형세를 모릅니다. 도망친 산적들은 골골이 숨어 산을 타고 도주했습니다. 그들만이 아는 길이고 익숙한 행보입니다. 그 길을 통해 녹림본산의 병력이 들이친다면 피해가 막심할 것입니다. 소림과 무당의 본산지원이 먼저 당도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를 것이지만, 녹림의 공격이 먼저 들이친다면 항주무림맹의 현재 병력으로는 대응키 힘든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아 정강산의 거리를 따져보면 녹림이 먼저 올 가능성이 큽니다.”
원율도장은 그 순간 침상에 누운 광인대사의 가라앉는 불호소리를 들었다. 희망이 없는 자의 숨소리, 그러한 마음으로 현실을 다시 보는 비탄.
‘우리를 추켜세우며 할 말을 다 하고 있구나. 괘씸한…… 하지만 맞는 말이다. 복잡한 심사에 휘말려 냉철히 보지 못한 점들이다. 이 산채에 있는 것은 백번 불리하고 열 번 유리할 뿐이다. 여길 벗어남이 옳은 결정이다.’
원율도장은 들릴 듯 말 듯 도호를 흘려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항주무림맹의 정확한 의중은 무엇인가? 지금 들은 바를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책도 없이 물러남이 능사는 아닌 것. 산을 버리고 성난 녹림의 늑대무리들을 항주로 끌어들이자는 것인가? 그러하자면 그만한 대비가 있어야 할 것인데? 소림과 본산의 지원을 기다리자는 것인가?”
목계백은 지당한 말씀이라는 표정을 얼굴에 품고 대답했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과 무당에서 고수들이 대거 출병한다면 그 누가 대적하리까? 녹림십팔채의 모든 병력을 다 모아온다 한들, 추풍낙엽으로 분쇄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대사를 소림과 무당에게만 맡기고 의지함은 도리도 아닐뿐더러 책임을 방기하는 것, 항주무림맹은 무림첩을 내고자 합니다.”
원율도장은 눈썹을 뒤틀어 올리며 되물었다.
“무림첩?”
침상의 광인대사는 다시 불호를 허공에 터트렸다.
“그러합니다. 항주무림맹의 이름으로 녹림의 불의와 악행을 응징하고자 하는 대의를 호소할 작정입니다. 남궁세가의 일로 일부 염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항주무림맹이 어떠한 일을 해냈고 소림과 무당이라는 큰 이름이 함께하는, 강호의 대사이며 대의를 좇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음입니다. 틀림없이 호응이 있을 것이라 걸 의심치 않습니다.”
원율도장은 틀어 올렸던 눈썹을 내려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심중의 표정은 평시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눈앞의 목계백이란 자를 보고 있자니, 저자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원인을 알 수 없는 울화가 치밀었다.
손목이 잘린 것도 저자 때문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게 확신이 없는 심증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 심증이라는 것도 실상 윤곽이 없다. 그냥 모호한 의심뿐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이번일, 소림과 무당이 본산의 전력을 동원해 나선다면, 거기에 강호 제 문파들이 합세한다면, 녹림은 그 이름을 무림에서 지울 수도 있다. 결과가 그렇게 나온다면 항주무림맹은 강호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될 것이야.’
알 수 없는 불안과 예감에 거칠어지는 호흡을 다스리고 원율은 말했다.
“항주무림맹의 의견을 좇도록 하지.”
목계백은 정말로 감사한 자의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깊으신 생각들을 물리시고 동의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속히 말과 들것을 준비해 광인대사를 항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광인대사의 가라앉은 불호소리가 다시 실내를 울렸다.
기실 의원들이 올 것이 아니라 항주로 가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인 까닭이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자면 그리해야 한다. 그러한 생각도 원율도장의 결정에 낀 것이다.
“물러가 즉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등 돌려 나가는 목계백을 원율도장은 말없이 바라봤다.
“그게 무슨 소린가?”
무천당주 허일관은 눈을 치켜뜨고 반문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맹주의 전서를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철수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황당하다.
“정말로 맹주가 그렇게 명하셨단 말인가? 내가 받은 전서에는 그러한 내용이 전혀 없었는데? 점령한 산채의 상황을 엄밀히 경계하라는 내용 외엔……”
거기까지 말한 허일관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사람을 이렇게 허수아비로 만들다니!’
이제 알았다. 무천당주의 자리를 맡긴 자신에겐 아무 내용이 없는 전서를 전한 것이고, 실제 지시는 목계백에게 내린 것이다.
자신은 바보가 된 것이다. 허수아비다.
이름만 무천당주지 실제 권력은 목계백이 행사한다. 이게 지금 그 증거다.
맹주 명세기는 목계백에게 후속 지시를 했다. 그걸 목계백은 광인대사와 원율도장에게 말했고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허일관과 한규와 관창은 진실을 모른다. 이건 목계백의 생각이라는 걸.
“힘들게 점령한 산채를 버리고 항주로 회군하자는 이유가 뭔가?”
호흡을 다스리면 분노를 숨기는 허일관, 그의 눈을 직시하고 목계백은 답했다.
“여길 지키는 것보다 돌아가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유리하다?”
“무엇이?”
공격하듯 입을 여는 한규와 관창에게 시선을 돌린 목계백은 이야기 했다. 원율도장과 광인대사에게 했던 말들, 비격과 의견을 나눴던 회군의 배경.
이야기가 다 끝나자 허일관과 한규와 관창은 무거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반박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목계백의 말대로 여긴 사지나 다름없다.
“음, 맹의 뜻과 결정이 그러하다면 따라야겠지.”
허일관이 못이기는 척 수락하자 한규와 관창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 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드러났다.
“흑호단에게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고개 숙여 보이고 목계백이 돌아서자 허일관이 시린 눈빛으로 그 등을 응시했다. 거리가 멀어져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즈음이 되자 입을 열었다.
“맹호, 저놈이 우리 상전인 셈이오.”
한규와 관창도 칼날을 품은 눈으로 목계백을 보며 한마디씩 했다.
“이래서야 항주무림맹에서 우리의 입지가 확보되질 않겠소이다.”
“저 자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 사람의 눈에는 그 광경이 보였다.
흑호단에게 지시하는 목계백과 그 지시를 받으며 눈을 반짝이는 흑호단 무사들이다. 그중에는 허일관과 한규와 관창의 문파출신 무사들도 있었다.
그걸 보자 눈에서 불이 튀었다.
허일관이 이를 물며 목소릴 냈다.
“분명하고 확실한 방법이 있어야하겠습니다. 항주무림맹의 주축이 된 대동보의 세력들이 더욱 공고해 지기 전에 우리 기반을 다져야 합니다.”
한규가 이어 입을 열었다.
“그러기 위해선 맹호 저놈을 저대로 둬선 안 됩니다.”
관창도 살기어린 목소리로 동의했다.
“맞습니다. 저 자는 맹주 명세기의 실질적인 전력, 저자를 제거해야 합니다.”
세 사람은 시선을 맞췄다. 음모의 눈길이다.
그 얼굴들에 햇빛이 내리쳤다.
세 사람의 모습을 비추는 빛, 그 해는 서쪽으로 열심히 내달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