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94
23. 위기(危機).
1.
비상을 알리는 종이 미친 듯이 울었다. 밤이 없는 도시 항주의 심야를 난타하는 종소리다. 그 소리에 맞춰 항주무림맹의 수뇌부는 객잔에 모였다.
참혹하게 살해당한 원율도장의 모습은 보는 자들의 가슴을 얼려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연거푸……”
충격을 넘어 허탈함을 드러내는 무천당주 허일관의 옆에는 언제나 그렇듯 한규와 관창이 함께였다.
두 사람의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원율도장과 세 사람의 무당이십팔검이 혈뢰인에 격살당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성난 대호 같은 눈으로 시신을 응시하던 명세기는 비격에게 주변 상황을 물었다.
“기찰과 차단은 제대로 이뤄지는 있는 것이냐?”
그 어느 때 보다도 무거운 눈동자로 비격은 대답했다.
“흉수가 이동할만한 예상 도주로와 각 통행로를 비롯한 취약지역에 적호단과 흑호단이 투입되어 기찰하고 있습니다. 흉수와 접촉하게 되는 경우 대적치 말고, 호각으로 신호를 보내 바로 조응하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무당도사들은?”
“이곳에서 도주한 흉수의 뒤를 쫓아간 걸로 압니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다시 훑어본 명세기는 차갑게 또 물었다.
“이 자리에 없는 자들이 누구누구인지, 그들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뭘 했는지 파악해라.”
“알겠습니다.”
비격은 고개 숙인 후 바로 돌아서 사라졌다.
그가 객잔 앞에서 사라지는 동안 모여 있던 인사들은 서로 시선을 맞추며 눈빛들을 교환했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뻔하기 때문이다.
수뇌부중엔 집법당주 위홍과 직급 없는 지휘자인 맹호 목계백이다.
그 밖의 사람들이야 신경 쓸 것이 실상 없다.
그런데 맹주 명세기가 저렇게 명을 내린 건 다분히 의도적이다.
맹호야 자기사람이고 위홍을 특정한 거다.
재수 없는 놈이 돌 맞는 다고 이런 때에 안 보이는 위홍의 잘못이다.
명세기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하나 훑었다.
‘이중에 있을 수도 있어.’
은발야와 오세명과 호일도, 허일관과 한규와 관창, 용인성과 그 아우용태성, 그리고 주변에 흩어져 있는 안휘검문을 비롯한 구성문파들의 인물들.
특히 안휘검문 출신들은 의심스럽다.
조두량은 지근거리에서 면식자에게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평소에 알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자다.
‘물론 칠절신편 위홍도 그런 자이겠지만……’
보이지 않는 위홍에 대한 의혹을 더욱 키우던 명세기는 허공의 바람소리를 들었다.
‘저들이 돌아왔구나. 허탕을 친 게야.’
도복자락 날리는 소릴 내며 객잔 앞 미루나무를 징검다리처럼 밟고 내려오는 자들, 무당이십팔검이다.
그런데 아홉 명뿐이다.
여기서 셋이 죽었으니 열둘이어야 하지 않나?
보이지 않는 셋은 어디서 무얼 하는 건가?
새처럼 표홀한 신법으로 나타나 다가온 태원자가 원율도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숙!”
격한 목소리를 터트린 태원자의 옆으로 남은 무당이십팔검들이 같이 무릎을 꿇었다.
“사숙!”
“크흐흑!”
오열을 토하는 무당이십팔검, 그들을 보는 항주무림맹의 인사들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안타까움에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그뿐, 이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어설픈 위로의 말도 가당찮다.
명세기가 아주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무엇이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태원자가 벌떡 일어서더니 무서운 안광을 뿜었다.
“잡아야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을 잡아야 합니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현재……”
“집법당주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흉수를 목격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사실에 명세기는 미간을 확 좁혔다.
“집법당주가 흉수를 목격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포구로 가는 길에서 흉수의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고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 사제들 셋이 있었습니다. 맹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 객잔에 흉수가 나타났다는 신호를 받고 그 자리를 떴다고 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하는 태원자의 눈에는 원한과 분노의 불덩이가 이글거렸다.
격정을 다스리고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악문 이로 인해 뺨에는 주름이 졌다.
시선을 돌리는 다른 도사들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미간을 가득 좁힌 명세기에게 모금량이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맹주, 집법당주께서 피살당하셨습니다.”
명세기는 물론 태원자를 비롯한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 * *
장주련은 시침을 마치고 물러나 목계백의 변화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봤다.
의원노릇을 이십년이 넘게 했지만 저런 모습은 처음 보기 때문이다. 고슴도치처럼 꽂아 넣은 침의 끝으로 검은 연기 같은 게 피어나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목계백의 체 내에 있는 탁기나 독기가 분명했다.
목계백은 제 스스로 치료하고 있는 것이다.
시침할 혈자리를 명확하게 불러줬다. 그 결과가 저것이다.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장주련의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시선 속에서 목계백은 차분하게 운기를 했다.
용악대연무의 가르침과 오의를 마음속에 되새기고 좇으면서 호흡을 이어갔다.
몸 안에 침투한 혈뢰인의 사기(邪氣)는 조금씩 배출되고 있었다.
‘지독하구나. 이것이 소뢰음사에 근본을 둔 무공인가?’
운기를 하며 목계백은 새삼 한기를 씹었다.
혈뢰인을 맞고 그 순간 바로 조치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앉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두이가 만들어준 흉갑, 찰갑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역시 북천일해비혈술로 혈도를 바로 차단한 것이 주효했다.
이대로 순조롭게 혈뢰인의 힘을 배출한다면……
‘욱.’
갑자기 가슴 속에서 치미는 격통에 목계백은 이를 악물었다.
완전히 억제하고 배출하던 혈뢰인의 사기가 느닷없이 준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혈도를 다 봉쇄해 확산은 없을 것이지만, 울혈이 다시 고이고 있었다.
부르르 전신을 떤 목계백은 뿜어내듯이 울혈을 입으로 분출했다.
“헛! 이보게! 괜찮은 건가?”
당황한 장주련이 면포를 들고 다가서자 목계백은 눈을 뜨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죽은피를 뱉어낸 겁니다.”
“그, 그러한가?”
엉거주춤 장주련이 물러나던 순간, 의방을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온 자가 있었다. 목계백을 보고 당황한 얼굴로 달려온 그는 비격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목계백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장주련에게 담담히 말했다.
“침을 거둬주십시오.”
손에 잡았던 면포를 옆으로 휙 던진 장주련은 바로 목계백에게 붙어 침을 뽑았다.
고슴도치 같았던 모습이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안색은 창백했다. 그게 너무나 확연해서 비격은 목계백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다 눈을 치떴다.
“혈뢰인!”
너무나 선명한 붉은 번개의 문양, 그것이 목계백의 가슴에 있었다. 저게 그냥 생겼을 리가 없고, 지금 목계백의 상태를 보건대 답은 하나다.
“흉수와 대적했구나!”
창백한 얼굴로 엷은 미소를 지은 목계백은 되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아냈나?”
미간을 가득 찌푸리고 다른 곳은 성한지 목계백을 살피던 비격은 툭 대답했다.
“널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의방 앞에서 나귀를 봤지. 특이하게 생긴 그 놈 말이다. 네가 온주에 처음 나타났을 때, 대동보에 끌고 왔던 그놈이더라.”
“흑풍을 봤구나.”
“그놈 이름이 흑풍이냐? 비루먹은 꼴을 한 놈이 다가가서 만지려고 하니까 지랄을 하던데?”
“봉변 안 당한게 다행이다.”
“봉변?”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던 비격은 다시 현실에 몰입했다.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만, 객잔에선 살변이 났다. 원율도장과 그의 곁을 지키던 무당이십팔검의 삼인이 살해됐다. 혈뢰인을 쓰는 그놈의 짓이야.”
예상했던 일이지만 목계백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흉수는 위홍과 조응하며 무당이십팔검을 유인해서 해치운 것이다.
그 자리에 목계백이 있었다는 것이 위홍에게는 불행이었지만, 다른 흉수는 객잔으로 달려가 원율도장과 다른 삼인의 무당이십팔검을 죽인 거다.
흉수는 하나가 아니다.
이를 악물었던 목계백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비격에게 말했다.
“흉수는 하나가 아니야. 위홍도 혈뢰인을 사용했다.”
“뭐?”
놀라는 비격에게 목계백은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를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비격은 충격과 황당함으로 눈자위를 떨다가 바로 일어섰다.
“맹주에게 보고하고 오겠다!”
* * *
포구로 이어지는 우마차길에 횃불이 대낮처럼 밝혀졌다.
그 현장을 샅샅이 살피던 명세기는 집법당주인 칠절신편 위홍의 시신 앞에서 가라앉은 숨을 내쉬었다.
팔이 잘라졌고 허리가 잘라진 두 동강의 시신이다.
‘누가 이렇게 했나?’
알 수 없지만 짐작도 없는 건 아니다. 이 자리에 목계백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지금 제 사제들 셋의 시신 앞에 모여 있는 무당이십팔검중 삼인과 같이 이곳에 왔다고 했다. 죽은 자들은 위홍을 감시하며 뒤따르던 중이었고, 호각소리를 듣고 다른 삼인과 목계백이 여기로 달려왔다는 거다.
‘저들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위홍도 공격을 받아 쓰러진 상태였고, 객잔에서 호각소리가 울려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는 건데…… 목계백은 여기에 남아 있었고. 당연히 위홍의 상세를 살피려 했겠지. 그런데……’
그런데 목계백은 없고 위홍은 동강난 시체로 발견됐다.
이건 뭔가?
‘목계백이야. 그 놈이 위홍을 이렇게 죽였어. 하지만 왜?’
의혹 가득한 시선을 들던 명세기는 무당도사들의 수장이 된 태원자와 눈이 마주쳤다.
제 사제들과 작은 소리로 말하던 그가 바로 다가왔다.
“맹호의 소재를 찾았습니까?”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가 이 현장의 상황을 말해줄 유일한 사람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혹 맹호를 의심하고 있는 겁니까?”
태원자는 내천자를 그린 미간으로 말했다.
“현 상황에서 누구를 의심하고 의심하지 않고는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주께서도 아시다시피 누구도 의심스럽지 않은 이가 없는 지경입니다.”
“누구도 의심스럽지 않은 이가 없는 상황이라……”
“하지만 사제들이 이곳으로 달려오는 도중에 맹호가 같이 합류해 있었다는 것, 그 순간에 객잔에 흉수가 나타났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요.”
그래서 그게 의심한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태원자는 모호한 눈빛을 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속을 헤집는 것 같아서 명세기는 자연스럽게 돌아섰다.
“집법당주의 사인은 명백한 도격입니다. 이러한 솜씨를 가진 자라면……”
“맹호지요.”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 하니까요. 하지만 그가 왜 위홍을 이렇게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이 되질 않는 군요.”
“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과 다른 모든 이들의 시선이 위홍의 동강난 시신에 박힐 때였다.
“맹주!”
비격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그가 뱉어내는 말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목계백이 지금 항주의방에 있습니다. 혈뢰인에 맞았습니다. 위홍이 흉수 중의 한명이었다고 합니다.”
명세기와 태원자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눈을 부릅떴다.
* * *
창백하게 변한 안색으로 침상에 앉은 목계백은 자신 앞에 좁혀 앉은 인사들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맹주 명세기와 이젠 무당이십팔검의 수좌가 된 태원자, 그의 사제들 구인과 맹의 다른 핵심인사들, 모두가 눈을 빛냈다.
그들이 시선을 박는 곳은 목계백의 가슴이었다.
붉은번개문양이 있는.
사발의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목계백은 이야기 했다.
“등 뒤에서 공격을 했습니다. 돌아서며 반격을 했지만 혈뢰인을 피할 순 없었습니다. 위홍도 제가 그렇게 반격하리라곤 생각지 못했었는지, 팔을 잘리고 말았습니다. 그 틈을 이용해 혈도를 폐쇄하고 그를 죽였습니다.”
침 삼키는 소리만 들리는 의방 안 인물들의 시선을 가슴으로 집중시키며 목계백은 말을 이었다.
“혈뢰인을 맞고도 이렇게 목숨을 부지 한건 천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가격당하지 않은 이유도 있을 터이고, 몸에 착용했던 흉갑의 덕을 톡톡히 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시 운신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아무도 그 말을 의심치 않았다. 목계백의 가슴엔 선명하게 혈뢰인의 표식이 남아있다.
창백한 저 얼굴은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혈뢰인을 맞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말 그대로 천행이다.
게다가 그 와중에 정체를 숨기고 있던 위홍을 죽였다.
과연 맹호다운 일이라고 할 것이다.
심각하고 무거운 숨소리들 속으로 목계백은 현실을 아프게 지적했다.
“혈뢰인을 사용하는 적은 하나가 아닙니다. 이제 확인한 자만 둘입니다. 그렇다면 셋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이 누군지 밝혀내야 합니다.”
의방 안의 촛불은 귀신이 들린 것처럼 부르르 떨어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