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48
448화. 오늘 이 자리에서 (2)
“내려와라.”
내공이 담긴 것도, 기세를 일으킨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낮고 잔잔한 목소리.
“……!”
그러나 그 한마디가 귀령왕을 짓눌렀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공기.
항거하기 어려운 권위가 담긴 명령에, 귀령왕은 저도 모르게 가마에서 내려갈 뻔했다.
“큭…….”
간신히 발을 멈춘 귀령왕.
옥가면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그는 모산파의 주인이었다.
대대로 모산파에 내려오는 특수한 무공과 술법을 익혔으며, 문주가 된 이후로는 그 누구도 올려다본 적이 없었다.
“지금 내게 명령하는 것인가?”
귀령왕의 두 눈에 새파란 귀기가 맺혔다.
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면 십존과도 능히 일전을 벌일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리고 오늘, 귀령왕은 만전에 가까운 태세로 회합에 임했다.
한데 처음 본 흑사련주의 명령에 순순히 따른다?
오만하기로는 첫손에 꼽히는 사파의 종주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싫다면?”
귀령왕의 몸에서 안개 같은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와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마를 떠받치고 있는 강시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르륵…….
그르륵…….
철가면으로 가려진 강시들의 입에서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시커멓게 물든 손가락 끝이 움찔거렸다.
‘흑사련주와 귀령왕의 대결이라…….’
‘잘하면 오늘 두 괴물의 실력을 구경할 수 있겠군.’
‘양패구상으로 둘 다 반병신이 되면 그림이 가장 좋을 텐데.’
지켜보고 있던 사파의 종주들도 내공을 끌어올리며 대비했다. 언제 살육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천하의 마종(魔宗)들이 모이는 자리.
모두 충돌을 예상했고,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을 데려왔다.
‘그래도 설마, 회합을 시작도 하기 전에 충돌이 생길 줄이야.’
백수룡은 긴장한 채 귀령왕과 흑사련주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벌써부터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여차하면 개입할 생각이었다.
그때, 흑사련주가 미간을 살짝 모으며 말했다.
“내려오라는 말이 이해하기 어렵나?”
“……십 년간 폐관했다더니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모양이군. 본좌는 분명 싫다고 말했다.”
흑사련주는 십존이자 삼흉의 일인이지만, 귀령왕 또한 십대악인의 일인이었다. 게다가 그의 무공이나 술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모산파는 그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신비문파였다. 하지만 그들이 부리는 강시와 부적술, 괴이한 술법은 오래전부터 무림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흑사련주가 아무리 절세고수라고 해도, 무공뿐만 아니라 술법까지 부리는 귀령왕은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귀령왕이 예상외로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다음이 중요하겠군.’
‘흑사련주가 기선 제압을 하려다가 실패한 셈인데. 과연 순순히 물러날까? 아니면 칼을 뽑을까?’
모두 긴장을 놓치 않고 그들을 주시했다.
흑사련주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이번 회합의 향방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런가.”
흑사련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발밑에서 시작된 기파가 나선으로 번지며 바닥에 선명한 자국을 만들어 냈다.
콰콰콰콰콰-!
흑사련주 주변의 돌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허공섭물의 경지. 주먹만 한 자갈부터 사람 얼굴만 한 큰 돌까지 그 개수만 수십 개였다.
그 어마어마한 공력의 발산에, 사파 종주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몇몇은 호신강기를 두르며 공격에 대비했다.
“귀령왕. 귀신을 부리는 술법 무공의 대가라고 들었다.”
흑사련주의 목소리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세상 그 무엇이 저 사내를 동요시킬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잔잔한 목소리.
“정녕 해보자는 것인가!”
반면, 그 기세를 마주하는 귀령왕에게선 무시무시한 살기와 귀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살기의 이면에는 두려움이 숨겨져 있음을, 적어도 백수룡은 느끼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흑사련에도 귀신이 하나 있지.”
흑사련주는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하듯이 피식 웃었다.
그와 동시에 일정한 궤적 없이 어지럽게 회오리치던 돌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파바바밧!
그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속도를 지닌 암기와 다름이 없었다. 일부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날아갔지만, 일부는 사파 세력들을 향해서 날아갔다.
“이런 미친!”
“흑사련주! 우리까지 공격할 셈인가!”
“무슨 짓이오!”
당황한 사파의 종주들이 앞으로 나서며 공격에 대비했다.
그들에게는 그리 위험한 공격은 아니었으나, 부하들이라면 충분히 죽거나 다칠 만한 공격이었다.
그 순간.
“궁귀(弓鬼).”
흑사련주의 나직한 부름에, 흑사련주의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여인이 활을 꺼내 쏘았다.
그 순간을 희미하게나마 본 자들은 사파의 종주들과 백수룡뿐이었다.
활에서 쏘아진 빛줄기에 수십 개의 돌멩이가 전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
멀리 날아가는 표적을 활을 쏘아서 떨어뜨리는 것은 웬만한 고수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하지만 궤적이 일정치 않은 암기를 쏘아서 떨어뜨리는 것은 절정고수도 쉽지 않다.
하물며 그 표적이 수십 개에, 찰나에 표적들을 전부 먼지로 만들어 버릴 만한 공력을 싣는 것은…….
천하에 그만한 실력을 갖춘 궁수는 오직 단 한 명뿐이었다.
“역시…….”
백수룡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녀를 보자마자 든 예상이 맞았다. 방금 흑사련주가 그녀를 부른 호칭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여자가 추혼궁귀였군.”
“……뭐라?”
“지금 누구라고 했느냐?!”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키가 큰 여인을 바라봤다.
추혼궁귀.
무림십존에 이름을 올린 절세고수이자 사파삼흉의 일원.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활의 고수가 흑사련주의 옆에 있었다.
그나마 빠르게 정신을 차린 녹의수사가 흑사련주에게 물었다.
“어째서…… 추혼궁귀가 함께 온 것이오?”
“본련에 식객으로 머물고 있다. 나와는 친우이기도 하지.”
“친우는 무슨. 한 번만 더 광대짓을 시키면 당신 머리통에 구멍을 낼 줄 알아.”
툴툴거린 추혼궁귀는 활을 다시 등에 멨다.
반신반의하던 다른 이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천하의 흑사련주의 머리에 구멍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여인이 추혼궁귀 말고 또 있지는 않을 테니까.
“정말 추혼궁귀란 말인가…….”
“미치겠군.”
자리에 있는 사파 종주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더 이상 귀령왕과의 싸움이 문제가 아니었다.
회합에 삼흉 중 둘이 나타났다.
그것도 같은 세력으로.
만약 싸움이 벌어진다면, 둘이서 이곳에 있는 전원을 몰살시키는 것도 가능하리라.
‘설령 흑사련주의 칼을 피해 도망칠 수 있다 해도, 등을 보인 순간 추혼궁귀의 화살이 틀어박히겠지.’
비슷한 그림을 떠올린 사파 종주들의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꿀꺽…….
또다시 침묵이 강요되었다.
간간히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가운데, 흑사련주는 말없이 귀령왕을 바라보았다.
“……내려가겠소.”
사실상 항복 선언이었다. 흑사련과 맞설 생각 자체를 버린 것이다.
그렇게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귀령왕은 모산파 밖에서 바닥에 발을 디뎠다.
조금 전까지 당당하던 모습이 무척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바닥에 내려서자 안 그래도 작은 체구가 더욱 작아 보였다.
“다들 앉지.”
더 이상의 갈등은 없었다.
흑사련주는 자연스럽게 회합을 주도했다.
사파의 종주들은 전날 악인곡이 준비한 자리에 얌전히 착석했다.
[사형. 상황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초조함이 느껴지는 녹의수사의 전음에, 백수룡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어.]지금 흑사련은 지나친 비대칭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악인곡, 녹림, 모산파가 힘을 모아도 상대하기 힘든 무력을 홀로 갖춘 것이다.
[다른 세력들이 숨겨 둔 전력을 다 끌어와도 쉽지 않을 겁니다.] [흑사련에서도 저 둘만 왔다는 보장이 없어. 거령채나 호문채처럼 산 아래에 정예를 대기시켜 놨을지도 모를 일이지.] [첩첩산중이군요. 십존 중 둘, 사형까지 셋이나 한자리에 모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녹의수사는 허탈한 표정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백수룡과 함께한다면 충분히 회합을 주도하리라 믿었다.
한데 추혼궁귀를 데리고 나타난 흑사련주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내주었으니, 회합의 흐름이 이제 어떻게 흘러갈지는 안갯속이 되었다.
[전부 이 사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흑사련을 조금 더 주시했어야 했는데…….] [흑사련이 이렇게까지 큰 변수가 될 거라곤 나도 예상 못 했어.]백수룡은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은 흑사련주를 조용히 관찰했다.
경지의 고절함을 떠나, 완성된 무인이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전해졌다.
꽤나 곤란해진 상황과는 별개였다. 백수룡은 무인으로서 그에게 감탄했다.
‘굳이 추혼궁귀를 데려올 필요도 없었겠군.’
백수룡은 흑사련주에게서 어떤 빈틈도 찾지 못했다. 직접 칼을 맞대지 않는 한,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회합을 시작하지.”
원래는 회합을 주최한 벽안귀가 앉아야 할 상석에 앉은 흑사련주가 입을 열자, 벽안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힐긋 흑사련주를 바라본 그가 조금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리에 참석해 주신 사파의 종주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오. 오늘의 이 회합은, 조만간 벌어질 정파무림과 혈교의 전쟁에 대해 우리의 입장을 결정하고자…….”
“내 입장을 먼저 말하지.”
벽안귀의 말을 끊은 흑사련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즉시 사파의 종주들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만약 흑사련주가 출수를 한다면, 일어나 있는 편이 조금이라도 반응하기 빠르기 때문이었다.
그만큼이나 모두가 흑사련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경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불편하게 했나 보군. 그냥 앉아서 이야기하지.”
피식 웃은 흑사련주가 다시 자리에 앉자, 사파의 종주들이 굳은 표정으로 하나씩 자리에 앉았다.
‘완전히 가지고 노는군.’
이대로 두면 회합은 흑사련주의 의도대로 흘러갈 것이다.
백수룡은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흑사련의 입장은…….”
“회합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흑사련주를 제외한 전부가 놀란 표정이었다.
감히 이 상황에서 흑사련주의 말을 끊다니?
대체 어떤 미친놈이란 말인가?
“염라채 소속 맹룡휘라 합니다.”
녹의수사의 앞으로 나선 백수룡이 포권을 취했다.
장걸과 구길은 백수룡의 정체를 알면서도 안절부절못했고, 녹의수사 또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나섰습니다.”
조용히 앉아 있던 추혼궁귀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용감한 녀석이네.”
흑사련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백수룡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도객이로군.”
“예?”
그의 시선은 백수룡의 허리춤에 찬 유엽도를 향하고 있었다.
“몸이 아주 잘 단련됐어. 어떤 도법을 쓰나?”
“…….”
자신의 몸을 살피며 흥미로워하는 흑사련주의 눈빛에, 백수룡은 이 무인의 본질을 어느 정도는 깨달았다.
‘무공광이로군.’
찰나에 백수룡의 눈이 빛났다.
그는 의외로 이런 정보가 상대의 호감을 살 때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생 도법에 미쳐 사셨던 스승에게 일인전승의 도법을 전수받았습니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천하제일도라 불리는 분에게 스승께서 창안하신 도법으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일인전승이라…….”
나쁘지 않은 대답인 듯했다.
그 어떤 말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던 흑사련주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나마 올라간 것을 보면.
“발언을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포권을 취한 백수룡은 자리에 모인 사파의 종주들을 둘러봤다.
“이 자리에 사파를 대표하는 네 세력이 모였습니다. 녹림, 흑사련, 모산파, 악인곡이지요.”
다 아는 얘기에 사파의 종주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더 이상 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헌데 녹림의 우두머리만 셋이나 됩니다. 아시다시피 사이가 그리 좋지도 않습니다. 서로 반목할 것이 뻔한데, 함께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콰앙!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거령채주가 당장이라도 백수룡을 때려죽일 것처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래서 네놈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오늘 이 자리에서.”
백수룡은 거령채주, 그리고 그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호문채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녹림을 대표할 단 한 명의 녹림맹주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