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60
460화. 불길한 징조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축융봉 정상 곳곳에는 수십 년 만에 녹림맹주를 맞이한 산적들이 밤새도록 잔치를 벌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드르렁 코를 고는 사내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조금씩 몰래 챙겨온 술마저 전부 동났는지, 독한 주향이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흘렀다. 한쪽에서는 은호가 대호의 품속에서 갸르릉거리며 자고 있었다.
“……난장판이로군.”
천막에서 나온 녹의수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함께 밖으로 나온 장걸과 구길, 그리고 채주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들아! 당장 일어나지 못해!”
“채주님들끼리 회의하는 동안 지들끼리만 퍼마셔?”
“녹림이 아주 거꾸로 돌아가지?”
채주들은 축융봉을 돌아다니며 자기 소속 산적들을 발로 걷어차 깨웠다.
속 편한 부하들이야 밤새 잔치를 열고 먹고 마셨지만, 녹의수사와 칠십이채의 채주들은 그럴 수 없었다.
녹의수사는 원래 거령채와 호문채 산하에 있던 채주들과 인사를 나누고, 녹림의 미래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몇 날 며칠로도 시간이 부족했지만, 일단 중요한 이야기는 일단락된 것이 조금 전이었다.
“맹주님.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언제든지 불러만 주십시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지지하기로 결정해 준 녹림의 채주들.
녹의수사는 인자하게 웃으며 그들을 배웅했다.
“다들 조심해서 가게. 내 염라채로 돌아가는 즉시 모두에게 연통하도록 하지.”
“……우리 맹주님은 다 좋은데, 아무리 봐도 산적 같지는 않단 말이지.”
채주들 중 누군가가 던진 농담에,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그렇게 녹림의 채주들이 부하들을 수습해서 떠난 후에야, 녹의수사는 비로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뒷짐을 진 그가 형산의 신비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군.”
일평생 꿈꾸던 위치에 서게 되었다.
녹림맹주.
과거 녹림을 하나로 통일했던 녹림투왕의 뒤를 이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함과 동시에, 잘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제 뜻을 부끄럽지 않게 펼쳐 보이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스승님.”
과거에는 감히 녹림투왕 맹호악을 스승이라 부르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백수룡을 통해 온전한 맹호투를 전수받게 된 이후로, 녹의수사는 자신이 녹림투왕의 적법한 계승자임을 당당하게 천명할 수 있었다.
“……간혹 제가 흔들릴 때면, 사형께 여러 조언을 구하겠습니다.”
그 순간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녹의수사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마치 커다란 손길이 거칠게 쓸어 주는 듯해, 녹의수사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곤 돌아섰다.
하루 미뤄진 사파 회합이 곧 다시 시작될 터였다.
녹의수사는 녹림을 배려해 준 사파의 종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그들에게 녹림의 뜻을 관철할 생각이었다.
마침 아래에서 올라오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녹의수사가 활짝 웃으며 빠르게 상대에게 걸어갔다.
“사형. 밤새 별일 없으셨습니까? 채주들과 할 이야기가 많아, 미처 잠자리도 살펴 드리지 못했습니다.”
“음. 별일 없었어.”
백수룡은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녹의수사는 그 말을 순순히 믿을 만큼 무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백수룡의 안색을 살핀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난밤에 산 아래에서 기파가 충돌하는 것을 느끼긴 했습니다. 설마 사형께 무슨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혹시 관련된 일입니까?”
“사실은…….”
굳이 숨길 일도 아니었기에, 백수룡은 흑사련주과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사정을 알게 된 녹의수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쩐지 어젯밤에 추혼궁귀가 천막에 찾아와선 서슬 퍼렇게 눈을 뜨고 경고를 하더라니…….”
“……추혼궁귀가? 뭐라고 했는데?”
“산 아래로 내려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멋대로 움직이면 등에 화살을 박아 줄 거라면서요.”
“그쪽도 성깔이 대단하네.”
백수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난밤에 흑사련주와 그렇게 칼부림을 했는데도 왜 아무도 내려와 보지 않나 의아했는데, 추혼궁귀가 중간에서 막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흑사련주와 추혼궁귀 외에는 백수룡의 무공을 제대로 본 자가 없었다.
‘내 정체에 대해서는…… 아마 말하지 않겠지.’
흑사련주의 성정을 생각하면, 회합에서 맹룡휘의 정체를 밝힐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회합에 참여한 인물 중 귀령왕 외에는 다 알고 있는 터라, 이제 와서 말한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백수룡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종주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곧 하나둘 나타나겠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벽안귀가 악인곡의 수하들과 함께 축융봉으로 올라왔다.
간밤의 소동을 알고 있었는지, 벽안귀는 백수룡을 보자마자 전음을 보냈다.
[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커다란 기파의 충돌이 느껴지던데?] [별일 아니야. 흑사련주랑 좀 싸웠어.] [……그게 별일 아니라고?] [회합이 끝나면 그때 자세히 얘기하지.]백수룡이 자세히 말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자, 벽안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로 나타난 것은 귀령왕이었다.
이번에도 가마를 타고 나타난 귀령왕은, 회합 장소로 바로 오지 않고 멀리서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를 찾는 듯한 그 모습에, 벽안귀가 혀를 차더니 말했다.
“나 같으면 흑사련주가 오기 전에 먼저 가마에서 내려오겠소. 제 발로 내려오는 것이 그나마 모양새가 보기 좋을 테니까.”
“……건방진 애송이. 본좌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귀령왕은 순순히 가마에서 내려왔다. 가마를 내려놓은 강시들이 좌우에서 주인을 호위했다.
귀령왕 역시 지난밤에 맹룡휘와 모종의 계약을 한 터라, 오자마자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간밤에 내가 돌아간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별일 아니오. 찌뿌드드해서 달밤에 몸이나 좀 풀었지.] [흐음…….]귀령왕에게 자세히 설명해 줄 의리는 없었다.
애매한 대답에 귀령왕은 못마땅한 듯했으나, 이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흑사련주와 추혼궁귀가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다 모였군.”
흑사련주는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지난밤에 귀신처럼 도를 휘두르며 날뛰던 사내라는 것을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점잖은 모습이었다.
백수룡과 잠시 눈이 마주치자 슬쩍 웃은 흑사련주가 말했다.
“회합을 시작하지.”
길게 끌 이유가 없다는 듯, 자리에 앉자마자 흑사련주는 본론을 꺼냈다.
“동맹을 맺고 혈교를 치는 것에 반대하는 자가 있나?”
““…….””
자리에 모인 사파의 종주들 중,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사파 연맹의 결성.
큰 틀에서는 빠르게 동의와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세부적인 사항에서는 각각의 세력들이 원하는 것이 달라 깊은 논의가 필요했다.
모산파는 혈교의 전리품을,
악인곡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악인곡에 숨어야 했던 무인들의 명예 회복을, 녹림과 흑사련은 복수를 원했다.
“무림맹과 동맹을 맺자는 말이냐?”
“같은 적을 상대하는데 응당 그래야지.”
“헛소리. 정파의 위선자들은 결코 믿을 수 없다.”
“그럼 우리끼리 혈교를 상대하자는 말인가?”
“무림맹과 혈교가 먼저 붙으면, 그 뒤를 치는 전략을 쓴다.”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소리지. 자칫하면 둘 모두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소.”
“아군의 시체는 어쩔 셈이지? 본파에 넘겨준다면 즉시 전력으로…….”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차라리 무공을 겨루었다면 금방 결과가 나왔겠지만, 이런 협상에서 사파의 종주들은 한 치도 물러섬이 없었다.
“…….”
그 과정에는 백수룡은 나서지 않고 조용히 회의를 지켜보았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종종 멍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결국 녹의수사가 걱정이 담긴 전음을 보냈다.
[사형. 회의는 저에게 맡기시고 바람이라도 쐬고 오십시오.] [……음. 부탁 좀 할게.]백수룡은 회합장에서 나왔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심란해 좀처럼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후우…….”
봉우리 아래 펼쳐진 형산의 절경을 바라보며, 백수룡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다시 녹림맹을 결성한 것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다시 사도를 만나면 어쩔 거요?
-죽든가, 죽이든가. 둘 중 하나겠지.
옛 제자들과 다시 만날 날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새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해져 있었다.
“이런 곳에 있었나?”
익숙한 기척에 백수룡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하필이면 지금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던 것이다.
흑사련주가 백수룡의 옆에 나란히 서며 함께 절경을 바라봤다.
“역시 바깥이 훨씬 낫군.”
“……왜 벌써 나왔소? 회의가 끝났을 것 같진 않은데.”
“쫓겨났다. 칼밖에 휘두를 줄 모르는 바보는 나가 있으라더군. 방해만 된다면서.”
누가 그런 말을 했을지는 뻔했다.
추혼궁귀 외에 흑사련주를 모욕하고도 멀쩡할 수 있는 자는 그곳에 없을 테니까.
“궁귀가 늘 고생이 많아.”
흑사련주는 도집에서 적월을 꺼내 깨끗한 천으로 닦기 시작했다.
그 손길 하나하나가 고수의 초식처럼 섬세하고 정성스러웠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수룡은 문득 궁금증이 생겨서 물었다.
“추혼궁귀와는 언제부터 친우였소? 무림의 소문으로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
얼핏 둘의 대화를 듣기로는 알고 지낸 세월이 이십 년도 넘는 듯했다.
흑사련주의 나이가 아직 오십이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으니,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알고 지낸 친우라는 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일까 싶었는데, 흑사련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궁귀는 원래 흑사련 소속이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그렇겠지. 본련에서 명성을 날리기 전에 도망쳤으니.”
“……?”
흑사련주는 천을 집어넣고 도신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적월의 검붉은 표면에 무심한 사내의 얼굴이 투명하게 비쳤다.
“궁귀의 스승은 질투가 심한 자였다. 자신보다 훨씬 재능이 뛰어난 제자를 얼마나 시기했는지, 괴롭힘이 점점 심해지더니 결국에는 죽이려고 들었지. 다행히 먼저 눈치를 챈 궁귀가 스승에게서 도망쳤다.”
“도망치는 걸 당신이 도와준 모양이군.”
흑사련주는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건 백수룡이 자신이 궁귀를 도왔다는 사실을 맞춰서가 아니었다.
“놀라지 않는군. 스승이 제자를 죽이려고 했다는데.”
그 순간, 백수룡은 이를 꽉 악물며 애써 태연한 척 대꾸했다.
“……사파에서는 제법 흔한 일 아니오?”
“흔하지는 않지만, 간혹 있지. 반대의 경우도 있고. 결국 그 스승이었던 자는 궁귀에게 죽었다.”
“…….”
“추혼궁귀가 십존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하지만 궁귀는 오랫동안 흑사련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지. 나와는 종종 밖에서 만났지만, 련으로 완전히 돌아온 것은 불과 몇 달도 되지 않았지.”
“……죽은 스승 때문에?”
“글쎄. 그야 모를 일이지.”
흑사련주는 잠시 말을 멈춘 후, 허공에 대고 가볍게 적월을 휘둘렀다.
그에게 도를 휘두르는 것은 수련이라기보다는 일상에 가까웠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몇 차례 도법을 펼친 흑사련주는 칼끝을 백수룡의 미간에 겨누었다. 백수룡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어떤 망설임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상태로는 그 무엇도 제대로 베지 못한다.”
“……충고 고맙소.”
“썩 고마운 표정은 아닌데.”
피식 웃은 흑사련주는 몸을 돌렸다.
애초에 그는 위로 같은 걸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궁금하여 나와 봤을 뿐.
수라혈천도를 익힌 도객의 표정에 짙게 어린, 저 번뇌와 고통의 정체가 말이다.
적월을 다시 도집에 집어넣은 흑사련주가 회합장으로 돌아갈 때였다.
툭.
적월의 손잡이에 달려 있던 파란색 수술이 툭 끊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신병이기에 달린 것치고는 너무 수수하고 낡은 장식.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흑사련주의 표정에는 일순간이나마 큰 동요가 일었다.
“……이십 년이나 달려 있었으니, 떨어질 만도 하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흑사련주는 직접 손을 뻗어 수술을 주워들었다.
그가 살면서 친우에게 받은 몇 안 되는 선물이었다.
흑사련주는 그것을 품 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 * *
“왜, 왜…….”
거령채주는 바들바들 떨면서 겨우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는 도저히 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저 존재.
처음에는 아무런 기도가 느껴지지 않기에 무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것’이 과연 사람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저벅. 저벅.
그저 평범하게 걸어오는 것뿐인데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산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겐 공포로 군림하단 거령채의 산적들이었건만, 꼼짝도 하지 못했다.
촤아아악-
그 무엇에도 닿지 않았는데 잘려나간다. 뼈와 근육을 가리지 않고 여러 선이 중첩돼 그어지고, 그대로 무너진다.
푸화아악!
바로 옆에서 아는 얼굴들이 수십 조각으로 분해돼 쓰러지는데도 누구 하나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
“…….”
숨이 막히도록 공간을 짓누르는 살기에 온 몸이 마비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왜, 왜…….”
거령채주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 이상은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전부 죽었다. 거령채의 산적들 중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저것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들이닥친 재해와 다름이 없었다.
“절단면.”
그 존재가 거령채주 앞에 멈춰 섰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빤히 한 부분을 응시했다.
“절단면이 깨끗해.”
그의 시선이 거령채주의 팔이 잘려나간 부분을 보고 있었다. 붕대로 감아 놓았는데 언제 풀어진 것인지, 상처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십 년간 폐관을 했다더니, 그리 발전하진 못했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령채주는 비로소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아…….”
그 순간, 문득 바라본 하늘이 피로 물든 것처럼 붉었다.
그것이 거령채주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사내가 그를 지나쳐간 순간, 거령채주의 몸이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