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30
30화
희사는 기교 없이 부는 바람에 분이 식었다. 왜 노여움에도 입매가 반달처럼 휘어질까. 저 신령이 하는 짓거리마다 못 말리게 기막혀서 그러한가.
산영의 눈은 표독스러운 살모사에서 경계를 푼 참새 같아졌다. 희사의 손가락 끝이 까딱거렸다. 저에게로 오라는 신호를 받은 산영은 속절없이 행했다. 하나 제 짐승을 내놓으라고 할까 봐 쭈뼛거린다.
희사의 손가락은 변명거리를 준비한 그 조그마한 입술을 지나쳐, 흙이 발라진 뺨에 닿았다. 그의 엄지가 생전 하지 않았던 짓을 했다. 일을 훼방 놓은 방해꾼의 뺨에 묻은 흙을 털었다. 사유는 없었다. 수많은 물음의 답을 끼워 맞출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저릿한 욕심은 이것이었을 뿐이었다.
“아, 저기…….”
맞서 싸울 각오로 왔던 산영은 칼을 내려놓고, 갑옷을 벗고, 방패를 내려놓은 것처럼 흐물흐물해졌다. 그의 손길 하나에 물러터진 눈이 끔뻑거리는 게 보였다.
희사는 그의 새끼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속눈썹을 만져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한 손으로 산영의 뺨을 닦아내었으나, 이윽고 놀고 있던 나머지 손마저 산영의 머리칼에 쌓인 흙을 털어내었다. 괭이 취급하지 말라던 산영은 주먹을 쥐더니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변했다.
“저기, 저 희사 님.”
“응.”
사실 흙을 터는 것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고, 희사는 그 부드러운 뺨이나 한 손에 쥐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는 머리칼에 젖어버리는 중이었다.
산영의 살결이 이토록 부드러울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씩씩하고 눈치도 없다고 생각하여 그러했나. 부드럽기보다는 그 성정처럼 거칠고, 꺾이지 않는 나뭇결 같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 우선 이 신령에 대해 거기까지 생각한 것부터 망측한 일이었다.
“저, 제 원 하나를 들어주신다고…….”
맞다. 그랬었다. 그저 튼실한 미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이제야 제 발목을 잡는다. 희사는 자조하며 차갑게 물었다. 이 신령이 원하는 바야 뻔하지 않은가.
“어기지 않아. 원하는 바를 말해.”
“그게… 무엇이든요?”
“말했을 텐데. 양심의 문제라고.”
“이것이 애매하여. 양심에 걸리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서.”
설마 아예 보내달라는 것인가. 빚도, 구왕을 먹은 일도 없던 일로 해달라고. 부드럽다고 여긴 머리칼에서 손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울상이 된 산영이 떠나려는 희사의 손을 잡았다.
“그게! 자주 이렇게, 그러니까…….”
“이렇게?”
“아니, 아이고, 그게 말이 이상하지요? 그저, 그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말을 하려고.”
당황한 산영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개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으로 그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가. 저도 무슨 짓을 하는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산영의 빨간 뺨이 탐스러웠다. 희사는 어깻죽지부터 아랫배까지 뻐근하였다. 순간 시큰거리는 통증이 그를 관통했다. 산영의 무안해하는 눈동자가 그를 대담케 했다.
이 어리석은 신령의 바람이라면 땅으로 내려가는 것일 테지. 한데, 한데 그의 손길을 바란다. 아무것도 아닌 손길에 제 기회를 날려버린다. 역시 어리석었다. 하나 그것은 봐줄 수 없을 만큼 가련하여.
“별말 아니었다니까요……?”
구름으로 실을 짜서 만든 것 같은 하이얀 신령의 의복이 한순간에 끌려갔다. 신령의 허리를 잡은 손은 간단하게 품으로 끌어와 가둔다. 산영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일견 사나워 보인다고 할 수 있는 시선 아래였다.
찰나였다. 상황을 살피기 전에 사고를 쳤다. 산영의 입술이 초근초근한 무언가와 부딪혔다. 그의 입술이라는 것을 알아채기까지 일각이나 되었을까. 산영이 놀라서 주춤한 사이 그의 혀는 수월하게 수월하게 입 안으로 들어섰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든 산영을 마음껏 끌어안았다. 한 뼘의 여유도 두지 않고 붙인 산영의 몸은 가두어두기에 편한 크기였다. 한쪽 팔은 산영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한쪽 팔은 자꾸만 도망가려는 몹쓸 머리를 붙들었다.
완벽한 자세를 갖춘 희사의 혀는 부드럽게 탐하던 것을 가졌다. 아직 사내를 받아본 적이 없는 서투른 혀가 앙증맞게 거부하려고 들었다. 하나 익숙하지 않은 탓에 일어난 거부일 뿐이었다.
희사의 호선을 그린 입술이 급하게 빠져나와 뺨에 입을 맞추자 금세 반항은 허물어졌다. 얼이 빠진 입술은 뻐끔거리다가 또다시 다가온 그를 맥없이 받아들였다. 이번 침입에는 저도 배운 것이 있다는 듯이 그의 혀를 조금씩 다정스레 맞이해 주었다. 하나 아직은 똑같이 휘젓고 맛을 볼 준비는 되지 않았다. 붙어먹듯이 하다가, 밥 먹듯이 하다가, 그러다 보면 이 입술도 곡식이 익듯 여물어질 것이었다.
희사는 편하게 등을 정자 기둥에 기대었다. 다시 고쳐 안고 입술을 가져가는데 산영이 눈짓으로 애걸복걸하였다. 그의 어깨를 겨우 밀어낸 산영이 잠시의 틈을 얻었다. 그의 입술 가까이서 숨을 몰아쉰 다음 익을 대로 익은 얼굴을 들었다.
“이게, 이것이 무슨…….”
“싫어?”
싫을 리가. 맞붙어 있는 가슴께로 읽어낼 수 있음이었다. 산영의 심장이 요동을 피웠다. 부끄럼 타듯이 발차기하며 그에게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촌스럽기만 한 입맞춤이 어찌나 달고 부드러운지, 희사는 잠시간의 여유를 둔 산영이 못마땅할 지경이었다. 저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좋으면서.
“싫지는 않지?”
입술만 씰룩이는 산영을 보며 희사는 웃음을 흘렸다. 제 욕심에 맞게 산영의 허리를 안고 작은 뺨을 손으로 감쌌다. 퇴로를 봉쇄한 입맞춤 아래에서 산영은 익어서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빨개지는 중이었다.
간간이 혀를 섞기 위해서 고개를 틀 때마다 산영은 두 눈을 꼭 감았다. 흉한 걸 보기라도 한 것처럼 내숭은. 그러면서 엉큼한 혀는 착실히 그를 따르고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정자 아래. 사람이 무엇을 하든 관심 없는 영물만이 구경꾼이요, 막을 길이 없는 두 사람의 입맞춤은 그로부터 한참을 더 이어졌다.
하얀 신령을 안고 있는 이의 표정이 어찌나 평화로운지. 누군가 보았다면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었다.
* * *
산영의 정신은 온종일 물에 담가둔 것처럼 멍하였다. 영물의 목에 고리를 채운 번듯한 신령이 되자면, 이곳 영화의 궁에 사는 종이 말하기를 준비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다.
산영의 영물은 영화의 산에서 나고 자란 몸으로 아직 이곳에서 난 풀이나 열매밖에 먹질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여 산영이 다른 바깥 먹이에 익숙해질 때까지 영물을 씻겨주고, 손수 먹여주며 훈련을 시켜야 한단다.
그리하여 산영은 희사의 궁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옥룡산으로도 내려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안타까운 소식이기는 하지만 흑둥이의 안전이 보장되었으니 무엇이 문제일까.
하나 산영이 넋을 놓은 이유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영물 때문이 아니었다. 자려고 누우면 생각나고, 밥을 한술 뜨다가도 생각나고, 옆으로 누워도, 뒤로 누워도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그것 때문이었다. 그것. 그 몹쓸 것. 바로 희사의 입술이었다.
병이 든 게지. 병이 든 게야. 산영은 영물들이 좋아한다는 여물을 작두로 썰며 중얼거렸다. 숟가락만 들어도 희사의 얼굴이 보이고, 말간 종의 얼굴에서도 희사의 살결이 떠오르고, 심지어 흑둥이의 꼬리털을 보다가 희사의 머리칼을 떠올렸다.
그야말로 중증도 이런 중증이 있을 수가 없다. 쥐똥만큼 연관 없는 것을 보고도 희사를 떠올리는데 하물며 그가 실제로 제 앞에 나타나면 어떻겠는가. 산영은 희사의 그림자가 보이면 하던 일을 제쳐두고 삼십 육계 줄행랑을 쳤다.
아무리 남녀 관계에 무지한 산영이라도 입술과 입술을 맞대는 것의 의미를 안다. 땅의 사람들은 정인들끼리 몰래 산속으로 들어와 입술을 비비거나 아니면 집안의 반대로 도망친 가련한 정인들이 하거나, 아니면 주변에 밝힐 수 없는 사정으로 숨어들어 와 애정을 표현하거나. 가부간 산영이 알기로 어느 정도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하는 것이 입맞춤이란 거였다.
이러다가 딱 죽겠구나. 흑둥이에게 여물을 주면서도 산영은 그날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밀쳐도 밀쳐지지 않았던 다부진 어깨, 욕심껏 해소하듯이 저를 놓아주지 않던 입술, 가슴이 죄지은 것처럼 콩닥거려 산란한 정신.
부끄러움은 감쪽같이 저물고 희사의 뺨을 슬쩍슬쩍 만지는 못된 손이 살아났다.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삽시만 더. 수십 번은 해본 사람처럼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가, 왼편으로 기울였다가 하며 입술을 나누고. 막판에 가서는 희사의 앞에서 만족스러운 숨까지 내쉬었더랬다.
“아.”
산영은 또 헤벌레 웃는 자신이 창피스러웠다. 머리칼을 마구 쥐어뜯으며 주저앉자 흑둥이가 코를 찡긋거렸다. 주인의 정신머리가 염려스러운 모양이었다. 하나 주장이 강한 산영의 기억은 머릿속에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피할 길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난 후였다. 산영은 부끄럽게도 희사의 어깨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판가름도 나지 않는데. 벌벌 떨고 있는 산영의 뺨을 들어 올린 희사가 눈을 맞추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도, 희열도, 첫 경험의 서투름도 없었다.
어느새 말쑥한 천신으로 돌아온 그에게 산영은 혹시 이것이 하늘의 관례인가 하여 물었다.
‘아무한테나 이러십니까?’
명백히 그것은 투기도 아니고, 그의 능숙한 입맞춤에 대한 토론도 아니었으나 말하고 나니 흥이 닳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순진한 산신령의 입술을 훔쳐놓고서 저렇게 태연자약한 표정이라니.
한데 따지듯 묻는 물음에 희사는 동요하는 바 없이 나지막이 답했다.
‘처음인데.’
‘예?’
거기서 입이 떡 벌어지게 경악할 것은 무어란 말인가. 산영이 따져 보았을 때 그것은 입맞춤을 나눈 남녀가 나눌 법한 대화가 아니었다. 천제에게 빌어서라도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산영이 그 후로 얼굴이 새빨개져서 도망을 쳤기 때문이었다.
강도라도 되는 것처럼 희사를 떼어놓고 산영은 산속으로 들어가 술래잡기를 하였다. 꼭꼭 숨었으나 술래는 다행히도 그녀를 잡으러 올 의사가 없었다. 나중에는 산속에 산영이 숨을 곳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게 더 창피한 일인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