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92
91화
새벽녘에 눈을 뜨고 일어나 뒷짐 지며 산 한 바퀴를 돌아보고 마음껏 잡초를 뽑고 짐승 무리의 안녕을 살피는 하루가 반복됐다.
예전이라면 지겹다고 우는 시늉 하거나 어찌 이렇게 하루가 느리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며 투정하던 시절도 있으나 산영은 되찾게 된 일상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걸어다니고 산의 내음을 마시는 오늘이 무엇보다 귀했다.
“아이구, 이 자리에 또 났네.”
작년과 비슷한 자리에 또 잡초가 났다. 엎드려 주변 흙을 살살 파낸 다음 잡초의 뿌리를 확 뽑았다. 떠나기 전만치 깔끔하고 야무진 옥룡산의 길을 보자마자 마음이 환해졌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산보를 끝낼 즈음, 요즘 뻔질나게 드나드는 이의 얼굴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산신령님.”
“아유, 뭘 또 그런 걸 가져왔나.”
행랑어멈이 챙겨주었는지 바리바리 싸인 보따리를 보고 산영이 허허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산영의 입이 귀에 걸렸다. 혼자 있었으면 죽도 밥도 안 될 것을, 문안 인사 하듯이 찾아오는 이 사내 덕에 그래도 마음이 많이 나아진 차였다.
사내의 이름은 고언이었는데 높은 선비가 되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주인댁의 도움으로 공부를 좀 하는 모양이지만 과거까지는 신분 때문에 어림없다고 슬퍼하는 중이었다. 하나 위로 차 하는 말이 아니라 참말 고언에게는 싹이 보였다. 나중에 한자리 차지할 만큼 중요한 사람이 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산영의 말이 그냥 하는 말인 줄 아나 보다.
여하튼 고언은 저의 타고난 신분 때문에 심란한 마음을 터놓고, 산영은 산영 나름대로 말벗이 생겨 위로를 받았다. 나무 베러 간다는 핑계로 옥룡산으로 올라오는 고언과 주전부리를 나누어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게 하루의 흥 중 하나였다.
“또?”
“한 번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참…….”
매일 먹을 것을 가져오는 게 기특해 구름을 태워줬더니만 그 뒤로 맛이 들었는지 이렇게 애걸을 해왔다. 산영은 버릇이 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기고만장한 자세로 구름을 불러왔다.
흰 구름을 떼어와 고언의 발밑에 두니 익숙한 것처럼 그가 구름 위로 타고 오른다. 하양 구름은 편안하게 손님을 모시고 산영의 앞까지 데려왔다.
“좋아 죽는구나.”
“나라님도 이런 건 못 타보셨을 겁니다.”
이렇게 저를 띄워주니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산영은 고언이 올 줄 알고 미리 끓여둔 차를 조심하게 따랐다. 오늘은 무엇을 가져왔나 했더니만 떡을 가져왔다. 누가 말릴세라 냉큼 집어 입 안으로 넣었다. 떡 안에 넣은 꿀과 깨가 만나서 톡톡 터지는데 맛나게 드는 행복감은 잠시이고, 웬일로 떠난 이를 향한 그리운 추억이 먼저 들이닥쳤다.
하늘 고원에서 저가 좋다고 한 말을 듣자 떡값을 달아두었던 다정한 낭군이 떠올랐다. 잊고 살자고 하루에 수십 번씩 말하다가도 떠난 지가 언제인데 아무렇지 않은 하늘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떠나도 아무렇지 않을 것을, 뭣하러 거짓까지 부리며 붙잡아두었나 싶었다.
희사에 대한 기억 때문에 체기가 올라왔다. 산영이 떡을 하나 집어 먹고 가만히 있자 놀란 고언이 떡을 들춰보았다.
“혹 상하였습니까?”
“아니, 아니다.”
“다른 것 잡수시고 싶은 거라도…….”
“되었어. 나는 이만하면.”
떡을 물린 산영은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고언은 눈치를 살살 살피다가 산영의 빈 찻잔에 찻물이나 더 따라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거지요.”
낮은 고언의 목소리 울림에 산영의 마음에 고인 고민 한줄기가 흘러나왔다.
“기댈 데가 없으신 분인데. 내가 얼마나 미우면 이렇듯 깔끔하게 끝날까.”
“예?”
“처음부터 인연 줄을 붙잡고 놓지 않았던 것은 나였던 게야.”
저가 놓으면 영영 볼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이었다. 그렇게 하늘에서 뛰쳐나가고 열흘에 가까워졌다. 그간 고언이 자주 들러 마음을 다독여준 덕분에 생각이 나다 말다, 하기는 하지만 아예 끝나버렸다는 확신이 들 적마다 마음 한쪽이 시큰했다.
영영 볼 수 없는 이를, 고 거짓말쟁이 낭군을 보고 싶은 건지 보고 싶지 않은 건지 저도 모른다. 하나 확실한 건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쉽게 고독에 빠지고 쉽게 울적하다. 그나마 고언이 없었더라면 저 계곡물 아래에 처박혀 울고 자빠졌을 것이었다.
“고민이 있다면 저가 다 들어드리고 싶습니다.”
고언의 위로는 감사했지만 그건 한낱 사람인 그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산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너도 옥룡산에 이리 자주 드나들지 말거라. 괜히 정들면 너만 마음이 아픈 법이야.”
사람은 사람끼리, 산신령은 산신령끼리, 하늘은 하늘 위에. 각자의 자리에서 사는 것이 정답임을 요사이 깨달은 바였다. 고언의 위로 덕에 마음이 퍽 달래지기는 하였어도 또 붙어 있다가 그와의 사이가 이상한 것으로 변질될까 봐 걱정이 들었다. 산영이 빌어준 복을 타고났다고는 하나 이렇듯 가까워지는 건 조금 위험하다는 소리였다.
“혹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실수는 무슨. 고언이 너도 공부도 해야 하고 또 장사도 해본다면서. 옥룡산은 그 두 가지를 하는 데에 적합하지 않으니 말이다.”
고언은 그 말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아무래도 내심 섭섭한가 보다. 산영은 고언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신분에 치여, 가난에 치여, 가진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사는 그에게 신령 하나가 보이니 이 얼마나 재미난 일인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자꾸만 찾아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산영 또한 저를 알아보는 존재가 생긴 것만 해도 마음이 많이 나아졌다. 하나 거기까지. 본디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헛된 것을 좇다 보면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었다.
“너는 크게 쓰일 데가 있을 터이니 내려가 공부에 전념하며 때를 기다리려무나.”
고언은 다행히도 악한 이가 아니었다. 산영의 말뜻을 백이면 백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담긴 염려가 진심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복을 주고받은 은인 관계이니 아마 고언이 죽더라도 다음 생이면 다시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산영은 그것으로 족했다. 꼭 자식이나 낭군이 아니더라도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기억해 주는 인연이 생긴 것만으로도.
큰절하고 떠나가는 고언의 뒷모습을 보며 산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언이 오면 잠시나마 잊었던 하늘 생각이 파도처럼 덮쳐 온다. 머릿속을 다시 점령한 파도는 철썩거리며 희사에 대한 기억을 불러왔다.
떠나고 나니 못 해준 것만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미련 때문이렷다. 도망간 아내를 찾아올 성품은 아니니 어디 너 죽고 나 죽자는 마음으로 무시하고 있을 터였다. 하나 크게 된통 당한 산영은 죽어도 돌아갈 마음이 없으므로 이제 그 고운 얼굴은 다신 못 보는 것이었다.
일어나 찻잔을 정리하고 옥룡산 자락을 걸었다. 호랭이의 어깨에 발라줄 약초를 직접 캐내기 위함이다. 쪼그려 앉아 호미로 약초를 살금 캐내기 시작하는데 눈물이 빗물처럼 떨어졌다.
한 몇 년은 이 꼴이겠지. 마음의 정이란 게 참 지독하여 오래도 남아 있다. 밉다가도 그리운 이 마음이 몇 년이나 갈꼬. 산영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내버려두었다. 울어야 풀리는 마음도 더러 있었다.
산영이 캐낸 약초를 소쿠리에 담아 일어섰을 때였다. 쨍쨍하던 하늘에 비 소식이 있으려는지 캄캄한 먹구름이 찾아온다. 해가 지기 한참 전인데도 이렇게 어둑한 것을 보니 장대비가 오려는 모양이다.
산영은 재빨리 캐낸 약초를 들고서 커다란 나무 밑으로 피신했다. 오늘치 약초를 다 개어두어야 호랭이에게 쓸 텐데. 오래간만에 찾아오는 비님이 쉬이 가실 일은 없으니 여기서라도 개어낼까 생각 중이었다.
모자람 없이 캐내었는지 소쿠리 안을 확인하는 찰나 쓰아아 소리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꼭 울음소리 같아 응어리진 마음이 한결 풀려나갔다. 저 대신에 울어주는 비를 멍하니 바라볼 때였다.
저 멀리서 비단옷을 입은 사내가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비 오는 날에 길을 잃은 나그네인가 싶었지만 보면 볼수록 저것은 알고도 남는 얼굴이었다. 소쿠리를 훽 떨어트린 산영은 한 걸음 물러났다. 빗줄기가 만들어낸 환영처럼 사내의 그림자는 흐릿했음이다.
하여 산영은 저의 앞에 사내가 다가와 섰음에도 이것이 실재가 아닌 환영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유예 기간은 줄 만큼 주었다는 듯이 나타난 사내는 제 낭군이라. 본 데 없이 수척해진 낭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저를 바라본다. 그것이 참 괴상한 미소였다.
―열흘도 모자라?
낭군의 목소리는 동굴에 갇힌 것처럼 웅 울렸다. 참말 실재가 아니라 환영인 모양이었다. 산영은 저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온 낭군에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
“잠시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아주 내려온 것이지.”
―왜?
“아무리 봐도 저는 여기를 지켜야 할 명입니다. 희사 님이 저 하늘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요. 자꾸 어긋나고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
―나는 너 안 미워해.
하나 그 다정한 목소리와 다르게 눈은 엄청난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일단 달콤한 미끼로 꿰어낸 다음에 죽일 심보처럼 보였다. 산영이 순순히 갈 기세가 아니자 낭군은 킬킬거리며 웃어버렸다.
―아이 참, 우리 산영이.
목소리가 참 달고 끔찍했다. 산영은 돌아버린 것 같은 낭군을 보며 잘게 떨었다.
―하면 흑둥이는 어쩔까.
흑둥이. 안 그래도 그 아이를 두고 훅 떠난 참이라 마음에 걸렸다. 당연 저에게 보내달라고 말하려는 차에 희사는 음산하게 웃는다.
―토막 내 보내어줄까.
산영은 그 말에 다리 힘이 다 풀렸다. 믿을 수 없었다. 저 말을 하는 사내가 참말 제 낭군이란 말인가. 하나 희사는 그럼 그러지 뭐 하면서 사라져 간다.
아니 된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란 말인가. 산영은 빗줄기를 맞으며 그 환영을 쫓았다. 하나 손에 닿기도 전에 구름처럼 산영의 손을 빠져나갔다. 협작질에 제대로 당한 산영은 허무하게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았다. 토막 내 보내어줄까. 그 말에 진심이 아닌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