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95
94화
산영은 소 짖는 말에 무어라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는 입술이 산영의 말을 훔쳐 갔다. 능구렁이처럼 능청스러운 혀가 입 안을 두르는 통에 말이 나올 새가 없다.
헐떡거리는 숨마저 훔쳐 놓고는 자비 없이 혀를 내려놓고 떠난다. 바둥거리거나 밀쳐 내도 꿈쩍하지 않는 그의 몸이 지겹게 느껴졌다. 이 갑갑한 기분이 싫고 매스껍고 증오스러웠다. 안 그래도 하찮은 신령이 거부해 봤자 뭘 하겠냐는 느낌이 들게 했다.
산영은 다가오는 입술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고개를 겨우겨우 틀었다. 하나 따라온 입술이 귓가에 붙어 쪽쪽 소리를 냈다. 귓불부터 목선까지 왔다 갔다 하며 퍼붓는 입맞춤이 끊이질 않았다.
구애라도 하는 것 같은 입맞춤의 끝은 목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뜨끈한 입술을 새기듯 비비고 문지른다. 희사가 흘리는 달곰한 숨결에 홀리기 직전 산영은 재빠르게 몸을 뒤로 빼었다. 그래 봤자 그의 허벅다리 위라서 벗어날 곳은 마땅치 않다만 거부의 표현은 확실히 한 셈이었다. 옥룡산을 새 밧줄로 쓴다는 사람의 입맞춤 따위 반가울 게 없었다.
“생각하고 행동해야지.”
“…….”
“뒤로 물러날 때마다 네가 은인이라는 자의 창자를 끊을지도 모르는데.”
희사가 독하다고, 못됐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그는 언제나 저에게만은 따스하고 무르게 굴었다. 내심 산영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 눈앞의 희사는 그저 하늘에 계신 윗분이었다. 욕지거리 나오는 방법을 써서라도 제 뜻을 이루려는 윗분들 말이다.
산영은 물러나는 것은 둘째 치고 동상처럼 몸이 굳고 말았다. 자신이 알던 이는 꿈결에서 만난 이 같다. 지금의 희사는 껍질만 같은 괴물이로다.
“싫어요.”
“응?”
“희사 님이 싫습니다.”
산영의 속을 연정의 바늘이 쿡 찔렀다. 벼랑 끝에 버티는 한 감정이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하나 산영은 그 비명을 묵인했다. 이 사내는, 이처럼 잔혹한 사내는 산영이 설레하던 그 사내가 아니었다.
흑둥이를 사냥하다가 봐주고, 부드러이 입맞춤하고, 맛난 떡을 먹을 때 웃어주던 사내가 아니었다. 그 아름답던 사내가 아니라 흉측하고 못난 마음을 가진 사내였다. 지금까지 사기를 친 것이다. 산영은 저의 눈물마저 좋다고 훔쳐 마시는 희사가 끔찍했다.
“정 내키지 않으면 빚을 갚는다고 여겨도 좋아.”
“빚……?”
“구왕 먹은 값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갚는다면서. 갚아. 갚으면 될 일이지.”
산영은 그의 말에 뒷골이 당겨 눈을 부릅떴다.
“구왕 일은 없던 일로 해주신다고 하셨지요. 작금의 우리 사이는 구왕이 아니라 서로의 신뢰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요.”
“글쎄. 기억이 잘 나지 않는걸.”
“희사 님!”
“입이나 더 맞추어봐. 그 혀로 잘도 나를 녹여댔으면서 이제 와 무얼 빼고 그래. 응?”
그러고는 고놈의 입맞춤이었다. 꼬리 감추는 산영의 입술을 삼키고 그 입 안까지 수월하게 차지했다. 여리고 여린 입 안쪽 살을 혀로 짓뭉개듯이 누른다. 혀끼리 얽히고 난잡한 소리를 낸 다음에야 떨어지고는 얼빠진 산영의 뺨에 길게 입술을 붙였다.
하는 말하고 행동이 딴판이었다. 산영은 달라붙은 희사의 머리를 떼어내려고 어깨를 조금 뒤로 물렸다.
“부인이 싫으면 종노릇이라도 해야 값이 맞지 않겠나.”
그 말에 기어코 참던 설움이 터졌다. 산영은 마음속 응어리진 설움을 다 풀어내듯이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 울지도 못하고 소리 없이 오열하는 산영을 그는 지그시 바라만 보았다. 울고 싶은 건 그인데 왜 이 아이가 우는지 알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산영은 벽창호 같은 그를 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저가 쌓아둔 마음은 아낌없이 풀어냈다.
“희사 님은 거짓말쟁이에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저를 하찮게 여기시는 게 틀림없지 않습니까. 첫 만남 때부터 그러더니 혼인한 후에도 쭈욱……. 쭈욱 저를 못나게만 여기셨지요. 하니, 그러하니 그런 거짓을 뱉으시고도 저에게 미안한 마음이 한 톨도 없으시고요.”
“내가 무얼 미안해해야 해?”
그건 진실로 궁금하다는 목소리였다. 산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감정 없이 차가운 눈이 자신을 쪼고 있었다. 산영은 예전부터 저 눈이 참 싫었다. 저렇게 무정하고 차가운 사내가 어찌 혼인은 할까 싶었는데 그 혼인한 미친 여인이 저였다.
저것처럼 저만 중요한 사내는 근처도 가는 게 아니었는데 무에 홀려 여기까지 와버렸을까. 산영은 제 입술이나 탐스럽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이가 갈렸다. 그야말로 저는 갖고 놀기 좋은 노리개라 이 말이었다.
“미안할 게 없으시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 더는 신뢰할 수 없는 이와 부부의 연을 이어갈 수 없으니 찾아오지 마시지요.”
하하하하. 산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굉장히 재미난 것을 들은 것처럼 희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눈물까지 맺히며 웃는 그의 모습이 꼭 산영을 비웃는 작태였다. 아 그러시구나 하면서 물러갈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진즉에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진중한 면모가 하나도 없을 줄은 몰랐다.
단순히 무정하기만 한 사내가 아니라 상종 못 할 이였다. 지금까지 속인 것에 대해 부끄러움도 한 치의 미안함도 없었다. 되레 들킨 게 어쩌냐는 듯 자신을 겁박하려 들었다. 거기서 한 줌 남은 정이 떨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희사의 그 차가운 손이 산영의 머리통을 어루만졌다. 어리석고 딱한 이를 대하는 태도였다.
“천지가 내 것인데. 너 같은 신령 하나 어쩌지 못할 것 같아서 걱정인가.”
“저는 아니라는데, 이제 아니라는데 하면 어쩌시려고요.”
“부부가 아니라고 하면 종으로, 종이 아니라고 하면 이번엔 네가 그토록 부르짖는 노리개로 만들어줄까? 종일 내 것을 물고 살아볼래?”
하나 노리개로 만든다는 이의 손 치고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준다. 그 간극을 견딜 수 없는 산영이 손을 피하자 그는 픽 웃으며 산영의 턱을 쥐어 잡았다.
산영은 치가 떨렸다. 이처럼 잔혹하고 질 나쁜 사내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늘에 고귀한 분이 아니라 저 산자락에서 노는 건달들의 수장이라고 해도 믿을 판이다. 노리개니 뭐니 몹시 충격을 받아 다 듣지도 못하였건만 이 돈 놈은 계속해서 입술이나 부딪혀왔다.
저의 손을 가져가 조몰락거리며 만져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신 몸을 부딪혀 오며 향취를 묻히고 떠난다. 그것이 끔찍스러워 산영은 아예 보지 못한 척했다.
하나 희사의 얼굴은 점차 풀려가는 중이었다. 협박을 하든, 무얼 하든, 이렇게 산영이 얌전히 품에 안겨 있으면 그걸로 됐다. 미워하는 거야 각오한 것보다 덜 아팠다. 당장 궁에 데려가 며칠 마음껏 품고 나면 아이도 생길 것이고, 하면 산영도 어쩌지 못할 터다. 그럴 터다, 분명.
산영을 안아 들고 찬찬히 걸어나갈 때.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암흑을 걸어나가고 있을 때. 점점 옥룡산과 멀어지는 것을 느낀 모양인지 산영이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하나 아무리 발악하여도 도주는 무리란 걸 알았나 보다. 산영은 돌연 희사의 목에 팔을 두르며 애걸하였다.
“아니 됩니다. 거, 거기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목에 두른 산영의 팔이 기껍다 못해 향긋하였다. 희사는 잠시 산영의 몸에서 풍기는 향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그를 좋은 말로 타이르고 달래려고 하니. 매달리는 목소리가 요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호랭이도 아직, 아직 안 나았고. 사람들도 산서를 짓는다고 합니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하고…….”
“해서.”
잘못한 것은 없는 것을 안다. 하나 이것은 잘못을 따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살고 죽느냐의 문제였다. 산영이 없는 지난 열흘간 그가 뭔 비참한 꼴로 살았는지 안다면 이렇게 매달려오는 것조차 못 할 터였다.
그도 한번 버텨보려 했다. 이만한 산신령 이 땅 어디에는 없으려고. 하나 목을 조르려는 시도가 기꺼우니 답이 없다고 느꼈다. 산영은 백날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산영의 마음이 저를 찾는 일은 평생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그걸 깨우치고 이제 산영의 마음 따위는 관심 없어졌다.
“옥룡산이 제 처지에 딱 맞습니다. 하늘은 저 있을 곳이 아니고…….”
답도 없는 소리. 단박에 무시한 희사가 다시 걸어나가자 산영은 어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꺼냈다.
“하면 닷새만!”
천지가 제 것이라 도망칠 데가 어디에 있냐는 희사의 말이 산영의 가슴에 박혔다. 산영은 굴욕감을 허리에 이고 부탁하였다.
“호랭이 나을 때까지만…….”
불분명한 말이 무슨 뜻인 줄 앎에도 희사는 구태여 쐐기를 박으려 했다.
“닷새 뒤에는.”
“…….”
“닷새 뒤에는, 그다음에.”
하나 산영은 답하지 않는다. 그 고집도 보통 고집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옥황 공주처럼 떠받들어주어도 무에 그렇게 불만이 많을까. 희사는 비웃음을 띠며 그 가련한 산신령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닷새 뒤에는 정확히 내게 안겨 말해.”
산영은 아무 변명도 하지 못했다. 희사는 사방에 두른 암흑을 거두며 산영을 내려놓았다. 무사히 땅에 닿는 산영이 독기 품은 눈으로 희사를 올려다보았다.
닷새.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사내와 여인이 서로를 바라보며 가슴속에 정해둔 답을 읊었다. 갈 수 없다. 데려간다. 옴팡지게 싸우는 두 사람의 속내는 상관없이 어둠은 사라졌다. 땅에서 물러난 하늘의 그림자가 걷히자마자 옥룡산이 다시 숨쉬기 시작한다.
하늘을 나는 날짐승의 소리를 들으며 산영은 털썩 주저앉았다. 닷새의 말미가 과연 무얼 바꿀 수 있을까. 하늘을 거부한 산신령에게 가혹한 말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