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188
186화. 나흘과 일 초의 길 (3)
‘그런데 솔직히 억울하네. 나 정도면 재능에 비해 겸손한 편인 것 같은데…….’
흠.
하여간 능력 있는 사람이 교만하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다.
이쪽은 잠깐 전생을 회상하다 곧 현재의 대화로 돌아왔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상식 면에서는 아무래도 좀 부족하니까. 제가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면 모쪼록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아, 그, 그럴게요.”
한편으로는 저 재능 있는 술사가 누군가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길 바라면서.
***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삶이란 어떤 걸까?
적어도 어느 동굴에 있는 여성만큼은 이 논제에 명확히 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지구인의 몸으로 목성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라고.
어디 하나 발 디딜 곳 없는 액체수소의 바다에 휩쓸려 다니는 느낌이라 그녀는 감히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해를 왜 받지 못하는 걸까.
처음으로 이상을 느낀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날은 새 학기를 맞아 모두가 자리 배치를 바꾸었고, 졸린 인상의 여자아이는 우연히 영어 유치원의 동창과 짝꿍이 되었다.
서에스더는 어린 시절부터 속눈썹이 풍성한 예쁜 아이였다. 그리고 마침 옆자리의 남학생도 피부가 희고 콧대가 또렷한 고운 얼굴이었던지라.
반의 아이들은 함께 있는 에스더와 짝꿍을 볼 때면 혹시 서로 사귀느냐며 놀리고는 했다.
“야! 에스더! 넌 이제 애도 아닌데 왜 아직도 머리에 반짝이하고 오냐? 되게 유치하다. 그리고 너는 이름도 엄청 이상해.”
그래서 남학생은 부끄러운 나머지 부러 짝에게 못되게 굴었는데 말이다.
“꺄아아아!”
“으아아앙.”
“선생니이임!”
그 3학년 2반의 풋풋한 새 학기는 이내 충격적인 그림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느 수요일.
처진 눈꼬리의 여학생은 급식 시간에 배부된 금속 젓가락으로 제 짝의 손등을 뚫어버렸으니.
.
.
.
“왜 그런 거니?”
어린 날의 에스더는 자신이 묻고 싶었다.
선생님, 대체 제 짝꿍은 왜 그랬던 걸까요?
하지 말라는데도 계속 시비를 걸고 이름을 비웃고.
게다가 그 아이는 본인이 유치원 시절에 남의 스케치북을 멋대로 찢었단 사실도 멋대로 잊어버렸다.
그래도 이쪽은 모든 걸 감내하며 총 3번이나 기회를 줬는데.
“더는 못 참겠어서요.”
에스더는 이맘때부터 제 분노의 역치가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사람들은 몇 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로 생생히 노여워하지 않으며, 또한 화가 난다고 동급생을 찌르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배운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런다고 좋은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도 아닐진대.
사실 에스더가 겪은 문제들은 전부 그녀가 저주 속성의 마법을 각성하리라는 전조였다.
모 외계인이 말했듯이, 저주술사들은 타고나기를 성질이 예민하며 대개 뒤끝도 길었으니.
“우리 공주~ 방 밖에 저녁밥 놔뒀으니까. 오늘은 꼭 거르지 말고 먹어. 알았지?”
평범한 이들은 에스더에게 왜 이리 유난스럽냐며, 그런 옛날 일은 이제 좀 잊으라며 조언하고는 했지만, 그녀의 감정은 타고나길 불용성이었다.
시간이라는 흐름에 해리되지 않는 차갑고 단단한 것이 에스더가 느끼는 감정의 재질인데, 어떻게 그녀가 남들처럼 쉽게 용서를 입에 담을까.
가슴으로는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간혹 오래된 기억으로 가족이 미워지기도 한다. 이렇게나 삶이 고단하다면 차라리 각성의 재능 따위도 주어지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
“…….”
하지만 에스더는 자신의 유전 정보를 선택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유일하게 고른 것은 또다시 또래를 젓가락으로 꿰기 전에 사회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것뿐.
온라인 게임 [SOM].
다행히 새로이 자리 잡은 세계는 그럭저럭 자신도 살 만했다.
그곳에선 싫은 이를 몇 번이고 죽여버려도 괜찮았으니까.
‘이 동굴처럼 어두침침한 곳에 오면 꼭 그 시절이 생각난단 말이지.’
서에스더는 자신의 학창 시절을 되짚다가 곧 뇌리에서 떠나보낸다.
생각해 보면 던전 쇼크는 몇몇 인물에겐 고마운 현상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자신은 그저 성질 더러운 돌연변이에 불과했으나, 힘을 거머쥔 뒤에는 그 분노를 그나마 좋게 표출했으니.
누군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이미 오만하기 그지없는 술사였다.
그녀는 끝없이 세를 불려, 언젠가 초능력자를 두루 대표하는 인물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멋진 목표가 생겼으니 이제는 짝꿍의 괴롭힘 같은 자질구레한 일에는 화내지 않게 됐고, 자연스레 생활에 활력도 돌았고.
각성자의 이미지를 향상하기 위한 방송 활동, 마탑의 운영, 사형수, 던전 공략 그 외 기타 등등.
“…….”
모든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행했으니 후회는 없거늘.
“콜록.”
어디에선가, 기침 소리가 들린다.
에스더는 눈을 질끈 감고 걸음을 멈췄다.
지금은 끝이 어딘지 모를 동굴의 한복판. 더불어 자신과 동행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략을 재개한 지 약 30분이 지난 참인데.
단검으로 살을 헤집어도 체액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던 냉혈한이 피를 철철 쏟는 광경이 이내 현실에 벌어졌다.
‘저게 일을 하다 생긴 후유증이라니. 역시 일본의 S급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평소 같았으면 저런 모습을 보며 강자의 약점을 알아냈다고 간사하게 기뻐했을 테지만, 아까부터 묘하게 기분만 가라앉는 상황.
어째서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걸까?
-아무튼 걱정이 돼요. 가만 보니까 에스더 헌터님은 평소에 무리하는 것 같길래.
김기려가 이런 말을 했으니까?
-유년 시절? 그때를 파고들어가면 할 이야기가 많진 않아요. 고아라서 경험이 다양하지 않거든요.
아니면 이딴 말에 측은지심이라도 들어서?
아마 전부 아닐 것이다.
사실 자신은 학창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을 당시, 그가 한 눈빛을 보고서 태도가 바뀐 거니까.
마탑의 길드장이 은둔형 폐인이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사람들은 으레 ‘그럴 수도 있죠.’, ‘지금은 밝으시니 괜찮지 않나요.’, ‘저도 게임은 좋아해요.’ 등등의 아부와 당황이 섞인 대답을 해왔다.
그런데 김기려만은 달랐다.
그는…….
어느 저주술사의 가족마저도 보내지 못했던, 너무나 건조한 눈빛을 보냈으니.
그냥 직감이지만, 왠지 그는 숱한 인간들과 달리 누군가의 실패한 학창 시절을 진심으로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콜록, 콜록.”
그렇다면 에스더는 이러한 기려의 이해에 감동했는가?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다. 물론 에스더는 자신의 모난 성격에 자주 의문을 갖곤 했지만 그렇다고 이해자를 바란 건 또 아니었던지라.
에스더는 오히려 아까의 대화로 불쾌감을 얻었다. 김기려의 앞에만 서면 묘하게 제 약점이 까발려지는 기분이라 꺼려지고 경계됐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저 남자는 특유의 괴물 같은 통찰력 때문에라도 절대 약자로는 보이지 않으니. 피를 토해대는 장면을 보아도 어째 약점이 있다고 느껴지지가 않아서.
“아, 죄송합니다. 이제 괜찮으니 다시 걸어가셔도…….”
에스더는 복잡한 기분으로 공략을 재차 진행했는데.
1시간, 2시간, 그리고 장장 5시간을 걸어도 출구가 보이지 않으니 슬슬 다른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벼운 짐으로 들어왔는데, 이렇게 고립되는 기간이 길어지면 큰일이네.’
꼬르르륵.
아니나 다를까 벌써 시작된 허기.
요즘은 던전의 길이가 길어지는 추세라 헌터들 사이에서 비상식량을 들고 다니는 것이 유행하건만, F급의 게이트라 방심했다.
어쩌면 이러다 보스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굶어 죽게 되는 것이 아닐까?
“에스더 헌터, 혹시 배고파요?”
“그, 그게…….”
그때였다.
조용히 따라오던 남자가 속도를 높여 걷더니 이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포장된 초콜릿 과자다.
“언제 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주머니를 뒤져보니 있길래요. 아마 편의점에서 세일하는 걸 몽땅 샀다가 봉툿값이 아까워서 여기 넣었던 것 같은데.”
“세상에!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정말 저도 먹어도 되나요?”
“그럼요. 꽤 많이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 일단 아껴 드세요.”
“고마워요.”
꼬르륵.
에스더는 우는소리를 내는 배를 잠재우기 위해 그가 나눠준 과자를 조금씩 아껴먹었다. 당분이 들어가니 기분이 나아졌다.
***
…하지만 그로부터 하루 뒤.
“아악! 짜증 나!”
콰앙!
어두운 동굴에 굉음이 터져 나온다.
“에스더 씨,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게 날뛰시면 기운만 더…….”
동굴에 갇힌 공략자들은 도합 20시간이 넘는 행군 끝에 이 동굴이 정말 어마어마한 길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버렸다.
그리고 이 점은 S급 헌터에게 즉각적인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사실 인류의 고위 각성자는 일반인들보다 열량 소모가 높은, 즉 연비가 안 좋은 생물들이었으니까.
‘배고파! 속이 쓰려 죽겠어. 대체 이 동굴은 어디까지 이어진 거야. 대체 어디까지!’
에스더는 길을 막는 뼈다귀 괴물에 괜한 화풀이를 하며 전진했다.
기려는 몸이 안 좋은 상태라 격한 활동을 자제해야 하니 이제는 자신이 동료를 들고 전력으로 뛰어본다는 작전까지 사용했거늘.
S급 헌터는 달리는 것만으로는 그다지 체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스더는 음료수만 마신 몸으로 무려 2시간을 질주한 참이나.
“으으으…….”
보다시피 오늘도 출구를 찾지 못했다.
이 동굴의 끝이 어디쯤 있는지 도통 감이 안 오니 이제는 막연한 공포마저 느껴지는 상황.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이곳은 일정 구간마다 분수대가 배치된 구조. 즉 수분이 부족해 죽을 일은 없었으니.
-뽁!
에스더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포션으로 대신 에너지를 공급해 보기로 했다. 그래도 물보다는 영양가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처음에는 비교적 싼 해독 포션을.
다음은 마나 포션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끼고 아끼던 최고급 회복약을 깠을 때가, 던전에 들어온 지 약 이틀 하고도 열일곱 시간이 지난 순간이던가.
“허.”
이제는 기계처럼 멍하니 다리만 움직이게 된 에스더는 흐린 눈 사이로 생각한다.
죽여버리고 싶다.
무엇이 이것의 주어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던전을 만든 이가 존재한다면 갈가리 찢어 죽여버리겠다.
“아, 이번 분수대도 멀쩡한 물이네요. 안심하고 드세요.”
이제는 물배를 채우는 것도 한계인데!
‘당 떨어져. 뇌가 바짝 조여지는 것 같아.’
영양분이 부족해지자 육신은 제 살을 깎아 생명을 유지하기 시작했고, 이 행위로 만들어지는 고통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했다.
이러다간 F급 게이트에서 죽은 최초의 S급이 되는 거 아닐까?
현기증을 느낀 에스더는 한참을 참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기요. 기려 씨. 정말로 죄송한데요. 그 쿠키 지금 딱 하나만 더 먹을 순 없을까요? 으, 물론 이미 오늘 분을 받았지만, 그럼 다음 분량을 당겨서라도…….”
옆에 있는 동료 공략자는 여태껏 12시간마다 한 번씩 초콜릿 과자를 나누어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양으로는 도무지 못 견디겠으니 말이다.
“이제 거의 다 떨어졌는데요.”
“네에?!”
“진정하세요. 그래도 에스더 씨가 하루 버틸 정도는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짧게 중얼거린 그 남자는 이내 호주머니를 털어 남은 과자를 상대에게 모두 건넸다.
“자요. 저녁이랑 내일 오전 분까지 해서 이번이 끝.”
벌써 마지막이라니.
하긴 생각해 보면 그의 외투에 비스킷이 있었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행운이었지만…….
“어.”
그때였다.
에스더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동료에게 말했다.
“잠깐만요. 이걸 2개 다 제게 주시면 어떡해요. 기려 씨 몫이 없잖아요. 하나는 기려 씨가 드셔야죠.”
그러자 네 번째 S급의 평온한 소리가 천천히 동굴을 채웠고 말이다.
“괜찮아요. 그거 뻥이었어요.”
“네?”
“어차피 계속 에스더 씨 몫만 계산하고 있었다고요. 처음부터 내 거라고 생각 안 했으니까 먹어요.”
“…?”
“끼니마다 이런 걸로 실랑이하면 힘 빠지니 그냥 대충 나눴다고 했던 거였……. 아니, 잠깐. 쓸데없이 염분 나가게 지금 뭐 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