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189
187화. 나흘과 일 초의 길 (4)
글썽글썽.
에스더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무기질이 아까우니 그러지 말라는 매정한 타박을 들어도 그칠 수가 없었다.
이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분함과 공포가 공존하는 복합적인 감정 표현이라.
“뭐라고요?!”
에스더는 김기려가 여태 굶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한편으로는 화도 났다. 소지한 식품이 두 사람이 나누기엔 부족했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그렇다면 자신도 그렇게 덥석덥석 받아먹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든 양보를 하려 했을 텐데!
저 남자는 그 걱정 섞인 실랑이마저 싫었다는 건가.
무서울 만큼 합리적이지만 동시에 이기적이기도 하다.
“아니! 후유증으로 몸도 안 좋은 사람이…….”
고리대금업자조차도 서로의 동의 없는 빚을 만들진 않는 법. 하지만 어떻게 저 사람은 이런 잔인한 짓을 할 수가.
***
뭐야 왜 울지?
이거 설마 식량을 혼자 소비한 게 미안해서 우는 거야?
‘엇.’
나는 대뜸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에스더를 보며 당황했는데, 한편으로는 지구 생물들의 선함에 감탄이 나오기도 했다.
타인을 배려하지 못함에 서글퍼할 정도로 이타적인 면모가 강할 줄이야.
‘나 같았으면 식량을 더 숨긴 게 없는지 확인하려고 옷부터 털었을 텐데……!’
헉.
현대의 알파우리인이 에스더의 모습을 반만 본받았어도 행성이 그 파탄은 안 났을 것이다.
‘흠.’
뭐 아무튼.
한창 오열하는 중에 미안하지만, 내가 음식을 섭취하지 않은 건 사실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이쪽은 육체를 원시인들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하니 적은 에너지로도 활동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고.
무엇보다 공략 초기에 이 던전의 최종 길이를 깨달아버렸으니까.
처음에는 아무리 감각을 곤두세워도 특이점이 안 보여서 큰일 났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서 4시간쯤을 더 걸어가니 드디어 탐지 범위에 우두머리 개체가 걸렸었다. 이게 첫날의 일이다.
‘이 몸뚱어리는 아사하려면 최소 3주는 필요하니 충분히 안전권이지.’
초기에 예상한 공략 시간은 5~7일.
하지만 중간마다 저 S급 헌터가 나를 들고 질주했었으니. 이제는 그 예측값마저도 크게 앞당겨져 어느덧 보스가 몇 시간 거리 앞으로 성큼 다가온 상태였고.
그래서 나는 굶어 죽지 않으리라는 걸 뻔히 알고 먹이를 양보했다.
“으음.”
훌쩍.
하지만 에스더는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충격 속에서 눈물을 쏟아낸다.
얼마 안 가 던전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바로 그칠 것 같긴 하지만. 그걸 위해선 지구인의 영역에서 벗어난 탐지 기능을 까발려야 하는 상황.
‘돌이켜보면 마탑의 미로를 그렇게 깬 것도 영 경솔한 짓이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게다가 동료 공략자에게 미안할 짓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어흠.”
몇 분 뒤.
길을 걷던 나는 옆에 서 있는 에스더의 눈치를 슬슬 보다가 이번 분수대에서 잠시 쉬어가자고 권유했고, 그녀가 분수대의 물로 부어오른 눈을 가라앉히는 사이 온 길을 몇 걸음 되돌아갔는데.
“콜록콜록~! 어흐흠. 커흠!”
이 억지 기침에서 알 수 있듯이 이쪽은 체력이 떨어질 때마다 대충 환자 시늉으로 휴식 시간을 버는 중이다…….
아무리 효율적으로 다뤄봤자 이 몸뚱어리는 S급의 신체 능력을 따라갈 수 없으니까. 몇 시간 정도 내리 걷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고비가 오는 법.
‘어우, 다리 저려.’
처음에는 하필 [신성나무 묘목]의 부작용이 발현되는 때에 갇혔다며 투덜댔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각혈 증세는 멈춘 지 오래이나, 이렇게 대놓고 컨디션이 안 좋은 척을 하면 신체 능력을 드러내는 상황-질주-을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을 터.
‘다른 건 몰라도 F급인 것만은 정말 숨겨야 해.’
휴.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분수대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한결 차분해진 얼굴의 에스더가 있었다.
배가 고픈 건지 생각이 많은 건지 다시 급격히 말수가 줄었지만, 어차피 그것도 얼마 못 갈 일이지.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우리는 드디어 이 기나긴 터널의 끝을 맞이했으니.
“잠시만요, 에스더 헌터.”
“…네?”
“저기 땅 밑에요. 뭔가 다른 몬스터가 있어요. 기운이 일반 몬스터보다 강한 것 같은데 이거 혹시-.”
콰과과광!
앞을 가리키고 있던 손가락이 굉음을 듣고 스르륵 내려간다.
에스더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격을 감행했다. 분명 저 여자는 근접전에 관련된 마법이 없거늘 그저 정권을 지른 것만으로도 바닥이 갈리고 주변이 무너지고.
충격의 여파로 땅속에 숨어 있던 몬스터들은 일격에 비명횡사를 당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는 내가 미리 감지했던 F급 게이트의 우두머리가 섞여 있었다.
우우웅.
이윽고 그리운 색의 빛과 함께 앞에 출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드디어, 마침내!
“어?”
던전의 길이를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던 나마저도 이렇게 기쁜데 저쪽은 오죽할까?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에스더는 생성된 출구를 마주하자마자 생경한 반응을 보였다.
죽은 동태처럼 가라앉아 있던 눈에 빛이 돌아오고, 굽은 어깨와 등은 수술을 당한 것처럼 단숨에 펴지는가 싶더니.
“아!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죠? 세상에, 기려 씨. 살았어요! 이제 정말 살았다고요! 정말 어떻게 이런 악몽 같은 일을 다 겪을 수가!”
에스더는 내 손을 덥석 잡아채고 이내 눈앞의 통로로 달려갔다.
솔직히 나는 이렇게까지 급하게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F급 주제에 S급님의 이끎을 어떻게 뿌리쳤겠나.
“어?”
“헉!”
“왔다!”
어두운 통로에서 밝은 방으로 빠져나온 여파로 눈이 부셔 잠시 눈꺼풀을 닫았을 때쯤.
뇌에 시끄러운 청각 정보가 먼저 닿았다.
“길드장님!”
“맙소사, 대표님!”
“김기려 헌터!”
알고 보니 이 통로가 우리가 들어갔던 게이트 입구와 정확히 같은 위치에 생성된 모양이라.
감았던 눈을 떠보니 눈앞에 많은 인물이 보인다. 그곳에 있는 것은 중무장 상태의 헌터들이었다.
소속을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 겉만 봐서는 어디 출신인지 모르겠지만, 이 장소의 특수성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대부분이 한국마탑 사람일 터.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이어서 비장한 기색이 감도는 일행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등장한다. 한국마탑의 수행비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간의 개요를 설명했다.
우리가 F급 게이트에 갇힌 첫날.
바깥에 있던 한국마탑 측은 던전의 입구가 갑자기 소실된 것을 확인하고 그동안 해결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나 뭐라나.
“조금만 더 늦으셨어도 오늘 9시 뉴스에 실종 속보가 뜰 뻔했어요!”
이곳의 헌터들은 혹시 모를 비상 상황에 대비해 모아둔 전력인 듯했다. 어쨌든 지금 보는 것과 같이 게이트의 출구는 입구가 발생했던 장소에 뚫릴 가능성이 높았으니.
“다들 고생했어요. 바깥에서 있던 일은 보고서로 작성해서 주말 전까지 내 책상 위에 올려놓도록 해요. 잠깐, 그런데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목요일이요. 대표님.”
끝났다.
그렇게 우리는 장장……. 4일 하고도 1초가량이 걸린 게이트 탐색을 완료하게 됐다.
에스더가 길드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는 고개를 돌려 대표실의 창밖을 살핀다.
던전에 들어갔을 때 보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봄 날씨.
아니,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여름인가.
“…….”
의외의 사건에 흔들리긴 했지만, 한국마탑의 길드장은 한 집단을 이끌어나가는 인물답게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급속도로 여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이 여유를 기반으로 긴장한 길드원들을 진정시킨다.
-저벅, 저벅.
하지만 자신 쪽으로 누군가가 다가오자, 그녀는 모든 대화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데.
“에스더 씨, 잠시 사람들 좀 물러주세요.”
“네?”
이쪽이 뜬금없는 부탁을 하니 에스더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다행히 고민이 길진 않았다.
“어머, 길드원 여러분.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 제대로 씻지도 못한 상태네요? 그런 의미에서 감동의 재회는 한 3시간만 있다가 다시 하자고요. 마침 여러분도 평상복으로 갈아입을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럼 방해되는 것들을 치웠으니, 이쪽도 슬슬 뒷정리에 들어갈까.
“…자요. 이러면 됐죠? 음, 그나저나 갑자기 길드원들은 왜 물러 달라고 하셨어요?”
몇 시간 전까지는 그깟 식량 따위 없어도 거뜬히 버틸 거라 여겼거늘.
아무래도 계산이 살짝 어긋난 것 같다. 각혈의 여파로 생각보다 몸에 무리가 왔는지 아까부터 눈꺼풀이 무겁다.
나는 떨리는 눈 근육을 고정하고 반듯한 모습으로 뜻을 전했다.
“제 팔이요.”
“예?”
“주삿바늘 들어가게 조절해 뒀거든요. 그러니 비싼 포션까지는 필요 없고, 일단 아무 영양제 좀…….”
앞뒤가 잘린 설명이었지만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 직후, 육신이 한계를 버티지 못하고 의식을 꺼트려 버렸으니.
***
다시 눈을 떴을 땐 언젠가 보았던 천장이 눈앞에 놓여있다.
“김기려 헌터!”
한국마탑의 회복실.
13월의 미궁 당시 선우연이 누웠던 예의 리클라이너 소파에 눕게 되자 처음 든 감상은 이 소파 편하네 같은 흔해 빠진 평가였다.
그다음은 온몸에 자리 잡은 둔통이고.
오른팔에 꽂힌 링거에서는 비타민이 섞인 노란 수액이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다.
“기려 씨, 정신이 들어요?”
그나저나 한 길드의 장이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해도 되는 건가.
저주술사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옆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인지 불쑥 작은 의자에서 일어났는데, 고개를 돌려도 그녀 외의 다른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S급 각성자가 쓰러졌다는 말이 유출돼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건 저도 아니까. 길드원들은 다 내려보내고 정말 믿을 만한 힐러 한 명만 들였었거든요.”
“아하.”
“기려 씨가 기절한 걸 아는 건 저랑 그 힐러가 전부예요.”
급한 나머지 생략한 말이 많았지만, 다행히 상대가 의도를 잘 해석해 준 모양이다. 그래. 허세를 부려서 위협을 방지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약점을 광고해서야 쓰나.
‘하여간 사기꾼으로 사는 것도 만만치 않군.’
나는 주삿바늘이 꽂힌 팔꿈치 안쪽을 구경하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설마 깨자마자 가시려고요?”
그리고 이때.
소파의 옆자리에서 에스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요. 그냥 뻐근해서 일어난 건데요.”
“그래요?”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사람처럼 한참을 어물거렸고.
나는 문득 상대가 수액 값을 청구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아무튼, 던전에선 고마웠어요.”
이어진 발언은 나의 예측에서 한참 비껴간 문장이었다. 그 S급 저주술사는 자신보다 한참 약한 존재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린 것이다.
“배려해줘서.”
에스더는 어디론가 시선을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누군가의 푸른 혈관과 차가운 바늘이 있었고. 뚝. 뚝. 그녀는 그렇게 관을 타고 흐르는 수액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리고 이 순간 나는 눈치껏 깨닫는다.
‘아하.’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한국마탑의 길드장에게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만들어버렸다고 말이다.
아마 에스더는 아까의 F급 던전에서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겪은 일련의 부작용들은 ‘겉으로만 보면’ 제법 치명적으로 보이는 증상들이었으니까.
‘에스더에게는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을 양보한 걸로 보인 건가?’
저주술사의 특성상, 그녀는 이 빚을 갚기 위해 앞으로의 부탁에 순순히 응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오!’
물론 그깟 과자의 대가로 1,000억을 요구하는 건 살짝 무리겠고.
‘솔직히 엎드려 빌면 얻을 수 있을 같기도 한데, 그 이후의 관계를 장담하기가 어렵군.’
애초에 거품이 잔뜩 끼어있는 현재의 가격 따위로는 폐를 사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변덕적으로 갑자기 드래곤이 흔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용의 둥지는 헌터가 쉽게 꼬이는 먹이 상자라 단종 걱정은 없지.’
나는 이번 일로 생긴 길드장의 빚을 비장의 패로 놓고, 활용처를 천천히 고민해보기로 했다.
S급에게 마음껏 부탁을 한다는 기회는 재화를 주고도 사기 어려운 개념. 따라서 섣불리 물질로 바꾸기보다는 신중함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이게 웬 떡이야?’
물론 강자에게 일생일대의 부탁을 해야 할 만한 일이 금세 생기진 않을 것 같지만.
이 정도면 신성나무의 약점을 보인 손해를 메꾸고도 남는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