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190
188화. 일상
‘흠.’
몇 분 뒤.
나는 몸도 충분히 회복됐겠다 에스더와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나왔는데, 한국마탑의 정문의 계단을 밟을 때쯤이 되자 익숙한 자극이 감각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심약한 일반인인 정도는 선뜻 넘어트릴 수도 있을 과격한 마력.
깜빡. 깜빡. 깜빡.
정문 앞에 세워진 SUV가 방향지시등을 켜 존재를 알린다. 그리고 이내 운전석에 앉은 거구의 남자가 보조석의 창문을 열고 몸을 기울여 말했다.
“안녕, 김기려.”
“…….”
“[마탑 길드에 생긴 블루 게이트를 잠깐 보고 올게요. F급이니까 따로 와보실 필요는 없어요.]라고 문자로 보고한 지 딱 나흘하고 다섯 시간 만이네.”
“죄송합니다.”
“일단 탈래? 식사가 아직이면 점심도 챙길 겸.”
“죄송합니다.”
“메뉴는 초밥으로 괜찮지?”
“의도한 것이 아니니 부디 향상심만은…….”
***
토요일 오후.
한적한 체육관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
이곳은 서울에 위치한 어느 각성자 전용 훈련장이었다.
솔직히 훈련장이라고 해 봤자 무언가 대단한 설비가 갖춰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요술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충분한 장점이라. 이곳은 이전부터 각성자들이 많이 찾는 장소였다.
예를 들어, 이 자리에 있는 유명 헌터들처럼.
‘이걸로 오늘 대관 시간도 슬슬 끝이군.’
나와 정하성은 현재 전세 낸 체육관에서 평소의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스킬 교습이 어느덧 6주 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우리는 처음으로 작은 문제에 직면했다. 하성이 지난 4주 차에 가르친 완전연소의 적용을 좀처럼 익히지 못하고 있는 탓이었다.
‘뭔가 좀 늘어지네.’
화염 마법은 마력을 소모해 위력을 올리는 방법 외에도, 연소의 방식 자체를 바꾸어 불꽃 온도를 올릴 수 있거늘.
정하성은 마법을 푸른색으로 바꾼다는 과정을 의외로 힘겨워했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오히려 이런 부진이 환영이다.
‘예상보다 강의료를 더 오래 뽑아먹을 수 있겠는데?’
그런데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강사의 입장과 달리, 눈앞의 원시술사는 날이 갈수록 표정이 시들해졌다.
“하…….”
이제는 속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도 참지 못하는 걸 보니, 본인의 상황이 어지간히 답답하긴 한 모양.
‘흠.’
전생에 그 같은 학생들을 많이 만나 봐서 아는 건데, 정하성은 과거에 높은 성취를 거뒀던 인물이니만큼 –얼마 전에 알게 된 건데 저거 수의대 자퇴생이다- 이런 시련에 취약한 듯 보였다.
그런 삶을 살았으면 자신이 남들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학습할 수밖에 없는데, 갑자기 연이은 고배를 마시면 생소한 실패에 남들보다 곱절로 충격을 받아서 말이다.
딱딱한 표정. 긴장한 어깨.
국민의 영웅도 결국은 사람이니 너무 성과가 안 나오면 어느 날 흥미를 잃고 다 때려치우려 들 수도 있다.
그러니 앞으로의 고용 안정을 위해서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칭찬으로 좀 구슬려놔야 할 터.
“정하성.”
사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S급은 항상 약자를 편드는 선인이라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나는 하성을 배려해 말했다.
“그거 알아?”
“예?”
“네 각성 능력 말이야. 파이로 키네시스라고 부르는 그거.”
“네.”
“언론에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흔한 계열이니 뭐니 하며 저평가할 때가 많잖아.”
불.
지구에서는 문명의 기원을 상징한다는 원초적인 개념.
여기 사람들은 기껏해야 귀여운 불장난 좀 벌이는 게 다지만, 나는 이미 전생에서 발화 마법의 극의를 보고 온 만큼 이렇게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마력이 충분한 사람에 한정해서 오히려 손꼽히게 좋은 계열이야. 계속 수양하다 보면 나중에는 방어구 자체가 필요 없게 될 수도 있고.”
정하성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모로 기울인다.
“방어구라니요?”
어디로 보나 공격에 치중된 듯한 요술에 대고 갑자기 방어구가 필요 없어질 거란 소리를 하니 어이없겠지.
하지만 이곳의 주민들도 훗날엔 다 알게 될 거다.
아무리 쓰레기 같아 보이는 속성이라도 갈고 연마하다 보면 결국 공방 일체를 이루기 마련이라.
해에 대고 돌멩이를 던진다고 변하는 건 없는 법.
과연 정하성이 내가 생각하는 그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네 잠재력은 아직 한참 남아 있으니까. 당장 일희일비하지 말고 좀 차분하게 진행하자는 거지.”
나는 최선을 다해 용기를 북돋아 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하성은 어찌 보면 나만큼이나 표정 변화가 드문 사람이라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만 봐선 무슨 생각을 하는질 모르겠으니 원.
“아무튼 슬슬 정리하고 갈까?”
그래도 이만하면 장족의 발전이리라.
솔직히 영웅 나리가 [일몰의 검]으로 냅다 참격부터 날린 순간이 아직도 아른거리는데, 열심히 발버둥친 대가로 이렇게 1위와 얼굴을 맞대고 다닐 날도 오다니.
“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든 생각이지만, 숨겨둔 등급이 밝혀지는 날에는 아마 이놈이 날 오체분시하겠지?
재산을 야금야금 가져가는 건 둘째치고 일단 S급인 척하면서 온갖 비방을 해댔으니까?
‘레전더리 무기의 예리함을 직접 경험할 날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제자의 허리에 걸린 붉은 검을 흘긋거리며 체육관을 나섰다.
그런데 웬걸.
평소 같았으면 휑한 공터가 시야에 들어왔을 텐데 오늘따라 후문 밖에 예상치 못한 그림이 펼쳐졌다.
“음?”
출구에 웬 인간이 우두커니 서 있던 것이다.
“저기, 실례합니다.”
딱 봐도 우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린 것 같은데…….
‘뭐야?’
말을 건 사람은 처음 보는 모양새의 지구인이었다.
30대 정도 되는 나이의 안경을 쓴 여성.
나는 상대의 정체가 궁금해져 시선을 고정했는데, 이내 여자가 다음 마디를 꺼냈다.
“이건 뭔…….”
“갑자기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연락을 도통 받지 않으셔서, 주말에는 이곳에서 훈련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득이하게 직접 오게 됐네요.”
연락을 받지 않았다니?
나는 그 말을 듣고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하지만 그곳에 부재중 통화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새로운 전화가 왔으면 어련히 받아봤을 텐데.
“연락이 온 적이 없는데요?”
“네? 문자를 남겨놨는데 안 갔나요?”
“안 왔어요.”
“아이고, 그럼 기관에서 연결해 준 번호가 잘못됐었나……?”
어쨌든.
상대는 직후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보인다.
[한국던전자원연구소] [김 ○○] [선임연구원 / 이학박사]그런데 거기에 쓰인 글자를 다 읽기도 전에 추가로 설명이 터지더라고.
“여하튼! 제가 이렇게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기려 헌터님에게 국가 연구 협조 요청을 드리려 했습니다! 정확히는, 경호 일인데요!”
진짜 이건 뭔 상황이람.
뜬금없이 나타난 지구인은 내게 호위 의뢰를 맡기러 왔다고 말한다. 물론 그곳에 감춰진 속뜻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던전 자원.
일반인이 그런 별세계의 물질을 탐구하려면 당연히 몸을 보호해 줄 이를 구해야 할 테니.
“저희 연구소는 얼마 전부터 [신록의 성소]라는 난도 A급의 게이트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프로젝트의 중간 책임자고요.”
“그래서요?”
“그래서 연구를 도와줄 각성자가 필요해진 상황인데, 저번에 구했던 A급 헌터분들로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S급 헌터의 힘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 연구원은 이어서 말했다.
“원래는 이렇게 급히 문의드릴 게 아니고 공문으로도 천천히 알려드릴 예정이었는데요. 아, 이게 참. 미리 잡아둔 던전의 마물 증식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 중이어서…….”
좋다. 여기까지는 무사히 이해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부분.
“어, 그런데 왜 하필 저를 콕 집어 찾아오신 거죠?”
던전을 안전히 탐사하기 위해 S급의 경호원을 바랐다는 건 알아들었다. 하지만 한국의 S급 헌터라면 나 말고도 좋은 선택지가 많지 않던가?
당장 옆에 서 계신 저 랭킹 1위도 그렇고, 탑에 사시는 자주색 머리 술사님도 그렇고.
뭐 나머지 하나는…….
‘그래. 그건 없다고 치자.’
좀 하자가 있지만.
아무튼, 나는 랭킹 1위와 2위를 건너뛰고 굳이 9위를 찾아온 저 사람의 사고가 영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 건 당연히 정하성부터 찔러봐야 하지 않나?
‘얜 대외적인 이미지까지 좋잖아.’
나는 고개를 돌려 뒤에 멀뚱히 서 있는 S급을 쳐다봤다.
바른 가르마와 호감형의 인상을 지닌 국민의 영웅은 살짝 당황한 눈치로 어색하게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강한 각성자가 필요했던 거면 정하성 헌터도 좋은 선택지이지 않나요?”
그런데 내가 제안하니 그 지구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안 돼요.”
“예?”
“그 던전은 4평 상당의 작은 방이 기차 칸처럼 붙어있는 구조라. 각성 능력의 2차 피해가 큰 여타 계열분들과는 아무래도 협력이 어렵습니다.”
“흐음.”
“그런데 김 헌터님은 안 그래도 요인 경호 쪽에선 유능하시다니까. 게다가 실제 성격도 아주 좋으시다고…….”
잠깐, 그런데 저건 또 무슨.
“뭐라고요? 그런 소리를 대체 어디에서 들으셨어요?”
인간 호위 따위는 태어나서 해본 적이 없거늘. 저 수상하게 좋은 평판은 어디에서 솟아 나왔단 말인가.
“어, 어어. 굳이 말하자면 저희 아버지요. 사실 저희 아버지가 헌터 업계에서 두루두루 발이 넓으신데, 요즘 기려 씨에 대한 좋은 평을 자주 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경호를 구할 거면 그 사람한테 한번 말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혹시 아버님의 성함이?”
“김 범 자 식 자 되십니다.”
김범식은 또 누구야…….
하여간 답변을 들을수록 오히려 미궁에 빠진다. 누군가가 내 성격이 아주 좋다고 말하고 다녔다니.
‘안윤승이 퍼트린 괴소문이 와전된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눈앞의 장년인은 이 순간에도 해맑게 너털웃음을 지어올 뿐이라.
“사실 예전부터 헌터님의 인상을 볼 때마다 참 일 처리에 있어서 깔끔하실 것 같다고 상상하긴 했는데, 어려운 경호 업계에서도 이렇게 평이 자자하시다니.”
“….”
“역시 몇 번을 생각해봐도 저는 전문성이 있는 김 헌터님께 협조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괜찮다면 협상을 위해 월요일쯤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웃는 얼굴에 침 뱉는 꼴 같아 좀 마음에 걸리지만…….
“죄송하지만 거절할게요.”
“네?”
그래도 슬슬 이쯤에서 현실을 알려줘야겠다.
나는 상대의 부탁에 거부 의사를 밝혔다.
왜냐? 그야 이쪽은 경호는커녕 제 몸이나 겨우 건사하는 폐기급의 능력자니까.
실제로는 내가 보호를 받고 다녀야 할 판인데, 갑자기 연구원을 지켜달라는 요청을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 그렇지만 헌터님은 국가 차원에서 하는 조사는…….”
“어디에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진 모르겠지만.”
툭.
나는 그의 문장을 중간에서 자른 뒤 말을 이었다.
“저는 연구원 보호 같은 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애당초 그런 일에 적합한 각성 능력도 아니고요.”
사실은 그냥 F급이라 못하는 거지만 말이다.
“그, 그러셨나요?”
곧이어 연구원은 깜짝 놀란 얼굴을 한다.
저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상대는 내가 의뢰를 받을 거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듯하지만.
“어……. 그렇군요. 아무래도 제 쪽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좀 다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 어, 그, 그럼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좋은 오후 되세요.”
다행히 귀찮을 일은 없었다.
그 연구원은 의외로 체념이 빠른 편이었고, 당혹스러운 눈치로 고개를 갸웃대면서도 이내 자리를 비켜줬다.
터덜터덜.
나는 힘없이 돌아가는 연구원의 등을 보며 말했다.
“정하성, 혹시 네 귀에도 요즘 내가 경호 일을 잘한다는 둥의 괴상한 헛소리가 들어오든?”
이에 대마법사의 제자는 반듯한 목소리로 답한다.
“…아니요. 대신 예전에 사채업을 하셨었단 소문이라면 들어본 것 같습니다.”
그래. 차라리 저런 거라면 예상이라도 가능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