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169
168화
-정결의 섬(1)
출항한 뒤로 매일같이 훈련이 반복되는 항해였다.
이미 먼바다로 나온 네레우스의 배 위에선 코딱지만 한 섬 하나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일행들도 슬슬 향수병, 정확히는 육지를 그리워하는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땅 위를 밟지 못하는 게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어.”
훈련을 마치고 초췌한 얼굴을 한 나진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항해 자체는 S급 아티팩트인 네레우스의 배 덕분에 멀미도 없고, 던전에서 신선한 식료품이 조달되는 양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압박은 무시할 수가 없는 법이라서 장기간의 항해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이 나왔다.
결국, 이현은 몇몇을 던전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다행히 워터게이트를 언제든 발동시킬 수 있는 바다 위였고, 던전으로 돌아가면 익숙한 한국의 땅을 걸을 수 있었다.
“이현아, 미안해, 진정되면 바로 돌아올게.”
“걱정하지 말고 푹 쉬다 와요.”
이현은 미안해하는 나진을 던전으로 보냈다.
디르케마저도 조금 힘들어하는 것 같아 이현은 리코스가 회복되는 대로 그녀도 던전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애석하게도 이현의 던전에 소속되지 않은 생명체는 [워터게이트]를 통해 던전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때문에, 알 역시 던전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알을 돌봐줄 리코스가 오지 않는 이상 디르케가 알을 내버려 두고 갈리도 없고.’
이현의 예상대로 디르케는 리코스의 회복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아쉽다. 나도 현네 던전이라는 곳에 한 번은 가보고 싶었는데.”
알처럼 게이트를 통과할 수 없었던 이아코스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댔다.
이현은 그런 이아코스의 곱슬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언젠가 한 번 구경시켜줄게.”
“정말?”
“대신 너도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물론이지! 말만 해!”
이아코스가 기쁨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이거 어째 좀 찔리네.’
이현은 신이 나서 배 위를 뛰어다니는 이아코스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기회가 된다면 이아코스를 [쌍무적 계약]으로 부하로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이 잘 풀리면 신격을 각성한 이가 내 부하가 되는 거니까.’
만약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어를 통하게 하는 이아코스의 권능은 충분히 도움이 될 터였다.
‘뭐든 이 여행이 끝이 나야 알 수 있겠지만.’
이현은 이아코스에 관한 생각을 잠시 집어넣고, 새로 합류한 일행들을 환영했다.
“압 아니, 삼촌!”
“명을 받고 왔습니다.”
[워터게이트]를 통해서 배 위에 오른 일행은 민아와 열 명가량의 사우레노르 구울 병사였다.이현은 냅다 안겨 오는 민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네. 보고 싶었어요.”
부끄러운지 작게 속삭이는 민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민아야 저번에도 말했지만, 여긴 놀러 오는 곳이 아니야.”
“삼촌, 걱정하지 마세요. 잘 싸울 수 있어요. 할아버지랑 훈련도 많이 했어요.”
겉모습은 어린아이였지만, 정신적으로는 훌쩍 성장한 민아가 마혈소총을 들어 보이며 자신을 내비쳤다.
이현은 의젓해진 민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구울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너희에게도 경계와 감시 임무를 맡길 테니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해.”
“알겠습니다, 보스!”
먼저 던전으로 돌아간 리코스가 전파했는지, 병사들이 전부 자신을 보스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현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지만, 어쩌겠는가.
어디서 나진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잠이 필요 없는 언데드 병력이 건너옴으로써 세멜레에 대한 감시는 더욱 쉬워졌다.
특히 민아는 이현이 쉬라고 해도 항상 총구를 세멜레에게 겨누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감시를 계속 이어나갔다.
“삼촌을 괴롭힌 사람 아니, 사우레노르는 용서 안 해.”
그렇게 말하며 눈에서 불을 피우는 터라 이현도 말리지 못할 정도였다.
‘정 힘들면 구울 병사들에게 맡기도록 당부해놨으니 괜찮겠지.’
이현은 구울 병사들에게도 세멜레에게 눈을 떼지 않도록 명령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감시의 대상이 에키온 가문의 가주라는 걸 알고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그렇다고 흔들리진 않았다.
그들의 절대적인 보스는 이현이었으니까.
일행을 교체하고 다시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리코스도 몸을 전부 회복하고 디르케와 교대했고, 민아도 걱정하는 부모님을 위해 한 번 돌아갔다 왔다.
그 후, 특이한 점이라곤 공원 사람들이 던전 밖으로 나와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었지만, 이현이 반대했다.
나와봤자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위라는 것이 이유 중 하나였고, 한가롭게 놀기 위해 교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두 번째였다.
유일하게 교대하지 않은 건 이현과 이아코스였다.
이아코스는 던전으로 갈 수 없기도 했지만, 바다를 보고 평생 자라 와서 그런지 향수병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반면, 이현은 3성의 격이 정신을 보호해주는 덕분에 육지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그런 고로 계속 배 위에서 함께한 두 사람은 어느새 친형제처럼 친해져 있었다.
“현, 무슨 소리 안 들려?”
“응? 안 들리는데.”
여느 때처럼 훈련을 마치고 갑판에 누워 있던 이현은 귀찮은 나머지 이아코스의 말에 대충 대답하고 있었다.
“일어나서 제대로 좀 들어 봐.”
“귀찮아.”
배 위에서도 할 거라곤 훈련밖에 없으니 이현의 훈련 강도도 날이 갈수록 강해져 갔다.
재능만 없다뿐이지 이현은 던전에 휘말린 이후로 가장 완벽한 몸을 만들어냈다.
군살 하나 없는 완벽한 실전 근육이 이현의 몸을 조각상처럼 빚어내고 있었다.
그 대신 격렬한 체력 소모로 이현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데도 가만히 있고 싶네.”
“그게 무슨 소리야? 어쨌든 소리 나는 건 진짜야. 빨리 와보라고 하는데?”
이현이 꿈쩍도 하지 않는 것과 달리 이아코스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야! 어디가!”
“뱃머리 쪽이야!”
“뱃머리?”
이아코스가 뱃머리로 달려가는 걸 확인한 이현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처음 마스티하의 눈물을 인어 즉, 네레우스의 딸들에게 주기 시작한 이후로 뱃머리는 그들과의 만남의 광장이 되어 버렸다.
그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는 건, 인어들이 말을 걸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현은 서둘러 이아코스를 따라 뱃머리로 향했다.
“무슨 일이야, 혹시 네레우스의 따님들이 무슨 말이라도 하셔?”
이현이 허겁지겁 뱃머리로 다가가 묻자, 뱃머리 밑으로 몸을 내밀고 있던 이아코스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들를 곳이 있다는데?”
보름 동안의 항해 중에 첫 기항지가 정해졌다.
* * *
그동안 배를 잘 이끌어주던 네레우스의 딸들(네레이데스)이 갑자기 항로를 변경해야겠다고 통보해왔다.
“판가이온에 가기 전에 꼭 들러야 하는 곳이래.”
이아코스가 있음에도 이현은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아코스는 가능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42일의 시간 중에 벌써 20일이나 소모했기에 이현은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절차가 그 섬에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네레이데스들은 바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반나절도 가지 않아 이현의 배가 정착할 섬이 보였다.
“다들 하선할 준비!”
이현의 말을 알아들은 것마냥 네레우스의 배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적당한 만으로 들어가 모래톱 위로 올라갔다.
꽤 크기가 있는 네레우스의 배가 모래톱 위로 올라가면 나중에 다시 띄울 일이 걱정이지만,
“네레이데스들이 있으니 문제는 없겠지.”
밀물이 들어오면 그녀들이 알아서 배를 빼내 줄 터였다.
“자, 그럼 상륙을 시작해볼까?”
마치 영화 속의 해적이 된 느낌이 들어 이현은 저도 모르게 들뜨기 시작했다.
강화된 몸으로 배에서 사뿐하게 뛰어내려 모래톱 위에 올라선 이현은 오랜만에 밟는 땅의 느낌에 씩 웃었다.
“격이 보호해준다고 해도 나도 조금은 땅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네.”
그렇다고 흙에 입 맞추며 기뻐할 생각은 없었다.
세멜레를 감시할 구울 병사들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도 이현의 강화를 받은 채로 배 위에서 뛰어내렸다.
“여기 하와이 같다.”
하와이에 가본 적이 있는 나진이 눈을 황홀하게 빛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새하얀 백사장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긴장을 풀면 안 됩니다.”
알 부화함과 디르케를 안고 배에서 뛰어내린 리코스가 사방을 경계했다.
알을 한 번 잃을 뻔한 이후, 리코스는 다시는 방심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그의 긴장을 풀어준 건 디르케였다.
“긴장 풀어. 네레이데스들이 안내해준 이곳이 위험한 곳일 리 없잖아.”
디르케의 말대로 섬의 해안가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언니, 같이 놀아요!”
민아와 나진은 파도가 밀려오는 해안가에서 발장구를 치며 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현도 긴장을 살짝 풀 무렵이었다.
“즐거워 보이니 다행이야.”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에 이현이 몸을 홱 돌렸다.
그간의 훈련 덕분인지 어느새 도끼와 하르페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누구지?”
이현의 고함에 다른 일행들도 노는 것을 멈추고 순식간에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리코스와 디르케는 알과 이아코스를 보호하는 위치로, 나진과 민아는 각자의 무기를 들어 당장이라도 싸울 준비를 마쳤다.
“해칠 생각은 없어. 정말이야.”
“당신은…….”
이현에게 말을 건 존재는 놀랍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네레우스 님의 따님?”
“정답!”
상체는 반투명한 물의 여인, 하체는 파도 거품으로 이루어진 물고기 꼬리를 가진 인어가 활짝 웃었다.
“안녕, 난 갈라테이아라고 해.”
해맑게 자기소개를 하는 인어는 바다의 님페, 네레이데스였다.
* * *
갈라테이아.
네레우스의 딸인 바다의 님페 네레이데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로 유명했다.
포세이돈의 아들인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와 아름다운 소년 아키스와 삼각관계였던 걸로 유명한 님페였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이름의 뜻조차 ‘우윳빛 살결’일까.
“너무 예쁜데?”
나진이 숨이 막힌다는 듯 감탄했다.
뭍으로 올라온 갈라테이아는 반투명한 몸이 아니라 인간과 유사한 몸으로 변해 있었다.
그 이름의 뜻처럼 우윳빛 뽀얀 살결에 조개껍데기로 만든 듯한 오색 빛의 옷을 걸친 아름다운 미녀로.
“이현아, 정말 예쁘지 않아? 방송국에도 저 정도로 예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글쎄요.”
호들갑을 떠는 나진과 달리 이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격의 보호를 받는 이현의 정신은 갈라테이아의 외모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현이 아예 목석이 된 건 아니었다.
평범하게 예쁜 사람에게는 두근거리기도 했다.
그런 이현의 정신이 보호를 받고 있다는 건, 갈라테이아의 외모가 일종의 정신공격이라는 소리였다.
‘인간이 아닌 신에 가까운 존재라서 그런 건가?’
거기다 신화 속에서 그녀에게 반했던 키클롭스 폴리페모스를 떠올리니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미모에 반했다가 오디세우스의 계략에 눈을 잃은 키클롭스.
‘크라쉬의 종족이 키클롭스였지.’
방금까지 즐거웠던 기분도 곧 싸워야 할 크라쉬를 떠올리니 빠르게 사라져 갔다.
“어쭈? 내 미모가 안 통하네?”
그런 이현을 보고 갈라테이아가 신기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미모가 통하지 않는 건 이현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죽은 몸인 데다 아내 일편단심인 리코스와 그녀의 미모도 빛이 바래게 만드는 미모를 가진 이아코스도 마찬가지였다.
“와씨, 필멸자 주제에 더럽게 잘생겼네.”
심지어 갈라테이아는 의식적으로 이아코스의 옆에 서길 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철없는 아이 같아 보여서 이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딘가에 있는 정령이랑 똑같네.’
자신의 미모가 통하지도 않는 데다 실소까지 흘리는 이현을 보고 갈라테이아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뭔가 굉장히 무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