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366
365화
-재회(3)
“장 형!”
늙은 하인의 말에 다른 이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어찌 아가씨를 저 마교 아니, 무뢰배들이랑 엮는단 말이오!”
마교라는 이름을 내뱉으려다 이현의 무서운 눈길에 찔끔하긴 했지만, 하인들의 분노는 격렬했다.
3대 제자라는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저씨가 월검장에서 오래 일하셨고, 아가씨와도 친근한 사이라는 건 알지만, 무례하오!”
“맞소! 어디 엮을 데가 없어서!”
“조용!”
언성이 높아지는 이들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 이현이 발을 한 차례 굴렀다.
내공을 실어 땅을 구르자 묶여 있던 이들이 한 차례 들썩일 정도로 강한 진동이 땅을 타고 퍼져 나갔다.
“그 유주라는 아가씨가…….”
이현의 입에서 유주라는 아가씨의 이름이 나오자 무인과 하인들의 눈이 분노로 번뜩였다.
‘어지간히 존경하는 사람인가 보네.’
모두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는 걸 보니 평소에 그녀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이현은 알 것 같았다.
“유아주일지도 모른다고?”
이현의 말에 늙은 하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유주 아가씨는 어릴 적 아주라는 아명(兒名)으로 종종 불리셨지.”
“아이 아(兒)를 써서?”
“그렇지. 물론 장문인이나 1대 제자분들처럼 친분이 깊은 분들만 부를 수 있는 호칭이었지만,”
거기까지 말하자 늙은 하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종종 바깥나들이를 도와준 이 노인네에게도 아주라고 부르는 걸 허락해 주셨다오.”
“아주의 진짜 이름이 유주였다는 거지? 누나, 뭐 들은 거 있어요?”
이현이 나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영약을 건네주고 다른 일에 바빴던 이현보다는 스승이었던 나진이 더 잘 알 것 같아서였다.
“아주한테는 들은 게 없긴 한데, 옛날 중국 드라마에서는 그런 장면을 본 거 같긴 해.”
“무협지에도 종종 나와요!”
“그쵸?”
티타니아가 지원 사격을 하자 나진이 힘을 얻은 듯 얼굴이 밝아졌다.
이현의 표정은 미묘했지만.
“그런데 아주는 8살이잖아요? 거기다 이곳 기준으로는 던전을 떠난 지 몇 시간도 안 되었을 텐데.”
“아.”
이현의 말에 티타니아와 나진이 할 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녀들이 생각해도 4시간 만에 호칭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이현은 그런 둘을 내버려 두고 늙은 하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유주 아가씨라는 사람은 몇 살이지?”
“어흠, 큼.”
이현의 물음에 무인과 하인들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해 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늙은 하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양갓집 규슈의 나이를 함부로 묻다니. 무례하지만, 이곳 사람이 아닌 거 같아서 한 번만 넘어가 드리겠소.”
마치 자식을 혼내듯이 엄한 표정을 짓는 늙은 하인을 보며 이현은 기가 막혔다.
“아니, 내가 알 게 뭐야.”
“…….”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예의에 뛰어나서 무작정 주먹부터 휘두르나?”
“그, 그건…….”
“시끄럽고, 대답이나 해. 몇 살인데?”
“……올해로 방년 열여덟 되시었소.”
18살.
이현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주인님, 아닌 거 같은데요?”
“그러게요. 우리 아주는 겨우 8살일 텐데?”
뒤에서 나진과 티타니아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현이 침음성을 흘렸다.
‘정말 아닌가?’
아주의 말대로라면 한창 공격을 받고 있어야 할 터인데 고작 4시간 만에 안정을 되찾은 장원과 월녀검문의 사람들.
그리고 8살 아주가 아닌 18살 유주의 존재.
그사이 게이트가 열리는 위치가 바뀐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혹시 바뀐 건 위치가 아니라 다른 게 아닐까?’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의혹에 이현은 늙은 하인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이 장원이 습격을 당한 적은 없나?”
“있소.”
이현의 물음에 늙은 하인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월검장은 멸문 직전의 위기에 처했었다오. 큰일이었지.”
“혹시 그자들 중 구천회주 범소백이 있지 않았어?”
“마, 맞소. 그 흉적이 월검장을 쳐들어왔던 무뢰배들의 우두머리였소. 그때 일을 아시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두 달 전쯤에 들었거든.”
이현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두 달 전에 아주를 통해 들었던 사건이 여기선 10년 전의 일이었다.
“이현아, 어떻게 된 거야?”
“시간의 흐름이 엉킨 것 같아요.”
이현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4시간이 지났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10년이 지나 버렸네요.”
“이유는 아마 타이미와이미 때문이겠네요.”
티타니아가 짐작이 가는 게 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타임 버그가 나타나고 시간 에너지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 게 틀림없어요.”
“넌 그걸 미리미리 좀 말해 주면 덧나냐.”
이현은 티타니아를 한 차례 타박한 뒤 침음성을 흘렸다.
“끙. 만약 이 행성에 사도가 깨어나 있었다면, 10년의 세월은 굉장히 큰데.”
그사이 각성을 몇 번이나 거쳤을지도 모른다.
이현의 말에 나진과 티타니아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우선은 아주 아니, 그 유주라는 아가씨를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흥! 너희 같은 무뢰배를 감히 아가씨가 만나줄 성싶으냐!”
이현의 말에 발끈한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만나줄걸?”
“뭐?!”
이현은 고함을 지른 사람을 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여기 계신 이분이 바로 그 아가씨의 사부님이거든.”
이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나진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얘는 사부님은 무슨. 그냥 조금 가르쳐준 걸 가지고…….”
“사부로 모시고 절까지 했으면 그게 사부인 거죠.”
“헤헤헤.”
나진이 사부님이라는 호칭에 쑥스러워하는 동안, 무인과 하인들은 다시 난리가 났다.
“헛소리하지 마라!”
“유주 아가씨의 스승은 몽중현녀(夢中玄女)시다! 어딜 감히 그분을 사칭해!”
“몽중현녀?”
꿈속에서 나타난 현묘한 여인이라는 뜻의 별호에 이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주 아가씨는 꿈속에서 몽중현녀를 뵙고 내공심법과 무공, 신비의 약을 얻고 돌아와 범소백 일당을 물리치셨다!”
“감히 그런 위대한 분을 사칭하다니!”
포박한 끈이 끊어질 정도로 분노해 날뛰는 사람들을 보며 이현과 나진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쟤들이 말하는 거, 아무리 봐도 누나죠?”
“그, 그러게? 내 얘기 맞지?”
나진은 얼떨결에 대답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몽중현녀라는 거창한 별호가 붙기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러게요. 그런 이름을 받으려면 나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티타니아도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나진과 티타니아가 누가 더 고귀해 보이냐를 두고 싸우는 걸 내버려 두고, 이현은 하인들을 향해 말했다.
“맞는지 아닌지는 본인이 오면 확인할 수 있겠지. 거기 너. 가서 유주 아가씨라는 사람 좀 데리고 와.”
이현은 가장 먼저 자신에게 덤벼들었던 유대량의 밧줄을 풀어주며 지시했다.
“너 같은 자가 함부로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맞고 갈래, 그냥 갈래?”
“가겠다!”
이현이 치켜든 주먹에 아지랑이 같은 권기(拳氣)가 일렁이자 유대량은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그냥 주먹으로도 코가 내려앉을 판인데, 권기가 실린 주먹에 맞았다간 안면 전체가 내려앉을 터.
‘어차피 아가씨가 오시면 이런 무뢰배들 따위는 한칼에 해치워주시겠지!’
몽중현녀에게 신묘한 무공을 배워 와 겨우 8살의 몸으로 절강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구천회주 범소백을 물리친 유주 아가씨였다.
유대량은 그녀가 눈앞의 이현 일행을 손쉽게 쓰러뜨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 가기 전에 이걸 가지고 가면 우리가 누군지 확실히 알 거다.”
이현은 품에서 꺼낸 작은 물건을 유대량에게 넘기며 윙크했다.
“그 아이가 특히나 좋아했던 거거든.”
* * *
소흥에 위치한 남무림맹의 절강 지부.
그곳에서 가장 화려한 전각을 통째로 전세 내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지루해. 어머니를 따라 회담장에 갈 걸 그랬나.”
눈꽃처럼 새하얀 무복에 새하얀 면사를 두르고 있는 미녀는 따분한 눈빛으로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강북 무림의 양대 산맥이라는 소림과 무당의 무공을 견식 하고 싶었는데.”
무림 역사에 있어서 전통이 깊은 쪽은 강북 무림이었다.
소림, 무당, 화산, 아미, 공동, 곤륜의 6대 문파가 오랜 세월 쌓아온 무공의 깊이는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강남 무림으로선 따라가기 힘들었다.
실제로 무공 자체만 두고는 월녀검문을 제외하곤 강남 무림에서 6대 문파와 비교할 문파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남무림맹의 맹주가 홀로 강북 무림의 대표자들과의 회담장에 나가는 것을 우려했었다.
“그래 봤자 우리 어머니가 다 이기실 테지만.”
강북 무림의 강자들이 외공으로 천하제일이라면, 남무림맹에는 내공 심법이 있다.
그녀가 꿈속에서 만난 스승에게 배워 어머니와 남무림맹에 퍼뜨린 내공심법.
그것이 있는 한 콧대 높은 6대 문파의 수장들도 강남 무림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터였다.
“그래도 심심한 건 마찬가지네.”
지루함을 참지 못한 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애검을 들고 정원으로 나섰다.
챙!
검집과 검날, 손잡이까지 눈처럼 흰색인 검이 그녀의 손에서 뽑혀 나왔다.
흰 검을 휘두르는 검후.
소검후(素劍后) 유주가 바로 그녀의 이름이었다.
“후우.”
유주는 숨을 고르고 난 뒤 천천히 월녀검문의 가전 무공, 월녀검법(越女劍法)을 펼치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흰색의 검이 빛을 번쩍번쩍 뿌리며 정원을 수놓기 시작했다.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고 유려하게 시작된 검로(劍路)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예리하고 강맹해져 갔다.
“핫!”
감았던 눈을 뜨며 유주가 기합성을 터뜨리자 희기만 했던 검날에 분홍빛 검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차앗!”
쾅!
검기가 맺힌 검이 닿은 석등이 마치 도끼로 찍은 것처럼 크게 파여 나갔다.
“이게 아닌데.”
무식하게 파인 석등을 보며 유주가 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주의 어머니이자 월녀검문의 장문인이며 남무림맹의 맹주인 협녀검 은미환의 가르침에는 한참 부족한 검이었다.
‘마치 복사꽃이 핀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검을 휘두르려무나. 마치 네가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은미환은 검기가 실린 검으로 석등을 가볍게 잘라낼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다.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했던 그 모습을 떠올린 유주는 나이에 안 맞게 아이처럼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내공 심법은 내가 어머니께 알려드린 건데, 왜 어머니의 성취가 더 높은 거지?”
몽중현녀에게 배운 춘잠토심결을 은미환에게 전수한 건 유주였다.
하지만 10년간 성취가 더 뛰어난 건 유주가 아니라 은미환이었다.
‘넌 어떤 모습에 너무 얽매여 있더구나. 아마 그게 몽중현녀의 모습이겠지. 너의 검에 힘이 실리는 건 그 때문이란다.’
은미환의 충고처럼 유주의 머릿속엔 몽중현녀 윤나진의 모습이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자태로 부러진 창을 들고서 파괴적인 일격을 뿌려대던 자신의 스승.
“그런 모습을 봤는데 어떻게 떨쳐낼 수 있겠어.”
스승의 기억은 아직도 그녀의 뇌리 깊숙이 각인된 하나의 우상이었다.
그때, 그녀를 부르는 숨 가쁜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유주 아가씨!”
“유 아저씨?”
월검장에서 일하는 하인 하나가 사색이 된 채로 그녀의 앞에 엎드렸다.
“무슨 일이에요?”
“월검장에 괴한이 침입했습니다!”
“뭐라구요?”
유주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감히, 월녀검문의 월검장을 해하려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그자들이 누구죠?”
유주가 검병을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10년 전의 우행을 반복하려는 자들이 대체 누구냔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