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bearing Tyrant RAW - chapter (1096)
봄 그리고 반가운 만남들 (3)
“감사합니다, 영주님.”
콰딘과 샤비치는 차를 마시며 접견실을 둘러봤다. 두 사람 다 영주관은 처음이었다.
접견실 내에 있는 커다란 아치형 창문을 통해 눈 덮인 정원과 분수대를 잠시 바라보던 두 사람은 고개를 돌리다가 서로 시선이 마주쳤다.
지켜보는 이안의 눈길이 무서웠는지 그들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서로 웃으며 지내면 좋잖아. 앞으로 친하게 지내도록 해.”
“예, 영주님.”
콰딘과 샤비치는 공손하게 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샤비치를 바라봤다.
콧수염을 기른 모습이 조금은 낯설어 보였다.
“갑자기 콧수염은 왜 기른 거야?”
“변장 차원에서 조금 길러 봤습니다. 아무래도 육지에 올라오면 절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감쪽같지 않습니까?”
샤비치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자랑하듯 말했다.
“글쎄, 내 눈에는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
이안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콧수염까지 기르면서 이곳까지 무슨 일로 온 거야?”
“이것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낸 샤비치는 이안에게 두 손으로 상자를 건넸다.
이안은 상자를 그 자리에서 열어 봤다. 상자 안에는 붉은 천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광택이 나는 아름다운 회백색 진주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이건 진주 목걸이잖아?”
“그렇습니다.”
상자 안에서 진주 목걸이를 꺼낸 이안은 잠시 목걸이를 감상하다가 샤비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걸 왜 내게?”
“영주님의 결혼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신부님의 예물입니다.”
“신부 예물이라고?”
“네. 오해하실 것 같아 말씀드리지만 그 목걸이는 해적질로 구한 게 아닙니다. 저희 청상어 해적단이 해적 군도의 바닷속을 석 달 동안 틈틈이 헤엄쳐 다니며 찾아낸 진주로 만든 목걸이입니다. 그러니 약소하지만 꼭 받아 주십시오.”
얼굴을 붉힌 채 쑥스러워하며 말을 한 샤비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안에게 공손하게 허리를숙였다.
“미리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영주님. 행복한 결혼 생활 되시고 토끼 같은 자식들도 여럿 보십시오.”
샤비치는 꺄뮤로 오는 내내 고민한 죽하 인사말도 잊지 않고 건넸다.
이안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손에 든 진주 목걸이를 쳐다봤다.
‘이 진주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해적군도 바다를 석 달이나 뒤졌다고?’
해적 군도 내부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희박한 확률로 질 좋은 진주를 품은 조개를 찾아 낼 수 있었다. 샤비치와 청상어 해적단 원들이 이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을지 상상이 됐다.
“왜 그런 고생을 하면서까지 이런 걸 준비한 거야? 사람 미안하게.”
“영주님의 결혼식이니까요.”
샤비치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짧게 답했다. 이안은 그의 말에 눈빛이 흔들렸다.
진주 목걸이를 손에 든 채 샤비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은 어느 순간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며 상자 안에 목걸이를 담았다.
“고마워, 사비치. 신부에게 꼭 이 선물을 전달할게. 좋은 덕담도 고맙고.”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
샤비치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콰딘은 샤비치의 선물에 흡족해하는 이안의 모습에 난감해했다.
‘샤비치 이 녀석 우습게 볼 놈이 아니군. 직접 만든 진주 목걸이를 선물하다니.’
콰딘은 불편한 기색으로 샤비치를 곁눈질했다.
‘아니, 근데 이 해적 놈은 바다에서 해적질은 안 하고 무슨 진주조개를 캐러다닌거지? 진짜 해적 맞나?’
속으로 투덜대던 콰딘은 이안과 시선이 마주치자 알아서 자신이 온 까닭을 밝혔다.
“저도 샤비치 선장처럼 영주님의 결혼식을 미리 축하해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아무래도 결혼식 당일은 하객들도 많고 영주님이 바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랬군.”
자리에서 일어선 콰딘은 이안에게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제 목숨의 은인이자 왕성의 밤거리에 평화를 되찾아 주신 영주님의 결혼식을, 이 콰딘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콰딘.”
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도 약소하나마 결혼 선물을 준비해 왔습니다.”
콰딘은 들고 온 커다란 가방에서 길쭉한 상자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상자 안에는 한 쌍의 남녀가 춤을 추는 동작을 연속으로 그려 넣은 유리등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유리등 본체 하단에 있는 태엽을 감았다 놓으면 꽤 오랫동안 유리등 겉면이 회전하면서 남녀가 춤을 추는 모습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콰딘이 설명과 함께 태엽을 감았다가 풀자, 유리등 표면에 화려하게 채색이 된 남녀가 천천히 회전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진짜 사람이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하게 추는군.”
이안이 감탄하며 탁자 위에서 회전하는 유리등을 바라보자 콰딘이 은근히 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영주님?”
드노웨아의 명성 높은 유리등 장인에게 큰돈을 주고 어렵게 주문 제작한 콰딘은 이안의 반응을 살폈다.
“물론이지. 이런 유리등은 본 적이 없어.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야.”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영주님.”
“나중에 침실에 놓으면 될 것 같아. 고마워.”
“별말씀을요.”
콰딘은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다시 앉았다. 옆을 보니 샤비치가 유리등이 신기한 듯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거참 신기한 놈을 선물로 가지고 오셨소.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소.”
샤비치의 가식 없는 칭찬에 콰딘은 속으로 잠시 놀랐다가 헛기침을 했다.
“당신이 정성 들여 준비한 진주 목걸이에 비하겠소? 샤비치 선장의 선물이야말로 날 놀라게 했소.”
“뭘 또 그런 말씀을. 흐흐.”
“몇 살이시오?”
콰딘이 묻자 샤비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답했다.
“잘 기억이 안 나오. 하지만 내가 당신 보다는 나이가 더 많은 것 같소. 내 주름이 더 많은 것을 보니.”
“그거야 바다에서 지내다 보니 그런 것이고. 아무튼 우리 동년배인 것 같으니, 편하게 친구로 지냅시다. 어떻소?”
“친구? 그것 좋은 생각이오.”
콰딘과 샤비치는 서로 악수를 나누며 껄껄 웃어 댔다. 유리등을 감상하던 이안은 고개를 들어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두 사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이안이 콰딘과 샤비치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마음이 담긴 이 선물들은 평생 잘 간직할게. 결혼을 축하해 줘서 다시 한번 고마워.”
콰딘과 샤비치는 이안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왔으니 며칠 별관에서 푹 쉬고 가.”
“영주님, 저는 저녁만 먹고 바로 성에서 나가겠습니다.”
샤비치는 해적인 자신이 이안의 곁에서 오래 머물수록 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을 읽은 이안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내 말대로 해.”
“그래도…….”
망설이는 샤비치의 팔을 콰딘이 옆에서 툭쳤다.
“아니, 무슨 해적 선장이 이렇게 소심한가? 영주님이 괜찮다고 하시는데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런가?”
샤비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털모자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편히 쉬도록 하겠습니다.”
샤비치의 말에 이안은 유쾌하게 웃다가 콰딘을 바라봤다.
“별관에 조셉 경과 막테로, 시얀이 와 있어.”
“예? 그게 정말입니까?”
왕성에서 조셉 일행과 친분을 쌓았던 콰딘은 반가운 마음에 눈을 크게 떴다.
샤비치는 다른 의미로 눈을 크게 떴다.
마차를 함께 타고 온 사람들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별관으로 가자고.”
이안은 두 사람과 함께 별관으로 향했다. 별관에서 저녁 만찬을 기다리며 쉬고 있던 조셉 일행도 콰딘과 샤비치의 등장에 놀라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떠들썩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반가워하는 그들을 한쪽에서 지켜보던 이안이 뒤를 돌아봤다.
시종장이 와 있었다.
“영주님, 저녁 만찬이 준비되었습니다.”
시종장은 봄이 다가올수록 얼굴이 더 밝아지고 있었다. 숙원하던 이안의 결혼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 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고마워, 시종장.”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긴 겨울이 끝나고 늘 그랬듯 자연스레 봄이 찾아왔다.
영주관 앞의 분수대는 다시 물줄기를 뿜어냈고, 정원의 꽃들은 따뜻한 햇볕 속에 기지개를 폈다.
봄을 누구보다도 기다렸을 이안은 차분한 마음으로 텃밭에서 호미로 땅을 일구고 있었다.
가을과 겨울에 아무것도 심지 않고 휴지기를 보낸 이안의 텃밭은 호미가 땅을 뒤집어엎을 때마다 탐스러운 토양을 외부로 드러냈다.
“론도, 이번엔 뭘 심을까?”
깊은 눈빛으로 호미질을 하던 이안이 묻자 론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
“지난해 먹은 당근이 맛있어서인지 또 생각이 납니다.”
쭈그려 앉아 호미질을 하던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론도를 쳐다봤다.
“당근은 지난해에 재배했었잖아.”
“원래 농사라는 건 한자리에 꾸준히 같은 작물을 반복해서 키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양하게 키워 보는 것도 좋겠지만, 올해 당근을 다시 재배해도 저는 이상할 게 없다고 봅니다.”
론도의 우직한 말에 이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올봄엔 당근을 다시 키워 보자고.”
웃으며 말을 한 이안은 다시 땅을 일구는 데 집중했다. 바짓단을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맨발로 일을 하는 이안의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론도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영주님, 왜 요즘은 린다 부원장님을 만나시지 않습니까? 얼마 전까지 자주 만나셨는데요.”
“그게 궁금해서 그렇게 아까부터 뜸을 들이며 내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었던 거야?”
“죄송합니다.”
론도는 머쓱해했다. 이안은 호미질을 하며 담담히 말했다.
“부원장의 신약 연구가 막바지에 이르렀어. 방해하지 않고 싶어서야.”
“그러셨군요. 저는 영주님께서 너무 차분해 보이셔서 사실 조금 걱정했습니다.”
“하하하!”
이안은 쾌활하게 웃으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봄 햇살이 은근히 뜨거워서 이안의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다.
그는 론도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론도, 내 겉모습이 그렇게 보여도 속마음까지 그런 건 아니야. 사실 텃밭을 일구는 지금도 곧 있을 결혼식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려. 무척이나 말이야.”
이안은 흙이 묻은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나는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뿐이야.”
* * *
시종장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 결혼식 예복을 입은 이안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봤다.
몸에 착 달라붙는 흰색 재킷과 일자로 길게 뻗은 바지, 구두까지 온통 흰색 일색이었다. 유일하게 색이 다른 곳이 있다면 재킷에 달린 황금색 단추였다.
“백색 예복이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영주님.”
시종장은 완성된 예복을 입은 이안의 모습이 흡족했는지 그의 주변을 한 바퀴 빙 돌며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그렇게 잘 어울려?”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올린 금발의 이안은 전신 거울 속에 비친 예복 입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종장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영주님. 세상의 그 누가 이 예복을 입더라도 영주님처럼 빛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시종장은 벌써부터 눈물이 나오려 했다
‘내가 죽기 전에 영주님의 결혼식을 보게 되다니. 이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인가.’
시종장은 이안의 부친과 조부의 결혼식을 모두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병약해 내일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던 이안이 건강을 회복해 영지를 부흥시키고 결혼까지 하게 됐으니 그가 느끼는 감정은 기쁨을 넘어 가슴이 메여 왔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돌아 서서 눈가를 훔치고 있는 시종장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본 이안은 옅은 미소를 짓다가 천천히 거울 앞에서 벗어나 침실 창가로 걸어갔다.
활짝 열린 창가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던 이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시종장이 오래오래 살아서 내 자식들의 결혼식 예복도 봐줬으면 좋겠어.”
“영주님…….”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
창가에서 돌아선 이안이 시종장을 한없이 따뜻하게 바라봤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던 시종장이 답했다.
“아닙니다, 꼭 그리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이고, 힘들다.”
결혼식을 하루 앞둔 이안은 녹초가 된 얼굴로 침실로 돌아왔다.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온 손님들을 밤늦게까지 맞이하고 온 것이다.
“결혼식을 두 번 치렀다가는 큰일 나겠어.”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이안은 두통이 밀려왔다. 결혼식 하객들이 너무 많아서 평소 잘 나서지 않던 원로원의 네 원로 들까지 나서서 손님들을 대접하며 인사를 나눴지만 그것으로도 벅차 혼이 났다.
지금 꺄뮤는 외부에서 온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아니, 대체 내 결혼식이 뭐라고 이렇게 많이들 오는 거야.”
벨로린 왕국의 모든 영주들이 참석해도 놀랄 판인데, 초대를 하지 않았는데도 선물을 잔뜩 들고 베니뇽, 크로티, 드노웨아 등지에서 수십 명의 영주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안은 이들과 단 한 차례도 만나 본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축하해 주러 멀리서 온 이들을 매몰차게 대해서는 안되기에 정성을 다해 맞이했다.
그뿐만 아니라 페르콘 왕실을 비롯한 여러 왕국의 왕실이 축하 사절단을 보냈다. 심지어 이안에게 크게 혼이 났던 크로티의 리샤르 왕도 많은 선물과 함께 대규모 축하 사절단을 보내 이안을 당황케 했다.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에딘의 부친인 알렉시놀 원로와 페르콘 왕실 사절단을 이끌고 온 3왕자 켈네비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온 이안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정신 차리자. 내일이 결혼식이다.”
두 손으로 뺨을 가볍게 두드린 이안은 의자에 앉아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피곤하면 그냥 쉬지, 왜 일기를 쓰려는 것이냐?
“오늘이 결혼하기 전 일기를 쓸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니까, 지금의 감정을 제대로 남기고싶어.”
이안은 자신의 역사가 담긴 일기장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일기를 쓰던 이안이 갑자기 펜을 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왜 그러느냐?
블란조르가 묻자 잠시 침묵하던 이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구의 가족들이 살아 있었으면 누구보다 이 결혼을 축하해 줬을 거야. 어머니도 아버지도, 내 동생 희연이도.”
-가족들이 생각났구나.
블란조르는 조금은 무거운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다가 묵직하게 말했다.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들을 위해서라도 넌 내일 밝은 얼굴로 결혼식을 치러야 한다. 네 가족들도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럴까?”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한동안 말이 없던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블란조르 말이 맞아. 행복하게 살겠어. 그래야 언젠가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눈가에 눈물이 맺힌 이안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블란조르를 바라봤다.
-그래, 그러면 된다.
블란조르도 미소를 지었다.
이안은 다시 펜을 들고 일기를 써 내려갔다. 그런 이안을 잠시 바라보던 블란조르는 창가로 걸어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안에게 새 가족이 생기는군.’
저주가 풀려 하루빨리 소멸되기를 바랐던 블란조르는 지금은 자신의 소멸이 늦어지기를 바랐다.
이안과 좀 더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블란조르, 고마워.”
등 뒤에서 들리는 이안의 목소리에 블란조르는 돌아서서 이안을 바라봤다.
-뭐가 말이냐?
“모든 게. 블란조르가 없었다면 난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야.”
블란조르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어.”
-싱거운 녀석. 어서 잠이나 자거라.
이안은 피식 웃으며 일기장을 덮고 침대로 가서 누웠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이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용의 눈은 언젠가 블란조르가 내 곁을 떠나면 그때 없앨게.”
블란조르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렇게 해라.
꺄뮤 광장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 인근 거리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집 지붕에 올라가서 광장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다.
광장에 모인 영지민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모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영주의 결혼식을 대하는 영지민들의 기쁜 마음이 자연스레 표출된 것이다.
광장 북쪽에 설치된 높은 결혼식 단상 뒤편으로 경비대와 해군 소속의 병사 수백 명이 제복을 입고 번쩍이는 창을 든 채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결혼식 단상 양편으로 많은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중앙을 기준으로 좌측엔 벨로린 왕국의 하객들이 우측엔 여러 왕국에서 참석한 하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벨로린 왕국에서는 롤만 왕과 시니아스 대영주, 샤르엘 대영주, 몽페르도 가문의 무르 영주와 에드릭 노영주를 비롯한 벨로린의 모든 영주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착석해 있었다.
테니마르 가문의 영주 카리올도 영주들 사이에서 위축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형님들, 제 결혼식도 아닌데 왜 제 가슴이 이렇게 뛰는 걸까요?”
광장 입구에서 이안이 탄 마차가 오기를 기다리던 반언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밀레아너스와 그로만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낮게 웃었고, 막내인 보엥이 반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셋째 형님, 형님뿐만이 아닙니다. 이 광장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형님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엥의 말에 반언은 헛기침을 했다.
“그렇지? 나만 그런 게 아니지?”
“예, 형님.”
보엥의 말대로 광장에 모인 대다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 결혼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원로들처럼 광장 입구에서 이안을 기다리던 재무관은 아련한 눈빛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문관에게 말했다.
“문관, 내 평생 오늘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소. 마치 왕이 결혼식을 치르는 것 같지 않소?”
“자네 말이 맞네. 왕의 결혼식이 부럽지 않은, 아니 그것을 뛰어넘는 성대한 결혼식이야.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네.”
“고생이랄 게 뭐 있겠소? 기쁜 마음으로 준비한 것인데. 흐흐흑!”
아련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재무관이 울먹이며 눈물을 흘리자 문관이 주위를 둘러보며 그를 진정시켰다.
“왜 이러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네.”
“상관없소. 오늘 같은 날 울지 않으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소. 영주님께서 결혼을 하시다니. 꼭 행복하십시오, 영주님. 소신이 매일 기도하겠습니다.”
재무관이 훌쩍이며 기도를 할 때였다.
빛나는 갑옷을 입은 호위장교 론도와 하르몬드가 수십 명의 기병들과 함께 마차들을 호위하며 광장 입구로 들어섰다.
첫 번째 마차엔 이안과 에딘이 타고 있었고, 두 번째 마차엔 린다와 아나이스, 네카모가 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마차엔 결혼식 진행에 도움을 줄 시종장과 시종들이 타고 있었다.
“와아아아! 영주님이 오셨다!”
마차 안의 이안은 광장에 모여 있는 수많은 군중의 환호성을 들으며 옆을 쳐다봤다. 에딘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결혼은 내가 하는데 네가 더 긴장한 것 같다?”
이안이 웃으며 하는 말에 에딘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대답했다.
“나도 조금 있으면 결혼하잖아. 그래서인지 너무 몰입이 되는데.”
“그래?”
빙그레 웃던 이안은 마차가 멈추고 론도가 마차 문을 열어 주자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마차에서 내렸다. 에딘도 곧장 뒤따라 내렸다.
“와아아아!”
이안이 모습을 보이자 광장에 모인 군중의 함성이 몇 배나 더 커졌다.
“결혼을 축하드리옵니다, 영주님.”
광장 입구에서 이안을 기다리고 있던 원로원의 네 원로들과 재무관, 문관, 감사원장, 정보부장, 잘랭, 해군 사령관 세리엥크 등이 공손하게 예를 차리며 말했다.
경사스러운 날이라 신하들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고맙소.”
이안은 일렬로 서 있는 원로들과 신하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몸을 반쯤 틀어 앞을 쳐다봤다. 광장을 가로질러 결혼식 단상까지 길게 이어진 붉은 카펫이 보였다.
그 붉은 카펫 좌우로 셀 수 없이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다.
이안이 붉은 카펫의 시작점으로 걸어가 서자, 잠시 후 린다가 네카모의 손을 잡고 이안이 서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순백의 긴 원피스를 입은 린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아나이스는 린다의 뒤를 따라가며 그녀의 긴 원피스 자락이 발에 걸리지 않도록 원피스의 끝을 살짝 들어 주고 있었다.
이안이 서 있는 곳에 도착한 네카모는 자신이 받쳐 들고 있던 린다의 손끝을 이안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제약원장.”
이안은 네카모에게 인사를 한 뒤 린다의 손을 잡고 나란히 섰다.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졌다.
시종장이 손짓을 하자 광장에 자리 잡고 있던 라인딘의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라인딘의 악단은 2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광장에 퍼지는 감미로운 연주 소리에 맞춰 이안과 린다가 붉은 카펫을 따라 결혼식 단상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뗐군중은 환호를 자제하며 이안과 린다가 이동하는 모습에 집중했다.
“괜찮아?”
이안이 옆에서 걷는 린다에게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그런데 왜 손끝이 떨리지?”
“제 손이 아니라 영주님 손이 떨리는 거예요.”
린다가 작게 웃으며 말을 하자 이안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내손이 떨리는 줄 몰랐어.”
“괜찮아요. 사실 전 지금 다리를 떨고 있어요. 옷에 가려져 안 보일 뿐이에요.”
“우리 둘 다 큰일이군. 힘을 내자고.”
이안의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 영향인지 몰라도 린다의 다리도 차츰 떨림이 멈췄다.
그제야 이안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슐노반.’
붉은 카펫이 깔린 길 바로 옆에 슐노반이 뒷사람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루크와 함께 앉아 있었다.
슐노반 옆으로 톰과 조쉬, 케인, 테니마르 가문의 쌍둥이 자매, 이안에게 기공권을 전수받은 밀로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안과 시선이 마주치자 활짝 웃어 보였다.
이안은 그들의 웃음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봄꽃으로 치장이 된 결혼식 단상이 가까워졌을 때 문득 이안은 군중 속에서 강렬한 기파를 감지 했다.
이안의 시선이 빠르게 기파가 감지된 곳으로 향했다.
이안의 시선이 멈춘 곳에 서 있던 건장한 체격의 노인이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등 뒤로 넘겨 얼굴을 드러냈다.
‘한스 황제.’
깜짝 놀란 이안이 걸음을 멈추려 하자 한스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안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한스 황제의 뜻을 읽고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한스 황제의 옆에는 그를 수십 년간 섬긴 황실 근위대장도 서 있었다.
‘결혼을 축하하오, 이안 영주.’
눈빛으로 말을 하는 한스 황제에게 이안도 눈빛으로 말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짧은 순간 눈빛으로 대화를 나눈 이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며 계속 걸어갔다.
롤만 왕과 영주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높이가 수 미터 정도 되는 결혼식 단 아래에 도착한 이안은 잠시 숨을 돌렸다.
“다 왔어. 계단만 오르면 돼.”
“전 괜찮아요.”
린다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이안이 계단을 오르기 위해 앞을 바라보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놀랍게도 현성의 가족들이 계단 옆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 아버지, 희연아.’
-결혼 축하한다, 아들아. 행복하게 살렴.
-오빠, 결혼 축하해. 잘 살아야 돼. 언니 예쁘다.
“영주님, 영주님.”
옆에서 작게 들리는 린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이안은 다시 계단을 바라봤다.
가족이 서 있던 자리엔 꽃가루가 든 바구니를 든 사람들이 서 있었다.
“영주님, 무슨 일 있으세요?”
계단 앞에서 이안이 멈추자 린다가 속삭이듯 물었다.
이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걱정스레 바라보는 린다에게 미소를 보였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만 위로 올라갈까?”
린다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은 이안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결혼식 단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갑질하는 영주님》 마칩니다
작가 후기 안녕하세요. 장대수입니다. 먼저 긴 장편을 끝까지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성원이 없었다면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연재를 이어 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족한 글을 사랑해 주셔서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갑질하는 영주님’의 엔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결론은 지구에서도 케바니아 대륙에서도 열심히 살아온 이안에게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엔딩으로 잡게 됐습니다. 혹, 마음에 들지 않으셨더라도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재무관은 책 초반에 사라질 운명이었습니다. 이안이 영지에 자리 잡기 전까지 사용되다 버려질 패였던 거죠.
그런데 의도치 않게 재무관이 너무나 자리를 잘 차지해 버려서 그를 끝까지 끌고 갔습니다.
다행히 재무관을 사랑해 주신 많은 분들이 계셔서 그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합니다.
많은 분들이 연참을 원하셨지만 완결이 될 때까지 연참 한 번을 못 해 드린 점, 정말 마음 깊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변명이지만 하루하루 쫓기며 글을 쓰다 보니 연참 할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갑질하는 영주님’은 이제 막을 내리 고자 합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더 나은 작품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