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당신의 정의를 보여 주소서 (1)
“무슨 음모를 꾸미고 계십니까?”
“……어서 오시오, 성배기사.”
한밤중에 손님을 맞은 로잘린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로잘린드는 여전히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귀부인 다운 품위를 어느 정도 되찾은 모습이었다. 물론 그녀의 과거사를 짐작게 하는 흉터들이 손과 얼굴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늦은 밤에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궁금한 게 많아 어쩔 도리가 없더군요.”
“음모라니? 다른 귀족들이 전쟁놀이를 하는 사이 나는 게으른 고양이 마냥 잠이나 자고 있었소.”
로잘린드를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입가에 난 흉터가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래서 잠이 안 오는군. 괜찮다면 노인네 말 상대나 해주시겠소?”
로잘린드는 문을 더 크게 열었다. 아이작은 그녀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창가의 테이블에 앉자 로잘린드는 이미 끓여서 우리고 있던 허브차를 가져왔다. 종말처리자를 포식하고 모든 독에 대한 내성을 갖게 된 아이작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차라리 독이 있으면 그거 나름대로 로잘린드의 의도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소금 의회에서 그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소.”
로잘린드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작에게 말했다. 역시나 그녀는 소금 의회와도 인연이 깊은 것 같았다.
“선원들이 그대를 좋아하더군. 천박한 뱃놈들이 빛의 법전 성기사를 존경할 뿐만 아니라 좋아하기까지 하는 것은 드문 일이오. 아무래도 치이고 사는 일이 많다 보니.”
“우연히 인연이 맞았을 뿐입니다.”
“나와도 인연이 맞을지 모르겠군.”
로잘린드는 몸을 기울이며 움푹 팬 눈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소금 의회에 구원을 약속했다고 들었소. 내게도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소?”
‘……구원?’
이미 절망의 심해 바닥을 찍고 돌아온 듯한 그녀의 눈은 구원을 말하는 것치곤 그 어떤 희망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살기 가득한 독기만이 응어리져 있을 뿐.
독기를 졸일 대로 졸여 시커멓게 변한 사람의 눈이었다.
아이작은 잠시 망설였지만, 혼돈의 눈동자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이작의 눈동자에 은은한 보랏빛이 스며들었지만 어두운 조명 때문에 로잘린드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깊은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당장 생각 중인 표면 의식은 읽어 낼 수 있었다.
‘소드마스터.’
단편적으로 스쳐 지나간 단어에 아이작은 눈을 번뜩였다.
로잘린드는 알데온에 머무는 한 소드마스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활동 중인 소드마스터들이 누구누구였지?’
소드마스터가 되려면 온갖 행운과 재능, 축복,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당연히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많다. 어딘가에 소속되기보다 계속해서 강해지길 바라는 소드마스터가 많다 보니 드러난 소드마스터는 많지 않았다.
‘리안나 게오르크는 빼고, 바슐라프 노턴은 제국에 있고, 붉은 칼 루아는 게헨나에 감금되어 있으니…….’
아이작은 사실상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소드마스터의 이름을 떠올렸다. 게임에서도 강력하게 묘사되지만 언제 어디서 등장할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캐릭터.
“소드마스터 시드리크. 그가 여기에 와 있습니까?”
***
로잘린드는 순간적으로 놀란 듯 아이작을 바라보았다가 눈을 치켜떴다.
“생각을 읽은 건가! 이래서 빛의 법전 작자들이란!”
빛의 법전의 권능은 빛과 열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앎과 지혜 또한 추구해야 할 교리 중 하나다. 엘릴이 용기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과 같다.
등불이 상대방의 어두운 머릿속을 비추듯이, 생각을 읽는 기적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고, 이 기적에 대한 다른 신앙의 거부감 또한 대단했다. 같은 빛의 법전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이단을 심문할 때 외에는 금지될 정도로.
만약 이런 기적을 쓰는 사람들이 흔했다면 아이작은 살아 돌아다니기 힘들었을 것이다.
로잘린드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아이작은 단호하게 거짓말했다.
“제가 기적을 쓰는 낌새가 보였습니까?”
로잘린드는 입을 다물었다. 기적을 쓰면 반드시 그 효과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빛의 법전의 경우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화려한 빛이 드러난다. 당하는 사람에게는 뇌 속을 등불로 비추는 느낌이겠지만.
“생각을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시드리크가 솔트아인에 고용됐다는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듣던 대로 솔트아인을 지키고 있을지, 아니면 여기에 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물론 시드리크가 고용된 사실을 알아내진 못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빛의 법전은 뭐든지 안다’는 투로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용한 착각이었으니까.
솔트아인은 지독한 학살을 겪은 후, 그들에게도 소드마스터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소드마스터는 신의 축복과 본인의 노력, 운이 모두 맞아떨어져야 나타나는 존재였기 때문에 무작정 육성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신 방랑하는 소드마스터를 고용했다.
몇 안 되는 소드마스터 중 한 명인 ‘변덕쟁이’ 시드리크.
그가 알데온에 와 있었다.
“에델레드 폐하를 암살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시드리크가 받아들일 리도 없으니.”
로잘린드의 어이없다는 시선에 아이작은 말을 서둘러 돌렸다.
애당초 소드마스터에게 감히 암살을 부탁한다면 첫 번째 희생자는 로잘린드가 되었을 것이다.
“시드리크에게는 경호를 부탁했을 뿐이오. 알데온 왕가에 맨몸으로 그냥 방문할 수 있겠소?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는데?”
“에델레드 폐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 씨는 다 똑같소.”
퉤. 로잘린드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아직 어린애라서 그런 거지 크면 제 아비 못지않은 패악질을 부릴 거요. 애당초 백 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그 전의 왕족들을 죄다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가문이오. 그 피범벅 된 손이 어디 갈까?”
“원래 엘릴의 역사 자체가 피로 피를 씻고,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까?”
아이작의 대답에 로잘린드는 입을 다물고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금 내 신앙이 그릇되었다 말하는 거요?”
“로잘린드 부인의 손에도 적지 않은 피가 묻어있을 텐데요? 물론 영지민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원한을 품은 것도 당연하시겠지만, 정작 손에 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게 죄를 묻는 것은 부당한 일이지요.”
“어린아이? 하! 왕관을 쓴 순간 그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왕이라는 개념이오. 국가를 대표하는 존재이며 선대가 악업으로 쌓아 올린 모든 부귀와 권력을 승계받는단 말이오.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은 분리하는 건 빛의 법전의 비열한 풍습인가?”
“그럼 선왕은 솔트아인의 씨를 말려버렸어야 했군요.”
로잘린드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분노는 뒤늦게 터져 나왔다.
쾅. 테이블을 내려치는 충격에 찻잔이 엎질러졌다.
“뭐라고!”
“모든 죄가 영원히 계승되는 것이라면 죄를 물을 존재 자체를 없애버려야지요. 알프레드 왕이 너무 유약하게 굴었던 덕분에 에델레드가 그 대가를 갚게 되는군요.”
“감히……!”
“화가 나십니까? 좋습니다. 로잘린드 부인. 이렇게 할까요? 에델레드 왕을 죽여버립시다. 그리고 그 종자까지 싸그리 말려버리죠.”
로잘린드는 핏발 선 눈으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말이 목구멍에서 넘실댔지만, 어차피 아이작은 외국인에 이단이다. 에델레드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도 않았다.
“그다음 적당히 죄 없는 어린애 한 명을 왕으로 만들죠. 아니, 잠깐.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화를 낼 수도 있겠군요. 에델레드를 좋아하던 사람도 있겠고, 게오르크 가문도 빼먹어선 안 되겠죠. 그쪽도 싹 다 죽여버립시다. 마지막에 선 자가 엘릴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거죠.”
결국 그렇게 마지막에 선 로잘린드에게 남겨지는 것은 뭘까?
겁에 질린 어린 왕과 더 많은 원한, 더 많은 적들 뿐이다.
선왕 알프레드가 그랬던 것처럼.
“엘릴 왕만이 다룰 수 있는 성검, 칼드부흐에는 ‘정의’라는 뜻이 있다지요. 로잘린드 부인께서 추구하는 정의가 그런 겁니까?”
물론 아이작은 에델레드에게 아무런 책임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로잘린드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왕위를 계승 받은 이상 그 책임도 물려받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에델레드의 목을 날려 버리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그렇다고 피해자에게 ‘잊고 용서해라’라고 말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결국 마땅한 해답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작은 이기적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로잘린드에게 화해를 강요하고 있었다.
로잘린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충혈된 눈에서 그녀가 마음 깊이 졸여낸 독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치 한 번도 화를 내 적 없다는 듯 정제된 감정 조절이었다.
“10년만 젊었어도 결투를 신청했을 텐데, 지금은 질 게 뻔하니 못 싸우겠군.”
“다행이군요.”
로잘린드는 주전자를 기울여 엎어졌던 찻잔에 다시 차를 채웠다.
“성배기사, 당신이 오해하는 게 있소.”
“오해요?”
로잘린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하는 건 복수가 아니오.”
“그럼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구원.”
구원이라니. 아까 들었던 말과 같은 말이었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이란 말입니까?”
구원을 받으려면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주체가 필요하다. 그녀는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바라고 있는가?
정의롭지 못한 세상? 언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복수하고 싶지만 해낼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
그러나 로잘린드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
“시드리크요?”
“그래. 소드마스터니까 조심하고.”
아이작은 일단 헤사벨에게 시드리크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 그가 직접 돌아다니면 더 빠르겠지만 당장 주목받는 성배기사가 알데온을 들쑤시고 다니며 다른 소드마스터를 찾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오해를 살지 모른다.
아니, 무슨 오해를 살지 뻔하다고 해야겠지.
헤사벨은 아이작을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엘릴 왕국에서 소드마스터를 찾아보라구요? 제가 붉은 성배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보면 무슨 난리가 날지 모르는데?”
소드마스터쯤 되면 강력한 엘릴 사제이기도 하다.
헤사벨은 그 강력한 사제 겸 검객에게 ‘정의’당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맞서 싸우라고 보내는 거 아니야. 행적만 알아내도 충분해. 그리고…….”
아이작은 헤사벨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헤사벨, 네가 왜 나를 따르기로 했었는지 기억하나?”
“이기려고?”
“그래. 이기려고. 너는 자각 못 하는 거 같지만 내가 강해지고 신앙을 흡수하면서 너도 같이 강해지고 있다. 소드마스터를 상대하더라도 크게 낭패를 보진 않을 거야.”
종말처리자를 상대했을 때에도 느꼈다.
헤사벨에게서 느껴진 기운은 이전에 비해 크게 상승한 상태였다. 아이작이 성장하는 동안 그의 권속들 역시 동시에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헤사벨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제가 소드마스터를 이길 수도 있다는 건가요?”
“아니, 최소한 비명횡사하진 않을 거란 뜻이지.”
“…….”
아이작은 칭찬하면서도 환상을 심어 주진 않았다.
하지만 그게 어딘가. 소드마스터라면 엘릴 신앙에서 천사를 제외하고 손꼽히게 강한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를 마주하고 살아 도망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강하다는 뜻이다.
애초에 헤사벨은 아이작처럼 주위의 시선이 있는 상황에서는 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설령 이길 수 있어도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리라.
헤사벨도 만만찮은 지위가 있긴 했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정 위험하다 싶으면 내 이름을 팔아서라도 버텨봐. 중요한 건 시드리크의 행방이야.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가 에델레드에게 결투를 신청하거나 ‘우연히’ 죽일지도 모르니까.”
“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