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275)
275화. 금지된 지식 (5)
황금사자 성기사단 단장, 데라 헤만.
빛의 법전 성기사 중 최강자로 손꼽히는 자의 이름이 언급되자 아이작과 바슐은 바로 얼어붙었다. 데라 헤만이라면 촉수를 쓰지 않고선 이길 수 없는 상대고, 그렇다면 정체가 까발려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게다가 그놈이 가진 능력과 나는 상성이 너무 안 좋아. 까다로워…….’
그러나 이미 소환 명령이 내려진 순간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바슐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바로 도서관장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날카로운 검기에도 불구하고 천장의 등이 깜빡거린 순간 이미 도서관장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었다.
데라 헤만이 곧 도착할 테니 굳이 자신이 힘을 쓸 필요도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실제로 도서관장은 아이작과 바슐보다 다른 봉인 물품의 파괴나 폭주에 대비하고 있었다.
바슐은 멀리 떨어진 도서관장을 보고 이를 갈며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고민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이작, 지금 탈출해서 황제를 구하러 가라.”
“지금 못 들었어요? 데라 헤만이 누군지 몰라요?”
“모를 리가 있나. 나도 한때 빛의 법전 성기사였는데.”
바슐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리히트하임 보호라는 직무 때문에 실전에서 활약한 일은 극히 적지만, 그가 성기사 중 최강이라는 데에는 제국 안에서 아무도 이견이 없다.
황금사자 성기사단 자체가 정예 중의 정예. 그리고 데라 헤만은 그중에서도 정점이다. 단장이면서도 수석기사를 겸임하고 있을 정도로.
“아니까 그러는 거다. 누가 되었든 한 명은 그 괴물의 발목을 잡아야지. 차라리 잘됐어. 황제 구출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데라 헤만이 튀어나왔을 테니, 여기서 처리하고 가는 게 나아. 그러려면 이 미궁 같은 지하 복도 구조를 잘 아는 네가 낫지.”
‘처리당하는 것이 과연 누굴지 궁금하군. 바슐이 아무리 엘릴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해도 데라 헤만을 이기진 못할 텐데.’
하지만 아이작도 바슐의 의견에는 동감했다.
둘 중 누군가 여기 남아서 어그로를 끌고 다른 한 명이 황제를 탈출시켜야 한다면, 그건 길을 잘 아는 아이작이 적임자다.
하지만 바슐이 과연 데라 헤만과 도서관장을 상대로 5분이라도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그럴 바에야 여기서 함께 싸우는 게 낫지 않아요?”
“내가 못 미더운 거냐?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난 약하지 않다. 저번에 싸웠을 때 내게 숨겨 둔 패가 있다고 말했을 텐데.”
바슐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투는 허세가 아니었다. 뭔가 분명히 믿는 구석이 있는 모습이었다.
아이작이 전력을 다해 싸우면서도 은연중에 촉수를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듯이.
그리고 바슐은 그것을 아이작에게 보여 주기를 꺼리고 있었다.
아이작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설마…….’
아이작은 한 가지 황당한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굉음과 함께 저 멀리서 비밀 서고가 붉은빛으로 깜빡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쿵, 쿵, 쿵, 쿵. 수차례 문이 세게 열렸다 닫히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붉은 등이 다가오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그걸 본 바슐이 다급히 외쳤다.
“가라고! 뒤는 내게 맡기고!”
“플래그 세우지 말고 조용히 해 봐요, 좀!”
아이작은 탈출을 포기했다.
이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은 답이 아니다. 도서관장이 자신을 쉽게 보내 줄 리도 없거니와, 리히트하임 전체에 경계령이 내려지면 아이작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하기 힘들어진다.
‘이 미친 촉수가 멋대로 행동하지만 않았으면…….’
그런데 왜 이 미친 촉수가 멋대로 그 책을 먹어 치웠을까?
문득 아이작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쿵. 그들 앞에 붉은 불빛이 떨어짐과 동시에, 거대한 석문이 나타났다. 그들이 들어왔던 문과 같은 것이었다.
쾅. 굉음이 울리며 눈부신 섬광이 흘러들어왔다.
그 후광을 뒤로 하고, 일곱 개의 눈을 박아 넣은 사자 가면을 쓴 남자가 잠옷 바람에 슬리퍼를 신은 차림으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
바슐과 아이작은 잠옷 차림의 남자를 보고 잠시 당황했다.
일곱 개의 눈이 박힌 황금 사자 가면.
데라 헤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확연한 표식이다. 하지만 다른 묘사들도 있다. 찬란한 황금빛 갑옷과 눈부신 백색의 망토라던가.
적어도 잠옷이나 슬리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나마 곰 인형 대신 불타오르는 루앗딘 열쇠를 들고 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그러고 보니 한밤중이긴 했지.’
그나마 가면이라도 챙겨 써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 상황에 고작 챙겨 올 게 가면 이었냐고 따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당사자는 야심한 시각에 소환 명령을 받는 바람에 상당히 언짢은 듯했다.
그러나 그는 아이작과 바슐을 보고 잠시 멈칫거렸다. 얼굴까지 가리는 고해사제 복장 탓에 적인지 아군인지 아직 판단을 못 내린 것이다.
아이작은 민첩하게 바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새끼입니다! 저 새끼가 보라색을 파괴했습니다!”
바슐의 눈이 경악을 담아 아이작을 보는 사이, 데라 헤만은 곧바로 움직였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황금사자 성기사단 단장은 이 시간에 고해 사제가 비밀서고를 들락거릴 이유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곧장 둘 다 베어 버리기로 했다.
가까이 있던 아이작을 향해 칼이 날아왔다. 아이작은 섣불리 칼을 뽑는 대신 손에 검기를 둘러싸 막아 냈다. 그러나 경악스러울 정도의 힘과 루앗딘 열쇠에 깃든 기적은 아이작의 검기마저 잘라 냈다.
콰드득! 아이작은 가까스로 칼을 튕겨내며 뒤로 물러났다.
데라 헤만의 칼에는 살기 어린 기적들이 몇 중첩으로 걸려 있어서 아이작의 검기를 가볍게 꿰뚫을 수 있었다. 손에 난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자 금방이라도 촉수가 뛰쳐나올 듯 꿈틀거렸다.
‘가만있어.’
아슬아슬한 순간 왼손바닥의 촉수로 튕겨 내지 않았으면 손바닥이 잘릴 수도 있었다.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틀란도 그렇고 아직 세계에 강자는 많은 듯했다.
데라 헤만은 아이작의 손이 피만 좀 날 뿐 멀쩡하다는 것을 보고 의아한 듯했지만, 바로 공격을 잇진 않았다. 대신 그는 바슐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바슐은 어쩔 수 없이 칼을 뽑아 들고 검기를 있는 대로 뽑아 데라 헤만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한 대 맞은 것만으로도 바슐의 검기가 휘청거릴 정도로 기세가 압도적이었다.
“아…… 이 새끼야! 그냥 가라고!”
바슐은 아이작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가까스로 목 너머로 넘기고 소리쳤다.
“잠깐만 시간 좀 끌어봐요. 좀.”
그러나 애당초 원했던 목표, ‘바슐에게 어그로 튀게 하고 시간 끌기’가 성공한 아이작은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법을 구상했다. 지금 데라 헤만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놈은 아직 자신의 전력을 다 드러내지도 않고 있었다. 또한 도서관장이 모든 문과 길을 통제해 버리면 빠져나갈 방법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이 거대한 감옥에 맹수와 함께 갇힌 셈이다.
봉인 물품의 봉인을 푸는 것도 고려해 봤지만, 그런 짓을 더 하면 이번엔 정말 맹인 파수꾼이 올 수도 있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다.
처음부터 비밀 서고에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아이작은 순간 촉수가 씹어 삼킨 지식을 떠올렸다.
우르반수스를 엮는 실타래들에 관하여.
‘이런 빌어먹을. 진짜 그 방법을 써야 한다고?’
말도 안 된다는 생각과 해선 안 될 것 같은 이유들이 머릿속에 줄줄이 나열되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순간 아이작은 머릿속의 잡념을 지웠다.
이 세상은 믿는 자에게 믿는 것을 보여 준다. 당사자가 의심하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바슐!”
아이작은 소드마스터답지 않게 형편없이 밀리면서 방어하기 급급한 바슐을 불렀다. 데라 헤만은 바슐이 생각보다 제법 버티자 슬리퍼까지 벗고 싸우고 있었다.
슬리퍼를 신고 그 정도로 싸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더욱 강력해진 공세에 바슐은 대답할 여유조차 없어 보였고, 검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우리는 여기 온 적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합시다!”
지금 이 말만으로 바슐이 알아듣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예상대로 바슐은 곧바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다만 그것이 바슐에게는 경악을 넘어 충격적인 발언이었을 뿐.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아이작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너…….”
데라 헤만은 빈틈을 놓칠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는 단숨에 바슐의 목을 칼과 함께 베어냈다.
퍼석. 그러나 목을 친 순간 터져 나온 소리는 살과 뼈를 잘랐다기에는 너무 가볍고 투박했다.
이내 목을 잃은 바슐에게 일어난 변화에 데라 헤만은 눈을 부릅떴다.
파스스스스…….
바슐의 몸은 그대로 재 덩이가 되었다.
그리고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서, 다시 바슐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데라 헤만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쾅. 아까와는 다른 굉음과 날카로운 파공음에 데라 헤만은 튕기듯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번에 바슐은 그런 그를 놓치지 않았다. 슥. 바슐이 움직일 때마다 회색 재로 이루어진 형태가 궤적에 남아 시야를 어지럽혔다.
바슐이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반드시 뒤가 있는 대책이어야 할 거다.]그것은 천사의 목소리였다.
엘릴의 네 번째 명천사, 재투성이.
행방을 알 수 없던 엘릴의 비밀스러운 검은 바슐의 몸에 자리 잡은 채 빛의 법전 교단에 치명상을 안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작은 미소 지었다.
재투성이가 이대로 데라 헤만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간 데라 헤만을 예뻐하는 천사들의 이목을 끌 수도 있을 테고, 맹인 파수꾼도 들이닥칠 것이다.
여기서 깔끔하게 빠지는 것이 아름답다.
“황제를 구하러 갑시다.”
이걸로 임시 각본은 완료되었다.
작가 재투성이. 주인공 아이작.
그리고 편집 아이작.
하지만 각본의 정정은 오직 우르반수스에서만이 가능하다. 그러면 우르반수스에는 어떻게 진입할 것인가?
그건 간단하다. 현재 오직 아이작만이 가능한 방법이 있었다.
아이작의 머리 위로 녹색의 물푸레나무가 후광을 이루며 돋아나기 시작했다.
파수자의 등대.
엘릴의 대전사의 자격으로. 버전, 엘릴의 전장.
온 사방에 푸르른 빛과 낙엽 내음이 가득 차고, 상자와 봉인지마다 잎사귀와 가지가 돋기 시작했다.
엘릴의 규칙이 비밀서고를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작이 이곳에 강제로 우르반수스를 비춰 내자, 재투성이 역시도 역사 개정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충격을 받은 듯한 데라 헤만과 도서관장의 시선 속에, 둘은 각본의 수정에 들어갔다.
***
우르반수스 개정에 들어간 순간 아이작의 시점은 이전과 조금 달랐다.
흰올빼미는 우르반수스를 개정하려면 우르반수스를 관조할 수 있는 천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천사는 즉 모든 시간선을 선택해서 골라 볼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선에 개입해 원하는 역사를 만들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실제로 ‘의미 있는’ 시간선은 많지 않다.
한 소년이 동생이 사고로 죽는 미래를 천사의 개입으로 막았다고 쳐 보자. 그러나 그 도시에 올칸 규율의 오크들이 쳐들어와서 도시 시민 전부가 죽었다. 이 경우 소년의 동생을 구하는 것은 소년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역사에는 큰 의미가 없다. 갑자기 운석이 떨어져서 대륙이 멸망하면 올칸 규율이 도시를 장악한 것도 의미가 없어지듯이.
거대한 흐름은 작은 변수들을 잡아먹는다.
물방울이 몇 번 튀어 올랐다고 커다란 강줄기의 흐름이 변하는 것은 아니듯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은 전체 역사에서도 극히 일부 시점에서만이 발생한다.
때문에 재투성이 역시 개입해야 할 역사 중 어느 시점에 개입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어느 시점의 역사를 정정할 것인가?
그리고 아이작은 그런 재투성이의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전과는 뭔가 다르군.’
천사들이 우르반수스를 보는 것이 원하는 책 페이지를 펼치는 것 같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아이작은 거기서 한 단계 너머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등장인물이면서도 동시에 천사와 우르반수스를 관측할 수 있었다.
아이작은 이전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생각했다.
‘흰올빼미의 책을 포식해서 그런 건가?’
아이작은 ‘우르반수스를 엮는 실타래들에 관하여’를 계속해서 씹어 소화하고 있었다.
아직 모든 내용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책의 모든 지식들은 포식으로 아이작의 내면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수납된 지식이 필요한 순간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지식’이다.
금지된 지식을 습득한 순간 아이작은 이전과 다른 시각과 통찰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번개를 신의 분노로 알고 두려워하는 사람과 뇌운과 전자기력을 이해하는 자의 시야가 다르듯이.
물론 아이작은 이제야 시야를 갖췄을 뿐, 역사를 정정할 능력은 없었다.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정정할지는 천사가 선택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미 그가 어디를 고를지 이미 알고 있었다.
미리 책갈피를 끼워 놓듯 표시해 놓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 튀어 오른 혼돈 한 방울.
역사적으로 그다지 크게 의미가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단지 아이작에게만 의미 있는 부분이었을 뿐.
“이 부분의 개연성에 문제가 조금 있군요.”
***
“뭐야, 왜 그래?”
아이작은 눈을 떴다. 약간의 두통과 시야가 둘로 겹쳐 보이는 듯한 어지럼증이 남아있었지만 금방 회복되었다. 바슐이 아이작을 곁에서 초조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장소는 리히트하임 지하 복도.
그들은 이제 막 지하통로를 빠져나온 참이다.
아이작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제부터 구하도록 하죠.”
이름 없는 혼돈의 이름은 비밀 서고에 없다.
그럼 비밀 서고에 갈 이유 따윈 없어진다.
하지만 대신 아이작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지식을 하나 훔쳐 왔다.
원래 등장인물에 불과한 아이작은 역사가 개변되는 경우 그 지식을 잃어야 했지만, 이번에는 개변의 관측자가 되었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고맙다, 올칸 규율. 도적 떼 주제에 본받을 점도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