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75)
75화. 천사가 피 흘린 자리 (1)
저주에 이끌린 몬스터를 퇴치하라.
하지만 결국 저주가 사라질 때까지 몬스터는 계속 습격해 올 것이므로, 사실상 저주를 물리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예상했던 대로군.’
영지에 저주가 걸렸다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이런 명령을 예상했다.
저주를 물리치지 않으면 천사 퇴치 업적을 온전히 인정받기 힘들 테니까.
저주를 퇴치하지 못한다면 아이작의 성인 지정도 차일피일 미뤄질 것이고, 아이작의 업적도 온전히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아이작의 목적은 업적을 온전히 인정받으면서 성인 지정도 피하는 것이었다.
“빛의 법전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다.”
아이작은 검을 빼 들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델리아는 그것을 보면서 불편한 표정을, 후안 주교는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공짜로 무릎을 꿇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후안 주교님. 제가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싸우면서 검이 다소 상했습니다.”
“아!”
이솔데가 얕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심판의 검은 그녀가 빌려준 것이었다. 그랬던 검이 시뻘겋게 녹슬고 이 나간 모습이 되었으니 경악하는 것은 당연했다.
후안 주교는 힐끔 이솔데를 보았다가 검을 살펴보았다.
“이단심문관의 검이군.”
검에는 이름이 음각되어 있었으니 원래 누구의 소유인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자네와 아는 사이였나, 이솔데 심문관.”
“예, 예.”
이솔데는 눈에 띄게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후안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지?”
“심문에 제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었을까 의심받는 것을 우려해서…….”
의심할 만한 일이었다.
검을 빌려줄 정도의 인연이라면 심문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애당초 그녀는 이 자리에 와서는 안 되는 셈이다.
하지만 후안은 말없이 검을 들여다보다가 쪼글쪼글한 손으로 검신을 슥 훑었다.
밝게 타들어 가는 손끝에서 심판의 검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녹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검신에 새롭게 날이 서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이솔데의 이름도 같이 지워져 사라졌다.
“자네의 안목이 정확했다고 믿겠네, 이솔데 심문관. 결국 자네의 검이 사악한 천사를 베는 데 한몫했으니 기쁜 일일세. 대신 이 검은 새 주인을 갖는 것으로 하지.”
“……예.”
이솔데는 검을 아이작에게 넘기게 된 것보다 이만한 꾸중으로 넘어간 것이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는 듯했다. 정말 여러 가지로 이단심문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후안은 검을 새롭게 빚은 검을 아이작에게 넘겨주었다.
“심판의 검보다는 조금 더 쓸모 있을 걸세.”
아이작은 검을 받아 들었다. 타오르는 열기가 숨을 쉬듯 부풀었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검신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 곁에는 정체 모를 문자가 흰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작은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으로 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루앗딘 열쇠?”
아이작이 문자를 보고 놀라 중얼거리자 후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어(古語)를 읽을 줄 아는군?”
“아, 예. 조금…….”
아이작은 자신이 실수했나 했지만 후안은 어쩐지 큰 호감을 갖게 된 눈치였다. 무식한 성기사들만 보다가 제법 똑똑한 성기사를 만났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아이작은 얼떨결에 얻게 된 이 무기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루앗딘 열쇠(S)] [심판의 검이 본래의 허물을 벗고 원래의 형태를 찾은 검. 빛과 열기로 감춰지고 갇혀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열쇠다. 천상의 열기로 빚어져 현실의 장인들은 결코 만들 수 없다. 검을 든 자에게 계속해서 온기와 활력을 더해준다. 중급 봉인 해제.]심판의 검의 진정한 형태라고 일컫는 루앗딘 열쇠였다. 열쇠라는 이름이지만 당연히 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열쇠라는 이름 자체가 ‘감춰지고 갇혀 있는 것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둠 속에 감춰둔 보물 상자든, 피부 아래에 갇혀 있는 내장이든.
즉, 아주 잘 드는 칼을 열쇠라고 표현한 언어유희였다.
하지만 이름대로 어지간한 수준의 봉인도 해체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빛과 열기를 부여하는 능력까지.
‘이단심문관 지부장이나 수석 성기사에게나 줄 만한 물건인데…… 정말 나를 성인으로 밀어주기로 작정한 모양이군.’
후안과 함께 온 성기사들과 이단심문관들도 제법 놀라는 눈치였다.
때문에 아이작은 이걸 후안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팍팍 밀어줄 테니 딴생각하지 말라는. 큰 선물이긴 했지만 아이작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아이작은 머리를 숙이면서도 속으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할아버지. 제가 사실 촉수 괴물의 성기사라서…… 선물은 고맙게 받지요.’
***
트롤 사냥을 위해 파견된 기사들과 성기사들 일부가 함께 움직였다.
비어있는 성으로 트롤들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절반은 남아서 성을 지키기로 했다. 애당초 저주에 이끌린 괴물들이 트롤만 있으란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젠장…….”
하지만 트롤을 찾아가는 기사들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그들은 명예로운 승리과 결투, 전리품을 위해 온 것이지 산속에서 땀 흘리며 트롤 사냥이나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작 혼자 보내는 것은 모양새가 너무 안 좋을 뿐만 아니라, 성기사들도 왔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델리아 리옹 후작까지도 그들과 함께 왔기에, 기사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것도 모양새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후작위면 주교와 비교해도 결코 끗발이 밀리지 않는다. 그런 후작이 주교의 명령을 수행하는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공작님. 공작님은 안에서 쉬고 계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공작님까지 굳이 이런 험한 일을 할 필요는…….”
“황제 폐하의 신민들의 안전을 위한 일이다. 험한 일이라고 가려야 쓰나?”
델리아는 씩 웃으며 과장된 동작으로 팔을 풀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으면 트롤 모가지라도 비틀어야지.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델리아의 말에 기사들은 쓰게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델리아는 덩치만큼이나 훌륭한 전사이기도 했다. 그녀가 든 철퇴는 트롤이라 해도 쉽게 회복하지 못할 만큼 크고 단단했다. 하지만 델리아의 신경은 트롤이 아닌 온통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시간은 벌었는데 성배기사를 어떻게 한다…….’
아이작은 델리아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혀 있는 것을 느꼈다.
아이작 역시 그녀와 대화할 필요를 느끼긴 했지만, 일부러 애타게 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다른 기사들을 책임지기도 하는 델리아는 계속 아이작에게만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작은 델리아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혼돈의 눈을 발동시켰다.
우거진 숲의 그늘 속에서 아이작의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델리아 리옹(B)] [직업: 후작(A)] [능력: 제국군 검술, 상급 지휘] [‘성배기사가 성인으로 지정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그 업적이라도 깎아내려야 해. 제거하는 건 선택 사항이 아니야. 무모한 짓을 벌이다 실수하면 덤터기를 쓰는 건 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깊게 생각에 빠진 델리아의 속마음은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열려 있었다. 그녀의 의도야 명확했으므로 깊게 숨기고 있는 비밀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아이작의 성인 지정을 막는다. 막지 못한다면 업적이라도 훼손한다.
아이작은 슬슬 그녀의 초조함이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델리아 곁으로 다가갔다.
“후작님.”
“아, 성배기사님.”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은 흩어져 트롤을 찾고 있었다. 부관이 곁에 있었지만 델리아는 아이작이 다가오자 그에게 눈치를 줬다. 부관은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여긴 빌어먹게 숲이 우거지고 산세도 험하군. 헨드락 영지가 천혜의 요새라는 생각은 한 적 없는데……. 발 들이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지오.”
“하지만 황제 폐하의 권위가 이런 산골까지 섬세하게 닿고 있다는 뜻이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델리아는 인사말처럼 투덜거렸지만 아이작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운을 뗐다.
델리아는 분위기를 망가뜨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운을 떼는 아이작의 어투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작이 이미 삭막하고 고지식한 성배기사가 아니라는 것은 처음 왔을 때부터 알아보았다.
델리아는 그녀의 의심을 슬쩍 확인해 보기로 했다.
“성배기사님께서도 황제 폐하의 권위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오?”
“빛의 법전의 분신으로 나타나신 황제 폐하를 어떻게 가벼이 여길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빛의 법전의 분신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성체를 높이 띄우는 표현이다. 사람이 망치질을 한다고 망치가 사람의 분신일 리가 없듯이, 성체는 성체일 뿐 신의 분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를 빛의 법전의 분신이라며 떠받들고 있었다. 하지만 성배기사가 함부로 할 말은 아니었다.
델리아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성배기사가 그런 말을 해도 되겠소?”
“황제 폐하의 위업에 비하면 제 소박한 여정이 비교가 되겠습니까?”
“소박하다니. 천사 퇴치는 역사에 새겨질 업적이오. 신께서도 기억하실 만한 일이지.”
“그저 제 여정이 제국의 안녕에 도움이 된다면 기쁠 뿐입니다.”
델리아는 몇 마디 말을 나눈 것으로 아이작의 내심을 눈치챌 수 있을 뿐이었다.
아니, 아이작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눈치를 주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이거…… 성배기사님께서는 보기와 다르게 야망이 크신 모양이군.”
아이작은 대답하는 대신 웃었다.
충분히 어필했다면 다음부터는 델리아가 멋대로 상상력을 부풀릴 차례다. 아이작은 정확하게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이걸로 델리아는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이작을 황제파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이미 황제의 존재로 균형이 수평을 이루고 있는 상태다. 거기서 새롭게 등장한 영웅이 황제파가 된다면 확고하게 권력을 잡을 수 있다.
성인 지정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황제의 대적자가 될 수도 있었던 자가 황제의 밑으로 들어오는 셈이니까.
“두루뭉실하게 돌려 말하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오. 원하는 게 뭐지?”
“원하는 것이라니요. 말씀드렸다시피 제국의 안녕에 도움이 된다면 기쁠 뿐입니다.”
델리아가 초조하게 뭐라 말을 덧붙이려 할 때, 아이작은 말을 마저 이었다.
“리옹 후작님께서 제 여정에 힘을 보태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이작이 직접 요구사항을 말해서는 안 된다. 델리아가 스스로 떠올려 자발적으로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이작은 교단과 황제파, 그 어느 쪽에도 쏠리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면서 이득을 뽑아야 한다.
결국 몸이 달아 대가를 내놓는 것은 상대방이다.
델리아가 뭐라고 더 물어보려 했을 때, 어디선가 외침이 들려왔다.
“트롤이다!”
아이작의 지시에 맞춰 헤사벨이 트롤을 움직인 것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대화를 끊은 아이작은 외침이 들린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델리아는 그의 등을 보며 입술을 깨물다가 서둘러 움직였다.
***
“저쪽으로 몰아!”
“빌어먹을, 왜 저렇게 빠른데?!”
아이작이 도착했을 때 도착한 현장은 부상당한 병사들과 부러진 나무들로 가득했다. 잘려 나간 트롤의 팔은 보였지만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도착한 아이작이 물었다.
“트롤은 어디로 갔나?”
“저 계곡 안쪽으로 갔습니다. 성기사들이 따라붙었습니다.”
어두컴컴하고 나무가 우거진 계곡이었다. 하지만 성기사들이 따라간 흔적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열기를 다룰 수 있는 성기사들은 트롤들의 천적이었다.
아이작은 계곡으로 들어서려다가 문득 바닥에 찍힌 무언가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거기에는 아이작이 계산에 둔 적 없는 것이 있었다.
‘말발굽?’
우거진 나무와 험난한 산세 때문에 말이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는 곳에 말발굽 모양이 찍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