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Life Returner RAW novel - Chapter 81
15 화
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은 패망했다. 그래도 카르얀 가문만큼은 명맥을 유지했다. 오히려 카르얀 가문에게는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된 시기가 더 힘 든 시절이었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되고,독일 경제 가 통일 자금 문제로 휘청거리던 때. 비로소 카르얀 가문은 세계의 질서
를 만드는 세력 안으로 편입됐다.
중세의 전성기를 다시 되찾은 것이 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에단. 진심으 로 환영합니다.”
아마도 이 이름 모를 늙은 집사는 독 일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그뿐일까.
장막 뒤에서 유럽 경제를 쥐고 흔들 던 전성기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카르얀 가문의 본진에 들어왔 다.
집사는 나를 역사 깊은 저택의 귀빈 실 안으로 안내했다.
카르얀 가문의 이사회가 소집되어 있었다.
아직 입국하지 못한 이사들 자리는 공석.
모두의 이목이 내게로 쏠렸다.
“그대에게 영란은행을 습격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소.”
위고르 폰 카르얀.
카르얀 가문의 최고 실세는 가주석 에 앉은 고상한 노인이 었다.
“그대도 알다시피,그 남자는 영국의 영란은행을 무너트린 이후 명성과 돈 을 얻었소. 그러나 세상은 그가 14년 간 시달렸던 소송에 대해선 잘 모르더
이다. 그나마 잘 아는 사람들도 88년 프랑스의 일 때문이 라고만 아는 게 전 부일 거요. 진실이 궁금하지 않소?”
“이미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럼 길게 말하지 않으리다. 공격을 중단하시오. 손해 본 금액은 내 주머 니에서 내어 주겠소. 비자금으로 넣으 시오.”
“오해가 있으시군요. LTCM이 조나 단 투자 금융 그룹의 계열이라고는 하 나,이번 투자는……
노인이 바로 내 말을 가로챘다.
“이번 공격은!”
노인이 목소리를 터트렸다. 가문 이
사들은 노인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두 려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노성 따윈 내 심장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했다.
“이번 투자는 LTCM에서 단독으로 시작한 일이며,LTCM만이 아니라 우리 그룹의 모든 휘하 헤지 펀드들은 자유재량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런 뻔한 얘기를 듣자고 여기 서……콜록!”
콜록. 콜록.
한번 시작한 노인의 기침은 도무지 멈출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위태로워 보이지만 좌중 누구도 노
인을 챙기지 않았다. 아니,못하는 것 같았다. 카르얀 가문의 엄격한 룰에 지배되고 있는 공간이었다.
노인의 기침이 겨우 사그라졌다. 노 인이 집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금껏 서 있던 집사가 내 맞은편 자 리에 앉았다.
“에단은 투자라 말씀하시지만,유럽 경제 전체에 대한 공격 행위입니다. 영란은행이 무너진 후 유럽 경제가 어 떤 타격을 받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8월 11일 이후 침체된 세계 경제가 조 금씩 살아나려고 하는 이때,금번의 공격 행위는 민간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에단. 제 말이 틀렸 습니까?”
집사는 월가의 귀신이 빙의된 것처 럼 굴기 시작했다.
“그룹 휘하의 헤지 펀드가 자유재량 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면 에단은 우리 를 왜 찾아온 겁니까.”
“그게 오해란 말입니다. 전 친구를 만나러 왔을 뿐입 니다.”
“친구요?”
“베를린 텔레콤 대표 말입니다. 조슈 아. 그 친구가 초대해 주더군요.”
“그런 말씀 없으셨습니다.”
“제 신상만 확인하기 바쁘셨죠. 덕분
에 저는 공개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 밝혀야만 했습니다. 제가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의 최대 주주라는 사실을 아 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저로서는 큰 결심이었습니다만,시기가 좋지 않았 군요. 어쨌든 비밀은 지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때문이었다.
일명 카르얀 가문의 어르신들.
그러니까 이사들이 이 동양인 청년 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조슈아 도련님이 에단을 초청했다 고요?”
“꽤 된 일이죠. 어쨌든 저는 지금 이
자리가 불편합니다. 저도 LTCM의 금번 투자 방식을 좋게 보는 건 아닙 니다.”
“그렇다면 그룹 입장을 발표하실 수 는 없겠습니까,에단. 투기 세력들이 LTCM을 뒤쫓아 공격 대열에 합류하 고 있는 건,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이 보여 줬던 행보 때문입니다. LTCM 은 에단의 그룹에 속해 있으니까요. LTCM이 지지 않는 싸움을 한다 생 각하는 겁니 다.”
“터무니없는 말씀이신 거 아시죠? 우리 그룹의 계열입니다. 제 사감과는 관계없이,그룹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
들을 지원해 줘야 할 일이죠.”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봐 주십시 오. 에단.”
“LTCM의 처지를 생각해 보시죠. 러시아발 금융 전쟁에서 몰락한 후, 우리 그룹에 흡수되었습니다. 악에 받 칠 만큼 받쳤다는 겁니다. 그들이라고 만회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유럽 경제를 공격하고 있어요. 에단 의 그룹은 지탄을 피할 수 없게 될 겁 니다.”
“공격은 97년 아시아에서 일어났던 게 진짜 공격입니다. 그래요,공격이 라 칩시다. 아시아는 공격해도 되고,
유럽은 공격하면 안 된다. 그 말씀이 십니까?”
“그리고 왜 그리 초조해하십니까. 당 신들은 카르얀 가문입니다. 고작 헤지 펀드 하나의 공격에 무너질 리가 없지 요.”
집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나는 마저 말했다.
“LTCM에 합류한 투기 세력들은 극 소수입니다. 왜겠습니까. 당신들 카르 얀 가문에서 각 은행들과 기관들에게 압박을 넣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논 쟁이나 벌이려고 방문한 게 아닙니다.
조슈아에게 친구가 도착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장담컨대 카르얀 가문의 저택에 들어와서,멋대로 일어날 수 있는 사 람은 없다.
강대국의 정상급이라 할지라도 말이 다. 이사들이 늙은 가주를 쳐다보았 다.
어떤 호령이 떨어질지 기대 반 우려 반인 시선들.
가주가 말했다.
“실례가 많았소. 객실로 안내해 드리 고 귀하게 모시게.”
시간이 지난 후.
창밖으로 조슈아의 차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허겁지겁 뛰었다.
감각을 확장시켰다. 쓸데없는 소리 들은 날려 버리고,조슈아의 호홉 소 리에 집중했다. 숨이 가빠 헉헉 나오 는 소리가 아니 었다.
녀석은 몹시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 다.
‘그,존 도(John Doe) 말입 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도련님.”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의 사람과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최대 주 주라니요. 그자는 비밀스러운 자 아닙 니까.”
“그가 도련님의 친구라 합니다. 도련 님의 초대를 받았다고도 했습니다. 본 가로 초대한 사람들 중에 떠오르는 사 람은 없습니까? 워낙에 비밀스러운 자라 도련님께도 실제 신상을 밝히지 않았을 겁니다.”
“일단 만나 보면 알겠죠. 어디에 있 습니까?”
“따라오시죠.”
그러나 집사가 조슈아를 안내한 곳 은 객실이 아니 었다.
본가 안에서도 은밀한 대화를 주고 받을 때나 이용되는 안실이 었다.
“추적하시고 있던 일은 잘 마무리되 셨습니까?”
“덕분에.”
“그럼 당분간은 본가에서 머물며,본 가의 일을 도와주셨으면 합니 다.”
순간 조슈아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건 곧 본가의 이사회에 들어오라 는소리였다.
조슈아는 항상 이런 날이 오기만을 고대해 왔었다.
그런데 생각해 왔던 것보다 기쁘지 않은 까닭은 당연히 오딘과 본가가 공 격 받고 있는 상황 때문이 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마치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의 최대 주주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처럼, 본가의 전력 또한 그랬다.
‘어떤 세력인지 몰라도 큰돈을 잃겠 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어.’
본가로 들어오는 동안,마르크화는 꽤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그런데 집사의 대답은 달랐다.
“좋지 않습니다.”
“수습되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일시적인 방어에 성공했을 뿐입니 다. 곧다시 시작될 겁니다.”
집사는 조슈아에게 그간의 과정을 설명했다.
현재 마르크화를 공격하고 있는 세 력은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 휘하의 유명 헤지 펀드인 LTCM이며, 본가 에서는 각국의 명문 은행들에게 공격 대열에 합류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중이 라는 것까지.
‘내 친구를 빙자하여 본가의 분위기 를 살피러 들어온 건가? 한데 왜 나 를,
조슈아는 온몸이 간지 러 웠다.
당장 세계 금융의 최대 화두 중 하나 인,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의 최고 주 주라는 사람의 얼굴을 두 눈으로 똑똑 히 보고 싶었다.
“도련님의 친구분은 이 사태와 관계 없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휘하 헤지 펀드의 자유 투자라는 것이지요. 한데 본가의 입장은 다릅니다. 방어하는 만 큼의 공격 자금이 꾸준히 유입되고 있 습니다.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의 조 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거 심각하게 들리는군요.”
“그렇습니다. 심각한 일이죠. 아직까 지는 한 개 헤지 펀드만 내세우고 있
지만,언제 갑자기 그룹 전체가 전력 을 다해 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걸 헛바닥으로만 막을 수는 없습 니다.”
엄청난 돈이 달린 문제다.
헛바닥 따위는 날카로운 지폐에 그 냥 잘려 나가는 것이 이쪽 세계였다.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의 최대 주주 가 도련님의 진짜 친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련님의 친구를 자청하고 나왔다는 게 중요하지요.”
“그렇죠.”
“기회는 지금밖에 없습니다. 더 지나 고 나면 전선이 확장될 테지요. 그때
는 어느 양쪽도 되돌릴 수 없게 됩니 다. 조나단 그룹에서 공격을 중단한다 면 손실금은 본가에서 보상할 겁니다. 도련님. 그러니……
“손실금을 보상한단 말입니까? 싸워 보기도 전에? 본가가 말입니까?”
조슈아도 그렇게 묻게 되리라고는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집사는 고개를 끄덕 였다.
상대는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이다. 기존에 존재하는 글로벌 투자 그룹들 과 차원이 다른 점은,그들의 운영 자 산뿐만 아니라 순 자산의 규모에도 있 었다.
투자자의 자금과 연기금을 제외한, 두 사주의 자본만 삼천억 달러가 넘는 다고 알려져 있다.
알려진 바가 거기까지니 실제 자산 은 훨씬 클 것이다
조나단까지 직접 움직이고 나서면 추종하는 세 력들이 달라붙는다.
그때는 본격적으로 조 달러 이상의 자본들이 충돌하고야 만다.
유럽 전역이 화폐 전쟁에 휘말리는 것이다!
“도련님. 이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입니다.”
어쩐지 집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조
슈아에 게는 충격 적 인 일이 었다.
“실 버만과 AP 머 건의 입장은요?”
“공격 대열에 합류하지 않겠다는 약 조는 받았습니다만,모르는 일이지 요.”
“그렇다면.”
조슈아가 본가를 위해서 해야 할 일 이 분명해졌다.
제 친구를 빙자하고 있는 자에게 되 지도 않는 설득을 하며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가문 어르신들과 함께 당장 런던으로 가는 게 맞았다.
아메리카에 조나단 그룹이 있다면 유럽에는 질리언 그룹이 있다.
질리언 그룹을 방어 전선에 가담시 킬 수 있다면!
“런던에……
“런던에 계신 어르신들께서 질리언 투자 금융 그룹과 만나고 있습니 다.”
‘역시 그렇나?’
결국엔 원점으로 돌아왔다.
“친구분을 설득해 주십시오. 그리 고……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니 듣고 잊어 주십시오. 도련님과 친구분의 대 화에서,카르얀 가문의 존폐가 결정될 것 같습니다.”
집사의 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 다. 그랬던 그가 본인의 절대적인 세
계였던 본가의 존폐 문제를 논하고 있 었다.
이럴 수가.
본가가 무너 질 수도 있다니 !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생각해 볼 수도 없는 일이 었다.
“알겠습니다.”
조슈아는 비장해졌다.
“제 친구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 까?”
독일어로 진행되고 있던 집사와 녀
석의 대화가 끝났다.
이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하나는 물 론 녀석의 것이었다.
t|: TP H:
一! 一! 一! .
노크 소리가 먼저 났다. 그런 다음 문이 천천히 열리며 녀석이 들어왔다. 녀석이 나를 확인하고 말았을 때. 녀석은 석화 상태에 빠진 듯 문손잡 이를 잡은 채로 굳어 버 렸다. 눈만 부 릅떠 지고 숨은 잠시 멎은 상태 였다. 거기에 대고 뇌까렸다.
“할로 조슈아(Hallo Joshua).”
조슈아는 오딘과 마주한 순간,이명 (耳鳴)이 들렸다.
삐_
주전자 물이 끓을 때 나는 소음과 비슷했다.
갑자기 숨도 차올랐다. 조슈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오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의 최대 주주. 개인 자산으로는 세계 제일의 부호.
조슈아에게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 건,오딘이 재산을 쌓은 경위였다. 차 라리 미 연방 은행을 털었다면 납득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오딘의 재산은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의 가치를 토대로 계산된 것이었다.
게다가 항간에서는 조나단이 그동 안 보여 줬던 기적적인 투자들이, 조나단 혼자 이룩한 게 아니라는 말 들이 돌고 있었다.
그보다 더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자의 조력 또한 컸을 거라는 거였다.
그게 오딘이었다.
‘그게 오딘이었다고?’
그때 오딘이 차려입은 의복이 눈에 들어왔다.
슈트를 차려 입은 오딘은 던전 안의 오딘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 었다.
대체 무엇이 오딘의 진짜 모습인지 햇갈릴 정도였다.
슈트를 입은 모습에서 위화감이 조 금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성공한 엘리트의 모습이었 고 입가에 품어진 미소에는 자신감이
굉장했다.
놀랍게도 얼굴만 비슷한 게 아닐까?, 조슈아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양인들은 구분하기 힘드니 까.
하지만 그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 었는지 곧바로 깨달았다.
‘내가 졌다…… 오딘은 처음부터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있었던 거였 어.’
조슈아는 실로 참담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해 버리고 오딘 에게 굴복해 버리면 자신이 그렸던 혁명까지도 무너져 버리는 것이었 다.
‘끝까지 맞서야 한다! 이제야. 이제 야. 할 일들이 분명해졌는데!’
조슈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걸음을 뗐다.
“실수…… 하고 계신 겁니다.”
“실수?”
“인정하지요. 당신이 세계 제일의 부 호이며 세계 최대 투자 그룹의 실세라 는 것. 한데 여기는 카르얀 가문입니 다.”
재력은 물론이고.
“당신의 그룹을 감찰할 수 있는 힘이 있지요.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오 딘,공격을 중단하십시오. 가문의 어 르신들께서 마음을 바꾸시기 전에.”
“빌더버그 클럽을 말하고 싶은 거로 군. 그럼 더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나. 감찰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감찰 하도록 부탁할 자격을 갖췄다고.”
조슈아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 졌다.
던전 안에서 선후에게 했던 말들이 생각나서 였다.
베를린 텔레콤 파트너 지분,빌더
버그 클럽 등을 떠들어 댔었다.
그건 촛불이 태양 앞에서 자신의 불빛을 자랑하는 격이었다.
“그런데 조슈아. 너는 아직 카르얀 가문의 일원이 아니잖아. 가문을 네 것처럼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일러.”
“덕분에 이사석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축하할 일이군. 그럼 확인 해 볼 수도 있겠지. 확인해 보고 와 도 좋다. 네 가문에서 백악관에 어 떤 요청을 했는지.”
조슈아는 집사를 만나고 돌아왔다. 선후의 말은 사실이었다.
“빌더버그 클럽이 세계의 질서를 편 성하는 세력인 것만은 분명하다. 네 가문도 그 일원이고. 하지만 어디까지 나 기업,은행, 정치가들이 각자의 이 익을 위해 결성한 이익 집단인 것이지 혈맹이 아니야. 제 손해가 빤히 보이 는 일 앞에서는 계산기부터 두드려 볼 수밖에 없는 거다. 여기는 던전이 아 니거든.”
조슈아는 조용히 경청했다. 반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 일은 네 가문에서 독자 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거다.”
“그렇다면 더 신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오딘. 우리 가문과 오딘의 그룹이 전면으로 충돌하면 승자 없 는 전쟁이 되고 말 겁니다.”
“금융 전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 지 않아. 승자 독식이다. 러시아발 금융 전쟁에 대해서 들려주고 싶지 만…… 널 찾는군. 다녀와.”
잠시 후였다.
노크소리가 났다.
조슈아는 놀란 눈으로 선후와 문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 다.
집사는 조슈아를 안실로 데리고 갔 다.
“친구분인 건 맞습니까?”
“작년에 밴쿠버에서 만났던 친구입 니다. 설마하니,그 친구가 저 친구 일 줄이야. 세상 참.”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십 분이나 지났습니까? 어르 신들께는 좀 기다려 달라 하십시 오.”
“도련님. 어르신들의 입장에는 변 함이 없습니다. 자존심은 내려놓으 시고 인정에 호소해 주십시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돼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본가의 일원입니다. 그 런 저에게 자존심을 내려놓으라는
건,단순히 제 개인만의 문제가 아 닙니다.”
“도련님……
집사의 눈빛이 선명해졌다. 그의 입 에서 흘러나온 어투는 명백한 경고였 다.
“제 말씀을 이해 못 하셨군요. 어르 신들의 지시입니다.”
“말이 되는 소릴 하십시오. 그러실 분들이 아니십니다. 제게 숨기고 있 는 게 있다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 오.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 겁니 까? 저는…… 납득할 수가 없습니 다. 왜 본가가 이렇게 비굴하게 처
신해야 하는 겁니까. 우리,카르얀입 니다.”
“뉴욕과 런던의 조짐이 심상치 않아 졌습니다.”
그잠깐 사이에.
“뉴욕이라면 조나단 헌터겠는데,런 던은……
“질리언 투자 금융 그룹의 자금으 로 추정되는 것들까지 움직이기 시 작했습니다.”
“왜 그들이? 뉴욕은 그렇다 쳐도 런던은 우리를 배신하면 안 되는 겁 니다.”
런던. 그러니까 더 시티는 유럽 경제
의 중심지다.
질리언 그룹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투자 그룹이라 할지라도 널리 보면 다 같은 경제 권역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 이전에 질리언은 영국인,다 같은 유럽 경제인이 아니던가.
“런던의 어르신들은 대체 뭘 하고 계 신 겁니까.”
조슈아는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것도 지체 높은 가문의 어르신들을 질책하는 말들로.
하지만 집사는 그런 조슈아를 꾸짖 지 않았다.
집사의 심정 역시 조슈아와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때 였다.
집사에게 급한 연락이 들어왔다. 집 사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가 핸드폰을 끊으며 말했다.
“텔레스타 인베스트먼트와 골드 앤 실버 인베스트먼트도 합류했습니다. 이건 시작입니다. 도련님.”
텔레스타 인베스트먼트라면 제시카 페리 였다.
뉴욕 월가의 일개 전화 서기에서 일 천억 달러가 넘는 자본을 움직이며, 일약 여성 성공 시대의 상징이 된 여 성.
한때 질리언의 보조였기도 한 그녀 의 성공담은 유명했다.
집사의 핸드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 했다.
수많은 이름들이 거론된다.
작게는 몇천만,크게는 몇십억 달러 씩 움직이는 헤지 펀드들의 이름들.
조나단 그룹과 질리언 그룹 휘하의 헤지 펀드 외에도 꽤나 다양했다.
‘온갖 자본들이 가문의 압력에서 이 탈하고 있어 !’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자본들의 주인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카르얀 가문의 진정한 힘 중에 하나
였고 그래서 사태의 위급성을 절실 히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조슈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도련님!”
“……늦어 버린 겁니까?”
“저들이 공격 자금을 언제 늘려 버릴 지는 두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그때가 되 면 늦어 버 렸다고 말할 수 있겠죠.”
조나단과 질리 언이다.
그룹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공격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한 자본들은,단 지 시장의 흐름을 타고 있을 뿐이 다.
두 사람만 저지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장의 흐름은 뒤바뀌고 말 것이
다.
‘왜 질리언까지!’
조슈아는 속으로 소리쳤다.
“아직은 전면전이 아니라는 거지 요?”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 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질리언 투자 금융 그룹은 어떻게 막 으실 겁니까?”
“루카스 도련님이 런던에 계십니 다.”
“이 시국에 그 망나니 녀석의 이름 이 또 왜 나옵니까. 됐습니다. 저는 제 친구를 어떻게든 설득해 보겠습
니다. 그쪽부터 해결 보지요.”
애초에 본가가 몰락하고 나면,계 획하고 있던 바들 또한 물거품이 되 는 것은 물론이고 누려 왔던 것들을 다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오딘의 앞에 서니 결심 이 흔들렸다.
여기서 무릎을 꿇으면 다시는 돌이 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딘의 휘하로 영속되겠지.’
조슈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될 운명이었을지
도……
결국 조슈아는 선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가 선후를 올려다보며 말했 다.
“제가 졌습니다. 당신의 사람이 되겠 습니다. 그러니 이만 멈춰 주십시오.” 진심이면서 진심이 아니었다. 가문 을 위한 희생이었다.
가문이 존재하지 않으면 자신 또한 거죽만 남게 되는 일이니까.
“가문 때문에?”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사람이 되겠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변 함이 없고,진심입니다! 오딘.”
“이제는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만의 문제가 아닐 텐데.”
‘아! 질리언 그룹과도 얘기가 끝나 있었던 건가! 대체 어디까지……
조슈아는 선후의 표정을 읽을 수 없 었다.
“같이 방어 대열에 서 주십시오. 질 리언 그룹은 큰돈만 잃게 될 뿐입니 다.”
“이사가 되었다지?”
“예.”
“하지만 이사 중에서도 말단이겠군.
나와 같이 가자.”
“어디를 말입니까.”
“너를 차기 가주 자리에 앉혀 주지.”
“그건 아무리 당신이라도……
“가주가 진정 가문을 위하는 사람이 라면,그렇게 해야만 할 거야.”
“기다려 주세요. 오딘. 이야기 아직 안 끝났습니다. 질리언 그룹은!”
조슈아는 먼저 나가 버리는 선후를 뒤쫓았다.
선후는 처음에 집사를 만났고,그 다 음에는 가주와의 면담을 강력하게 요 청했다.
하는 수 없이 집사는 늙은 가주에게
선후를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선후가 늙은 가주에게 귓속말을 하 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그렇게 감정 이 급변하는 가주의 얼굴은 난생처 음이었다.
집사도 그렇지만,가주 역시 험난했 던 현대사를 관통하며 지금에 이른 위 인이었다.
선후가 일방적으로 말했고 늙은 가 주는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었다.
화악!
선후의 몸에서 보스방을 휩쓸었던 것과 똑같은 칼날의 기운이 솟구쳐
나왔다.
쉐아아악 –
그것은 넓은 방 안을 순간에 휩쓸었 다.
가히 대단한 속도여서 수십 개로 보 였다. 칼날 기운이 방 안 집기들을 산 산조각 내는 광경은 흡사 칼날을 품은 토네 이도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
철로 된 것이든,나무로 된 것이 든,수십 개로 갈가리 찢겨 우수수 떨어졌다.
너무도 빠르고 또 파괴적이라 조슈 아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게다가 선후의 전신을 타고 생성된
뇌력들까지 가세했다.
번개가 몰아치고 칼날 폭풍이 휩쓰 는 그곳은,신화 (# 話) 속에서나 다뤄 질 법한 공간으로 변했다.
그래서 조슈아는 단지 외칠 뿐이었 다.
“제발 가주 어르신을 살려 주십시오. 할 만큼 하지 않으셨습니까! 원하신다 면 영혼까지도 바치겠습니다. 제 것을 가져가십시오! 가주 어르신을,본가 룰! 그만 내버려 두십시오.”
조슈아는 울부짖 었다.
그런데.
언제 본인의 목이 잘려 나가고,언
제 본인이 타 버릴지 모르는 초자연 적인 광경을 목격하는 가주의 시선 은 조슈아의 예상과 판이하게 달랐 다.
경악하던 가주의 얼굴에 희미한 미 소가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바탕의 소동이 거짓말처럼 멎었 다. 가주가 조슈아에게 손짓했다.
선후도 턱짓해 보였다.
조슈아는 바닥을 기다시피 했다. 그 러고는 가주의 몸부터 살폈다.
그렇게나 무시무시했던 칼날 중 단 한 개도 가주를 훑고 지나간 게 없 었다.
“조슈아.”
“예. 어르신.”
“우리 가문이 네 대에서 진정한 날개 를 펴겠구나. 잘 모시며 우리 가문의 숙원을 풀어 보거라.”
“어르신?”
“본가는…… 콜록! 네게 방해가 될 것들을 치워 주고 물러나 주마.” 그러면서 가주가 선후를 바라보았 다. 선후는 고개를 끄덕 였다.
“손자 녀석을 잘 이끌어 주시게. 부 족한 녀석은 아닐 게야.”
“그래서 조슈아를 선택한 겁니다.” 선후가 대답했다.
조슈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선후가 핸드폰을 들었다. 네 번 의 짧은 통화가 있었다.
조나단 투자 금융 그룹,질리언 투자 금융 그룹,텔레스타 인베스트먼트, 골드 앤 실버 인베스트먼트.
선후는 공격을 중단하라는 일방적인 통보만 했다. 조슈아는 그러한 선후를 바라보는 가주와,선후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었다.
본가를 공격하는 데 선봉에 섰던 거 대 자본 모두가 실은 한 명의 지시를 따르고 있던 게 아닌가!
물론 오딘이 진짜 모든 자본의 주인 일 리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규합해서 움직일 수 있는 힘 !
판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 힘이 야말로…….
본가에서도 그토록 손에서 넣고 싶 어 했던 힘인 동시에,수백 년을 걸쳐 서도 이룰 수 없었던 야망이었다. 한 데 눈앞의 남자는?
남자는 이미 그의 제국을 완성시켰 다.
‘오딘은…… 진짜 오딘이었어……
조슈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선후가 조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때야말로 조슈아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조슈아는 선후가 내민 손을 바라보 았다.
시야 속 모든 배경이 사라지고 선후 의 손밖에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거대한 손이었다.
조슈아는 어딘가에서 들려오기 시작 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세계의 질서가 다시 짜여질 거다. 내 질서 안으로 들어와라. 조슈아.” 그러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 가.
그 누가 저 명령을 거부할 수 있겠는 가.
자신의 대에 이르러서 본가는 일개 귀족에서 왕가로 승격될 것이다.
“예. 마스터 (Master).”
공항까지 배웅하겠다는 조슈아를 말 렸다.
녀석에게는 더 중요한 일들이 산더 미처럼 쌓여 있었다.
레볼루치온을 정비하는 것 외에도. 가주와 함께 가문 안의 라이벌들을 숙청하는 작업이 남아 있다.
그렇게 카르얀 가문에는 한바탕 피
바람이 예정되었다.
중세처럼 목을 치거나 독배를 선사 하진 않겠지만 지금 시절의 룰대로 인 사이동이 시작될 것이고,조슈아의 직 계를 중심으로 이사회가 개편되는 것 이다.
< 남 좋은 일만 시켜 준 건 아닌지, 신경 쓰이는군. 이 세계에 완전한 동맹은 없잖 아.〉
< 이쪽 일은 내게 맡겨 두고 신경 꺼. 이 러니저러니 해도 손해 본 게 없으니까.〉
〈 그건 우리들만 그렇고. 후!〉
확 들어온 숨소리에,조나단이 인상 을 쓰고 있는 모습이 생생했다.
< 아래층들에서 불만이 폭주한다. 브라 이언 이 새끼가 제일 난리야. 오냐오냐해 주니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구는데,이 새끼가 진짜…… 인내심 시험하네?〉
그룹 직원들 입장에서는 도전적인 프로젝트였으며,승리할 가능성 또한
적지 않았다.
LTCM과 이번 일을 담당하고 있던 몇 개 데스크들은 공격 대열에 합류한 자금(맨 섬과 런던 그리고 추종 세력 들)이 늘어난 순간.
본인들 손으로 신 역사를 쓰고 있다 는 흥분에 휩싸였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열광의 도가니였을 터.
거기서 발을 빼라는 지시가 내려오 기 전까지는 말이다.
< 4억 달러 손실. 그것도 우리 대단하신
브라이언님께서 잘 대처해 주셨기 때문이 었지.〉
< 뉴욕과 맨 섬의 손실금까지 합치면 규 모가 꽤 되겠어?〉
〈당연히.〉
〈 직원들 관리 잘해야지.〉
월가에서 가장 발이 빠른 건 헤드헌
터들이 다.
그들은 보통 이직할 사람이 받는 1년 연봉의 3할 정도를 소개비로 챙긴다.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도둑고양이 처 럼 온갖 그룹들을 기웃거 린다.
먹잇감을 찾으면 은행 및 투자 회사 그리고 헤지 펀드들의 조직도가 담긴 폴더를 펼치고는,먹 잇감을 유인한다.
그걸 최대한 방어하는 것이 조나단 의 역할 중에 하나다.
조나단이 급히 전화를 끊었다.
뉴욕이 아니라 서울로 들어온 이유 는 런던에 있는 동안 북미에 탄저균 테러 문제가 또 터져 버렸기 때문이었 다.
위조 여권을 가지고 뉴욕 공항 심사 대를 통과하는 건 아무래도 꺼림칙했 다.
그 동안 쉼 없이 달려왔다.
서울에 들어온 김에 부모님도 뵙고 집에서 쉬고 싶었다.
일종의 휴가인 셈이다.
때는 01년 10월 말.
나노 소프트에서 완벽한 운영 체제 라 칭송받는 도어 XP를 출시한 일로 용산 일대가북적거렸다. 컴퓨터 업계 의 도매업자들이 몰고 온 승합차들이 한쪽 도로를 점거하고 있었다.
그 뒤쪽은 재건축 아파트 현장이었 다.
그런데 공사 안내판 속으로 반가운 이름이 보였다.
「공사명 : 우형 2차 아파트 재건축현장
공사 규모: 지하 2층 / 지상 15-21 층
연면적: 240,990 m2
공사 예정 기간: 20이년 10월 4일 -2004년 2월 28일 시공사: 주식회사 일주 건설」
일주 건설.
최 사장의 사업이었다.
그간 병동들을 건설하며 누적시킨 수익과 완공 경력으로 한 단계 도약하 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 아…… 선생님! 선생님이십니까?〉
< 죄송합니다. 해외 출장 차 오랫동안 연 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공사 현
장을 발견하고 연락드리는 겁니다. 우형 2 차 아파트 재건축 현장 말입니다. 축하드 립니다. 제가 다 기쁘네요.〉
< 현장에 계시다고요? 어디…… 안 보입 니다.〉
< 여기가 후문 쪽인 것 같군요. 샤를리아 건너편 도로입니다.〉
〈 기다려 주십시오.〉
최 사장이 현장복 차림으로 뛰어오 는 게 보였다. 우리는 근처 카페로 자 리를 옮겼다.
IMF를 극복하고 바야흐로 아파트를 시공할 수준으로 성장한 일주 건설이 었어도,지분의 51%는 내 유령 회사
중 하나에 속해 있었다.
그것 때문에라도 그에게 처리해 줘 야 할 일이 있었다.
가뜩이나 사업이 잘나가고 있는 상 황에서는 더욱이.
“전일 그룹에서는 우리 사업을 모르 더군요.”
“당황스러우셨겠네요. 제가 충분한 설명을 드린 것 같은데,회장님 직속 부서라고.”
“그러셨죠. 그런데 하늘같은 전일 회 장님을 제 신분으로 뵐 수야 있었겠습 니까. 정말 선생님 찾아서 사방팔방 헤매고 다녔습니 다.”
“선생님,선생님 하지 마시고, 과장 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부담스럽습니 다.”
“……정 그러시다면 과장님으로 호 칭 정 리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과장님 은혜,제가 죽을 때까지 잊 지 않겠다고 한 거 기 억하십니까.”
“그럼요.”
“시공사 물건으로 잡힌 것 중에 가장 큰 평수 로얄 층, 전망 좋은 걸로다 두 개 빼놓았습니다. 야매로 복층 뚫을 예정이고요. 이걸로 무슨 보은이 되겠 냐마는 성의라 생각하고 받아 주셨으
면 합니다. 첫 삽은 이번 달 초에 폈고 3년이면 끝장 봅니다.”
최 사장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 쳤다.
“필요한 서류만 준비해 주시면 제가 등기 찍어서 드리겠습니다. 전매하시 든,완공 때까지 보유하시든. 마음대 로 하십시오. 과장님.”
“회장님 귀에 들어가면 저 모가지 날 아갑니다.”
“아이고. 아랫것 놀음이 어떻게 하늘 같은 전일 회장님께 닿겠습니까.”
“……주신다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만.”
“그렇게 하는 깁니다.”
최 사장은 밝게 웃었다. 한결 짐을 덜어 놓은 듯 환한 미소였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죠.”
“본론 같은 거 없습니다. 첫 삽 폈을 때 선생님…… 과장님부터 생각났습 니다. 그래 지금이다! 했죠.”
“그보다도 장부는 깨끗하게 관리하 고 계신 거죠?”
“최대한 그러려고 하고 있긴 한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건설판 돌아가는 게 콤퓨타처럼 척척 돌아가 지 않잖습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과장님께서 연결해 주신 외 국계 회사 있다 아입 니까.”
최 사장의 입에서 사투리와 서울말 이 아무렇게나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고 회사가 참말로 조용한 게 소름끼 치는지라. 나름대로 알아봐도 바다 너 머 회사라 한계가 있고,계속 깜깜무 소식이기만 하니 이를 우찌 받아들여 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 회사에 대 해 아는 것이라곤 배당금 넣을 계좌가 전부 아입니까.”
“깨끗하게 운영하면 별일 있겠습니 까.”
“콤퓨타요. 콤퓨타처럼 되는 게 아니 라 안 갑니까.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장부를 이해 못 할 겁니다. 증말 언제
닥칠지 모르는 외국인들 생각하믄 자 다가도 발딱발딱 눈부터 떠 집 디다.” 나는 고개를 끄덕 였다.
“지금까지 배당 친 게 있습니까?”
“거래하는 회계사가 해도 된다 카더 라고요. 안 되는 거였습니까?”
최 사장의 안색이 순간 불안해졌다.
“아닙니다. 이사회 결의로만 가능합 니다만,추후 문제의 소지가 있죠. 그 래서 얼마나 치셨습니까?”
“제게 들어온 것만 치면 큰 걸로 20 장 정도 됩니다. 나중에 작은 빌딩이 라도 올리려고 따 놓은 땅까지 하믄 40장 정도까지 됩니다.”
“많이 버셨네요.”
“그게 다 과장님 덕분입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감사 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외국인들이 감사직 맡고 있지 않습니 까.”
최 사장에게서 헉 소리가 났다.
“이거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조용한 걸 보면 별 탈 없이 지나갈 것같긴 합니다.”
”으…… 회계 쪽은 회계사가 전담하 고 있어서 저는 잘 모릅니다. 배워 보 려고 하는데 뭐 그리 복잡한지. 일주 건설이 외국인과 제 것이지만 또 우리
게 아니라고도 하고. 회사가 번 돈이 제 돈이지만 또 제 돈이 아니라는 어 려운 말들만 합니다.”
최 사장은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그 는 불안한 듯 코를 긁어 댔다.
“지금부터 라도 공부하셔야겠습니 다, 사장님. 사업이 작을 때야 상관없습니 다. 하지만 지금처럼 경리와 회계사에 게 다 맡겨 버리다 보면 뒤통수 크게 맞을 날이 올 겁니다. 조심하세요.”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라믄 고 외국인들하고 지금도 알고 지내십 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하믄 입 한 번 맞추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거 참 계속 사투리가 나오네요.”
“편하실 대로 말씀하세요. 표준어가 별겁니까. 내 속 편한 게 표준어지. 그 리고 무슨 생각이신지는 알겠습니다. 일주 건설 지분을 사들이고 싶으신 거
죠?”
“하모요. 이러다 제 명부터 조지겠습 니다. 사업은 승승장구인데,허연 외 국인 저승사자들이 언제 들이닥쳐서 내쳐 버릴지…… 모리긴 해도 가능한 이야기 아닙니까? 회계사도 그걸 얘 기한다 안 갑니까. 빨리 정리해야 한
다꼬.”
“사장님. 그게 외국계 기업의 무서운 점입니다. 그들이 왜 조용하겠습니까. 왜 생돈을 ‘일주 공사’에게 퍼부어 일 주 건설로 만들어 주겠습니까. 자선 사업 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외국 기업이 당시의 일주 공사에게 투 자했겠습니까.”
“과장님 은혜는 죽을 때까지 갚겠습 니다. 우리 일주 건설 말입니다. 무슨 말이라도 섞어 봐야 콩을 쑤든 메주를 쑤든 할 낀데……
“주주 총회. 단독 의결권까지 1.1% 이상의 지분이 부족하지요?”
“예.”
“1.1% 값으로 그들이 얼마를 부르겠 습니까. 사장님 사업이 잘될수록 천정 부지로 뛰는 게,그 1% 조금 넘는 지 분입니다.”
“당시에는 물불 가릴 게 없었는
데…사업이 커지다 보니 그 1.1%
때문에 뭘 할 수가 있어야지요. 아니 믄 입이라도 맞출 수 있게 연락이 되 든가. 참말로. 답답합니다.”
내 재산 전체를 사막이라고 놓고 봤 을 때.
일주 건설의 51% 지분은 일개 모래 알밖에 되지 않는다.
증발해도 티가 나지 않는 수준.
그러나 그것이 최 사장에게 무턱대 고 던져 버려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 다.
그럴 경우에는 정당한 대가가 교환 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일주 건설은 이제 막 커 나가는 회사 다.
재건축 붐,신도시 개발.
최 사장의 사업은 놀라운 속도로 번 창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의결권이 넘어가는 1.1% 의 지분 값은 얼마인가.
나머지 총 지분의 값은?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 다. 최 사장이 배당으로 모은 40억으 로는 어 림도 없다.
똑같은 제안을 최 사장에게 해도 그 는 미쳤냐는 소리부터 할 것이다.
“그럼요. 사장님.”
“예.”
“장담은 못 하겠지만요.”
“예.”
“하시는 사업에 문제없도록,위임장 가져와 보겠습니다. 그들도 잘나가는 사업 막고 싶진 않겠죠. 경영에는 관 심을 보이지 않으니,아마 될 겁니다. 그거면 되겠습니까?”
“아…… 하모요! 그거라도 감지덕지 아이겠습니까. 그라고 저도 동참하고 싶습니다. 우리 일주 건설 51%나 가 지고 있는 인사들 얼굴,한 번도 못 봤 다 안 갑니까.”
“그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사장님 참석하시게 되면 테이블에서 나올 말 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어떤……
“이참에 장부 좀 보고 계산 제대로 하자고 하겠죠.”
최 사장의 얼굴에 곤란한 빛이 스치 고 지나갔다.
“대신 그들과 연결할 수 있는 이메일
주소 하나 알려 드리겠습니다. 웬만하 면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겠지만 말입니다.”
종이와 펜을 가져와 이메일 주소를 썼다.
최 사장은 그것이 담긴 종이를 당첨 복권처럼 지갑 안,가족사진 뒤에 조 심히 집어넣었다.
그때 본 가족사진.
최 사장의 번창한 사업이나 묵직해 진 주머니 사정보다도.
그의 화목한 가족 분위기가 참 마음 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