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30
30화.
30화
푸훗, 지후의 입술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비웃음을 마주하자 정말로 부끄러워졌다.
“그러니 저녁은 가지 마세요.”
“펑크 내려고 ”
“아니요. 그럴까도 생각했는데 굳이 피할 이유가 없네요. 그건 너무 찌질하잖아요. 즐겁게 2인분 먹고 마시고 오겠습니다.”
“펑크보단 열 배쯤 낫다.”
“네, 맞아요. 해장국 잘 먹었습니다. 찬후 오면 따끈한 간식 맛있게 만들어서 줄게요.”
가흔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낯선 골목이지만 골목 끝엔 큰길이 나오겠지. 핸드폰 케이스 슬릿에 교통카드 한 장이 들어 있으니 버스 정류장만 찾으면 집에는 갈 수 있을 테다.
툭툭 가슴뼈를 두드리고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골목길을 빠르게 벗어나 큰길가로 접하여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우측 아래로 2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버스정류장 표시가 보였다. 햇빛 때문에 손등으로 이마를 덮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정가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려 보니 안소니다.
“설마, 따라왔어요 ”
“제대로 가는지 에스코트 ”
“맞나요 ”
“대충.”
“제가 공간지각력이 좋아요. 머리가 좋거든요.”
지후가 고갤 돌리며 웃었다.
“차로 데려다줄게.”
“아뇨, 저기 정류장이네요.”
가흔이 손을 뻗어 길 아래를 가리켰다.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교통카드도 있고요.”
“그래.”
“에스코트 고맙구요. 선배님은 진짜 매너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진정 황실급.”
“그럼 5시에 데리러 갈게.”
“네 왜요 ”
지후가 모르는 척 답했다.
“차가 좀 막힐 수도 있어서. 여유롭게 가자.”
“그 말이 아니잖아요.”
“일방적으로 굴지 마. 내가 간다고 했잖아.”
“왜요 ”
“와인 좋아하고. 공짜 밥 싫을 이유가 없고.”
“선배님!”
바람이 쉬익 불어 가흔은 입을 가리고 기침을 뱉어 냈다. 지후가 제 머플러를 풀어 서슴없이 가흔의 목에 여러 번 휘휘 둘러 주었다. 어어, 할 사이도 없었다. 지후의 체온으로 데워진 머플러가 가흔의 차가워진 코와 뺨을 감쌌다.
“그래, 버스 타고 가.”
지후가 손을 들어 보이고 한 걸음 물러섰다.
“아, 그리고 차려입지 마.”
무슨 말인가 싶어 가흔이 지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니트나 바지, 스커트 아무거나 편하게 입어. 화장도 필요 없어.”
“눈에 확 띄겠어요.”
너무나 허술한 차림이어서. 가흔이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제가 가진 옷가지를 훑어보다 자조적으로 답했다.
박다인,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마나 완벽하게 하고 나올까.
“응, 눈에 확 띌 거야. 다들 너만 쳐다볼걸.”
지후가 툭툭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화려한 액세서리 달고 갈 거잖아.”
가흔이 크흐흡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간다.”
뒤돌아서 멀어져 가는 지후의 모습을 쳐다보며 가흔은 속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얇아 보이는데 무슨 소재길래, 이렇게 따뜻하니.
가흔은 풍성한 머플러에 코를 묻었다.
***
선은 공고하지 않고 관계의 축은 순식간에 기울어진다. 기울어진 축의 끄트머리는 지렛대가 되어 쉽사리 마음의 빗장을 걷어 낸다. 열일곱 살 가흔은 알고 있었다. 마음이란 어처구니없을 만큼 물렁물렁하여, 그런 식의 침입은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안소니를 향해 들썩거리는 빗장 끝을 힘껏 붙잡고, 이스트를 넣은 반죽처럼 함부로 부풀어 흘러넘치는 마음을 눌러 담아야 했다.
가흔은 머리를 단단히 묶어 올렸다. 컬을 넣다가 실패한 머리는 둥그렇게 말아 뒤통수에 붙었다. 거울 속 여자는 완벽한 성인이다.
이제는, 서른 살이니까.
종아리를 반이나 덮는 무늬 없는 에이치라인 스커트와 단순한 디자인의 니트 상의는 약국에서 일하기에 편해 가끔씩 입는 평상복이었다. 스커트는 검정색, 니트도 검정색. 패딩을 제외하니 반코트라 부를 수 있는 건 두 개밖에 없었다. 자주 손이 가는 코트를 입고서 거울을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블랙. 가흔은 휴우 한숨을 쉬고는 다른 코트를 꺼내들었다. 지난겨울 홈쇼핑에서 파격가로 진행한다는 외투는 세 개가 세트였다. 신영이 주문하고선 그중 하나를 도저히 색이 안 받아 못 입겠다고 가흔에게 떠넘겼다.
‘내가 이걸 입으면 딱 튼튼한 크리스마스트리야.’
‘나는 뭐 다르겠니 ’
‘넌 얼굴 뽀얗잖아. 울 엄마가 나 보더니 넌 피부가 시커매서 초록이 제일 꽝이래. 유치원도 초록색 체육복을 입히는 곳은 피해서 보냈다나. 어떻게나 팩트를 콕콕 찍어 화살로 날리시는지. 친엄마 맞냐고. 내가 울 엄마 때매 자뻑은 한평생 못 해 봤네 ’
옷장에만 걸어 둔 초록색 코트를 빼내어 목에 가만히 대어 봤다. 가흔은 엄마가 일부러 학교를 고른 것도 아니었는데 초록색은 체육복으로도 입어 본 적이 없다.
어색해라…….
침대에 검은색 반코트와 초록이를 나란히 펼치고 골똘히 고민하였다. 결국 나가기 직전에 눈을 질끈 감고서 확 집어 들었다.
가흔이 빌라 현관문에서 나오자 안소니가 차에서 내렸다. 웃으면서 손을 들어 준다.
지후는 옅은 그레이빛이 도는 베이지 터들넥 스웨터에 비슷한 톤의 싱글 모직 코트를 입고 있었다. 코트 길이가 길지 않았는데도 키가 훌쩍 커 보였다. 지금도 가늘고 기다란 체형이지만, 확실히 고등학생 안소니보다 어깨도 넓고, 가슴도 넓고……. 오전에도 충분히 멋있었는데, 지금은 패션지 모델 컷에서 갓 빠져나온 남자 같았다. 부드럽게 미소를 띤 지후를 보니 가흔은 절로 숨이 가늘게 쉬어졌다.
가흔이 억지로 웃으며 물었다.
“어때요 저 좀 우스꽝스러운가요 ”
“아니 ”
“저……, 크리스마스트리 같지 않아요 ”
지후가 풉 짧게 웃더니 차 문을 열었다.
“딱히 선택지가 없었거든요. 아참, 이거 고마웠어요.”
가흔이 종이백에 담은 지후의 머플러를 건넸다. 지후는 흘끗 봉투 속을 확인하고 차 뒷자리에 넣어 두었다.
“지금 출발하면 조금 일찍 도착하겠다. 누구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어 ”
지후가 시동을 걸면서 물었다.
“아, 아마도 이원일 ”
“응.”
차가 천천히 빌라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경사진 골목길을 내려갔다. 다니던 사람이나 차가 적던 오전과 다르게 도로가 제법 복잡했다. 인도가 구분되지 않는 길이라 행인을 살피며 지후는 느리게 차를 움직였다. 마주 오는 차량 때문에 빠듯한 간격으로 골목길 벽에 붙어 서서 기다리기도 하였다.
좀 큰길로 나와서야 제대로 된 주행이 시작되었다. 가흔은 운전하는 지후를 흘끗 곁눈으로 보며 핸드폰을 셀카 모드로 돌려 얼굴을 확인했다. 비비크림은 발랐지만 눈썹도 그리지 못했다. 펜슬을 살짝 움직여 봤는데 숯검댕이가 되어 버려 세 번을 거듭 그렸다가 지워 내고는 도저히 수습이 되지 않아 세수를 했다. 크림 형태라 누구나 실패 없이 할 수 있다는 볼터치를 시도했는데 거울 속엔 피에로가 마주 보고 있었다. 다시 세수. 결국 비비크림에 립글로스만 바른 얼굴은 민낯에서 조금 나은 정도였다. 레스토랑 조명발에 기대하는 수밖에.
그러고 보니 조명이 어떤가 궁금해졌다. 가흔은 레스토랑 내부 사진을 올린 블로그를 검색하다가 훅 숨을 내쉬고는 핸드폰 화면을 껐다.
언제 안소니 옆에서 초라하지 않은 적이 있나, 새삼스럽긴.
화면이 죽은 핸드폰을 무릎에 엎어 두었다. 운전하는 지후를 계속 흘끗거릴까 봐 아예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릴없이 창밖 외부로 시선을 던지고 있자니 잡념이 어지러이 떠돌았다. 두어 번 자그마한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와 입을 꾹 다물었다.
저녁시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강남 쪽에 들어서자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일찍 도착하기는커녕 혹시 늦을까 싶었는데 레스토랑에는 거의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다.
지후가 발렛 파킹을 하는 직원에게 차 키를 건네는 동안 가흔은 어색하게 핸드백 손잡이만 매만졌다. 지후가 몸을 돌려 다가오자 가흔이 먼저 레스토랑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잠시만.”
지후가 코트 위로 가흔의 팔을 잡았다.
“네 ”
너무 긴장된 목소리로 되물었는지, 지후가 조금 웃었다.
“이거 너한테 어울리겠는데.”
부드럽게 말하며 돌려줬던 머플러를 건네었다. 가흔이 집에서 성분표를 뒤집어 보니, 넓은 블록 형태로 컬러 톤과 감이 다르게 이어진 머플러는 모달과 실크, 캐시미어가 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었다. 로고는 읽기도 어려운 흘림체였다. 읽어도 알 수 없는 브랜드였겠지만, 불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금빛이 도는 머플러는 ‘나 비싸요. 무지하게 비싸요.’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음식을 먹다 흘리기라도 하면 곤란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 아니에요. 실내에 있을 테니 춥지도 않고.”
“코트 벗으면 좀 싸늘할 수도 있어. 아까 기침도 하던데.”
“아.”
가흔이 이런 레스토랑에서는 코트는 벗어야 예의인가, 아니면 너무 촌스러워 벗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건가, 스웨터에 자잘히 일어난 보풀은 다 제거했던가, 하는 당황스런 의문들을 가지고서 지후를 바라보았다.
“약사님이 감기 걸리면 환자들한테 민폐 아닌가.”
지후가 가흔이 여전히 들고만 있는 머플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가 해 줄까 ”
“아니요, 제가.”
얼결에 둘둘 목에 두르자, 지후가 자연스레 손을 올려 매만져 주었다. 두어 번 움직였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모양이 달라졌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매사에 여유롭고 능숙할까. 좀 얼이 빠진 모양새로 지후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아…….
가흔이 입을 작게 벌렸다.
“가자.”
지후가 팔을 내밀며 말했다. 가흔은 조금 몸을 뒤로 뺐다. 고개를 젓다가 훌쩍 붙어 온 지후 때문에 숨을 삼켰다.
“액세서리는.”
갑작스런 귓속말에 목덜미까지 좌르륵 소름이 돋았다. 얼굴을 보지 않는데, 미미하게 지후의 웃음이 느껴졌다.
“……몸에 붙여야지.”
가흔은 제 손이 자석에 끌려가는 클립인가 싶었다. 마치 제자리인 양 지후의 팔에 가흔의 손이 놓였다.
이끄는 대로 움직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프렌치 식당은 얼핏 봤던 미식가 블로그에 올려진 사진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입구는 천장까지 닿을 만큼 기다란 단풍나무와 은행나무 가지로 장식되어 있었다. 분명 살아 있는 나뭇가지는 아닐 텐데, 풍성히 매달린 잎들은 나무를 통째로 옮겨 놓았나 착각할 만큼 생동감이 있었다.
홀 내부로 들어가면서 가흔은 비밀을 알아챘다. 높다란 천장에 촘촘히 박힌 작은 램프들이 뿜는 빛은 모두 따스한 골드색이었다. 분할되지 않은 뚫린 공간에 안정감을 부여하는 것은 직육면체 기둥들이었는데, 채도 낮은 청록색이 감도는 검은 대리석과 장밋빛 옅은 빛깔의 목재로 다르게 마감되어 있었다. 기둥 너머 벽면은 길고 얇게 잘라낸 상아빛 대리석을 빗살처럼 세워 두어, 그 사이에 숨겨 둔 조명이 간접적으로 공간을 온화하게 밝혔다. 대리석 빗살이나, 튼튼한 기둥이나 모두 부드러운 황금빛 조명 아래에서 화사한 생기가 돌았다. 검은 대리석 바닥은 사금을 흩뿌려 놓은 듯 떨어지는 빛에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