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32
32화.
32화
지후가 가흔에게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초콜릿향이 난다는데 ”
“와인에서요 ”
“그렇대. 난 잘 모르겠지만, 빈티지가 좋다니 그럴 거야.”
와인이라고 먹어 본 건 세 번이었나. 그 중 가장 비싼 와인이 승준과 헤어지고 홀로 마트에 가서 골랐던 거금 4만 5천 원짜리였다. 분명 나쁘지 않은 맛이었을 텐데, 쓰고, 시고, 독하기만 했다. 그런데 초콜릿향이 나는 와인이라니…….
“신기하네요. 저는 어떤 맛일지 상상도 안 돼요.”
“그럼, 상상 대신 직접 맛을 봐.”
그렇게 말하는 지후의 목소리에서 문득 초콜릿 와인향이 나는 것 같았다. 가흔이 저도 모르게 조금 얼굴을 붉히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후가 소믈리에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네, 한번 드셔 보신 분들은 꼭 다시 찾으시는 와인이죠.”
추천에 대한 만족스런 평가를 받아 들고서 소믈리에는 개운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원일이 미리 주문한 기본 코스는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흔은 천천히 모든 디시를 다 비웠다.
맛있어요. 신기해요. 어쩜 이렇게 멋지게 세팅하다니. 이런 음식은 처음 먹어 봐요.
순수하게 드러내는 감정에 굳어 있던 분위기가 어느새 자연스러워졌다. 메인 디시 이후, 셰프가 식당 홀로 직접 나와 특별 디저트를 서비스로 제공했다. 코냑을 이용한 불쇼를 곁들인 플람베였다.
지후가 셰프에게 가흔을 소개시켜 주었다.
“세프님 팬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분이 팬이라시니, 영광인데요.”
화면에서와 똑같이 셰프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흔은 티비에서 보고는 꼭 한 번 셰프님 요리가 먹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뵐 줄은 몰랐다고 솔직한 기쁨을 드러냈다. 가흔이 몇 가지 인상 깊었던 요리들을 이야기하자, 셰프의 불쇼는 더욱 화려해졌다.
“와아아.”
가흔이 아이처럼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한 번 더 아름다운 장미처럼 붉은 불길이 솟았다. 쇼만큼 멋지게 완성된 디저트를 서빙받는 동안, 소믈리에는 하트 그림이 그려진 와인을 따라 주었다. 원일과 다인이 호들갑스럽게 맛을 찬양했다. 조금만 더 열리면 완벽할 것 같다는 전문적인 듯한 말도 했지만, 가흔은 잘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혀를 적시는 와인은 그윽하고 부드럽고 조금은 흙향이 돌고, 그리고…….
“어때, 초콜릿향이 나 ”
지후의 물음에 가흔은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달콤쌉싸름한 카카오향이 입안을 휘감았다.
“그런 것……, 같아요.”
황금빛 조명 아래 뽀얀 얼굴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입술 끝을 올리며 가흔이 웃었다. 지후가 바라보자 곤란한 듯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조금 취한 듯해요.”
가흔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지후는 가흔의 작고 예쁜 뒤통수가 쓰다듬고 싶어졌다. 뒤통수를 쓰다듬고 애틋한 어깨를 만지고 팔을 둘러 제 몸에 가흔을 기대게 하고 싶었다.
“와인향이 너무 좋아요. 향만 맡아도 긴장이 풀어져요.”
금빛 머플러를 두르고서 가흔이 지후에게 말했다. 지후가 코트를 벗겨 주었을 때, 흐음, 작게 숨을 들이켠 사실을 가흔은 알지 못하겠지 하고서 생각했다. 동그랗고 예쁜 가슴에 눈길이 닿았던 것도 모를 테다. 애써 매너 있는 척했으니까.
민지후라는 액세서리 없이도 가흔이 네가 제일 우아하고 예뻐. 모든 여자가 질투할 만큼, 모든 남자가 갖고 싶어 애 닳을 만큼. 그걸 모르는 네가 예전에도 지금도 나를 더 미치게 만들지.
고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그 몸을 끌어안으면 포근한 밀 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도톰한 입술 사이로 들어가는 붉은 와인을 끈질기게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박다인의 시선이 느껴져 지후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둘이 무슨 사이인가 의심하는 눈초리를 향해 익숙한 미소를 만들었다.
“원일 씨. 와인 더 들래요 ”
다인이 활짝 웃었다.
“아이, 선배님. 말 놓으시라니까요오.”
“그러시지요. 변호사님, 아니 제가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사촌형 친구분이시니까. 자주 뵈어요, 형님! 가흔 씨, 자주 봐요. 우리.”
원일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긴 시간 식사를 마치고 가흔은 지후와 나란히 차량 뒷좌석에 앉았다. 대리기사가 운전하여 가흔의 집으로 가는 동안 가흔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조금씩 웃었다.
오늘따라 빌라 앞 주차 공간이 가득 차 있었다. 둘은 빌라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려 가흔이 사는 동 앞까지 걸어갔다. 가흔이 혼자 갈 수 있다고 했지만 지후가 대리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따라 내렸다.
“환상적이었어요. 아름다운 음식……. 멋진 와인. 언젠가 한 번은 그런 사치 부려 보고 싶어 상상만 거듭했었어요. 몇 시간 먹고 마시고 났더니 더 얼떨떨해요. 꿈에 푹 빠져 있다가 아침에 되었는데, 아직도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한 기분이에요.”
차가운 바람이 데워진 뺨을 식히며 지나갔다. 이제는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다. 12시 종소리가 울리진 않았지만, 마차는 호박이 되어 버리겠지.
가흔이 걸음을 멈추고 지후를 마주 보고 섰다.
“고마웠어요. 오늘.”
“공짜 밥은 내가 먹었는데 ”
“최고의 액세서리.”
“아.”
지후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좀 멋있어.”
“으아.”
가흔이 손가락을 오므리고서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아닌가 ”
“아뇨, 아뇨. 농담이요. 선배님이야 늘 언제나 눈부시죠. 안소니잖아요! 저는 뭐 선배 옆에 있으면 둘리 한 마리 아니겠습니까.”
지후가 푸흣 소리 내어 웃었다.
“넌, 둘리보다는 예뻐.”
“감사합니다아.”
가흔이 잠시 지후와 눈을 맞추었다. 심장이 초록빛 코트 안에서 세차게 움직인다. 안소니 앞에서 두근거리는 박동은 툭툭 튀어오를 때마다 나약한 마음에 상처를 만들었다. 매일 새로 생기는 상처를 어느 날은 모르는 척하고, 다음날에는 칭칭 동여맸다. 차라리 보지 않기를 원했지만 안소니가 제공하는 안락한 학습 환경을 놓칠 수가 없었다. 지후와 공부를 한 이후 성적이 가흔도 놀랄 만큼 빠르게 상승했고, 높은 성적은 가흔의 마음에 강한 희망을, 뒤이어 욕심을 부풀렸다. 형편이 여유로운 친구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어떤 과정을 과외나 학원을 통해 미리 배우고 앞서 달리는지 알고 있었다. 1년만 이렇게 해 놓으면 학년이 올라가도, 고3이 되어 수능까지 밀리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약대에 갈 수 있지 않을까. 가흔은 작고 낡은 방에서 지후의 책을 펼치고 이를 악물었다.
안소니를 좋아하고 동시에 미워했던 시간들이 가속도를 내며 굴러오고 있다. 멍들었던 심장과 비참한 자격지심이, 그럼에도 따뜻했던 순간들이 눈덩이처럼 빠르게 덩치를 키우며 가흔을 향해 다가왔다. 가흔은 혀를 내밀어 바싹 마른입을 축였다. 그 모든 순간에 있었던 남자를 향해 매끄러이 웃는다.
이제는 유리구두를 벗을 시간.
“머플러 고마웠어요. 없었으면 너무 허전할 뻔했지 뭐예요.”
가흔이 머플러를 빠르게 풀었다.
“뭐 묻히고 먹을까 봐 목이 다 빳빳해졌어요.”
차가운 바람이 순식간에 목덜미를 파고들어 가흔은 어깨를 움츠렸다. 내민 머플러를 지후는 받지 않았다.
“너 해라.”
“필요 없어요.”
“나도 필요 없어.”
“뭐 묻었을까 봐요 ”
지후가 손을 들었다.
“안녕.”
돌아서 걷는 지후를 보며 가흔은 머플러를 움켜쥐었다. 자꾸만 지후의 모습이 흐려져 속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후는 대리기사에게 주소를 말하고 차 뒷좌석에서 눈을 감았다.
술 마신 다음날, 누군가가 챙겨 주는 뜨끈뜨끈한 해장국.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아름다운 코스 요리를!
비싼 와인과 특별한 안주.
가흔의 다이어리, 위시리스트.
핑크빛 다이어리에 적혀 있던 동글동글한 글씨가 떠오른다. 이제는 외워 버린 리스트…….
***
처음으로 취하도록 마셔 본 날이었다. 하늘이 까맣고 흰 눈이 포실포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밤이었다. 법대 신입생들을 미리 불러 놓고 선배들이 자꾸만 잔을 돌렸다.
“네가 민병훈 손자냐.”
“네.”
지후는 고개를 숙였다. 잔을 받아 비우고 두 손으로 내밀었다.
“야아, 고시 교과서 책등에 맨날 한자로 보던 이름의 손자라니. 근데 너 할아버지도 이렇게 잘생기셨던가.”
선배는 툭툭 옆에 앉은 친구들을 두드리며 물었다.
“민병훈 닮았어 ”
“누구 ”
“몰라 민법 대가. 이번에 손자 들어온다고 교수님이 흥분하시던데.”
“그 민병훈 우아. 그럼 민영완 증손자네. 국사 교과서에 민영완 사진은 많이 나왔잖아, 왜. 근데 아버지는 그럼 누구야 민경수 민경직 민경기 민경땡 중 누구 누구라 해도 대박이네.”
“민 경자 국자 되십니다.”
“아, 스타 국회의원.”
한참을 지후네 집안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선배들이 그제야 물었다.
“넌 이름이 뭐냐.”
“민지훕니다.”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큰아버지들 이름까지 모조리 언급되고 나서야 제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 술은 주는 대로 마셨다.
“생김새랑 다르게 검사 스타일이네.”
늦은 시간 합류한 검찰청에 있는 선배가 말했다.
비틀거리며 지하철을 탔다.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오로지, 가흔만 생각했다. 한티역 물품 보관함에 넣어 두었던 배낭을 꺼냈다. 일렁일렁 파도처럼 움직이는 계단을 오르며 전화를 걸고, 네, 숨죽여 받는 소리를 듣고. “내려와. 지금 당장.”이라며 요구를 했다.
민지후와 정가흔만 알던 비밀의 장소, 둘만의 건물 앞에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여자애가 서 있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발을 동동 구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민지후를 기다리는 여자를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호호 손을 불고 또 움츠리고 팔짝팔짝 뛰고. 삭을 지경으로 낡은 코트 한 장을 입고서 제 몸을 껴안고는 쓱쓱 팔을 문질렀다.
너는 나를 얼마나 기다려 줄까.
뺨에 닿는 바람이 매섭다. 민지후는 정가흔을 시험하고 싶어진다. 캐시미어 목도리를 두르고 거위털 파카를 입고, 알코올로 몸이 뜨거워진 지후도 부르르 등이 떨릴 만큼 춥다. 여자애가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폴짝 뛰고 손을 호호 불고. 그래도 전화는 하지 않는다.
먼저 전화해 봐. 물어봐. 왜 안 오냐고 따져 봐.
고개를 까닥까닥 옆으로 저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떨어지는 눈을 향해 입을 벌리며……, 가흔은 지후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지후가 성큼성큼 걸어 가흔 앞에 섰다.
“어, 선배님 ”
“많이 기다렸어 ”
“조금이요.”
“전화하지 그랬어.”
“눈 구경했어요.”
“안 추워 ”
“내내 안에 있다 나와서 그런지 시원하고 좋아요.”
목도리를 풀어 귀와 코가 발갛게 얼어 있는 여자아이를 둘둘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