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74
74화.
74화
어디선가 흥겨운 캐럴이 흘러나왔다. 산타 인형이 허허허허,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옆에선 루돌프가 고개를 까닥까닥 흔들었다. 세영이 루돌프를 흉내 내며 고개를 까닥까닥 흔들어 보였다.
“넘 귀엽다. 그치 ”
“응.”
찬후가 웃으며 대답했다.
세영이 크리스마스트리가 보고 싶다며 같이 가자고 하였다. 커다란 트리 장식을 한 건물 앞이나 가겠거니 했더니 찬후를 데리고 간 곳은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였다. 세영이 말대로 트리와 크리스마스 장식을 파는 가게가 양쪽으로 한참을 길게 늘어선 통로가 이어졌다. 연말이어서 사람이 많았지만 다니는 데에 큰 불편은 없었다. 찬후가 다리를 절룩이며 걸으면 찬후의 외모에 붙잡혔던 시선들이 묘하게 바뀌었다. 어머, 하는 소리도 들리기 마련이었다. 찬후는 시선들이 여전히 불편하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세영이 찬후 옆에 붙어 서서 끝없이 종알종알 떠들었다. 물건은 단 한 개도 사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가게마다 들어가서 만지작거리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눈으로만 보고 ‘예쁘다, 예쁘다.’ 하며 감탄만 하였다.
찬후의 SNS 화면은 친구들이 올린 미국 거리의 크리스마스트리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찬후가 엄지를 올리거나 짤막하지만 기분 좋은 코멘트를 달았다. 같이 사진을 보던 세영이 말했다.
“너도 크리스마스트리 사진 올려.”
터미널 상가 통로 중간에 서 있는 찬후의 사진을 세영이 찍어 주었다.
찬후가 현재 위치를 표시하고 SNS에 사진을 업로드하자 순식간에 친구들의 코멘트가 쏟아졌다. 하나하나 답을 못 해 남겨 준 멘트만 읽고 있을 때 세영 핸드폰이 울렸다.
“응 신영 쌤 ”
세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쌤 지금 발리 아니에요 약사 쌤이랑. 네, 찬후요 하실 말씀 있어요 지금 같이 있는데. 네, 네.”
세영이 찬후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어, 어……. 네. 아니, 아니요. 지금쯤이면 아마……. 네.”
찬후가 몇 마디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잠깐 갸웃하던 찬후가 메시지를 전송했다.
LA 공항은 연말을 맞아 여행객들로 북적였다. 캐리어를 기다리며 지후는 비행 중에 꺼두었던 핸드폰을 켰다.
[가방 안에 파우치 넣었다. 홍삼팩은 그 안에 있어. 하루 한 번씩 꼭 빠뜨리지 말고 먹고. 출장 잘 다녀와.]어머니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결국 홍삼도 파우치도, 비타민도 챙겨 넣으셨다. 파우치 속에는 온통 가흔의 글씨였다. 동글동글 예쁘고 단정한, 꼭 가흔처럼 사랑스러운 글씨들이었다.
머리 아프거나 목 아플 때, 열날 때, 알레르기 일어났을 때, 속이 아릴 때, 배앓이 할 때, 벌레 물렸을 때, 상처 났을 때, 이건 파스! 밴드, 안약도요.
약마다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쪽지에는 귀여운 하트가 세 개.
아프지 말아요. 건강하게 다녀와요.
너무 아파서 약으로는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예쁜 약사님은 필요 없는 약들만 잔뜩 주고는…….
지후는 목 위로 솟아오르는 감정을 꾹 삼켜 냈다. 조금 쓸쓸하게 웃으며 혜진에게 답을 했다.
[네, 그럴게요. 어머니. 감사합니다.]며칠 전 통화에서 혜진이 연말인데 휴가도 아닌 출장을 가냐고 못마땅한 내색을 하더니, 어제 오피스텔로 찾아왔다. 혜진은 지후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며칠 사이에 너 얼굴이 왜 이래. 아침 못 먹어서 그래 내가 바로 먹을 수 있게 닭가슴살이랑 함박스테이크랑 다 넣어 뒀는데. 지후야, 아침은 거르면 안 돼. 안 그래도 도우미 아주머니가 너 아침 굶는다고 더 일찍 와서 챙겨야 하냐고 묻더라. 그러라고 할까 봐. 아니다, 뭘 좀 더 가져다 놓을까. 시간이 안 되면 출근길에서라도 먹게 식사용 콩떡 좀 맞출까 ”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잔소리를 자르며 지후가 말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요즘만 좀 일이 많아서 이르게 출근합니다.”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 너 점심은 먹어 아니, 네 아버지는 어떻게 아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이렇게 내버려 두시니.”
“어머니, 제가 애도 아니고 아버지가 뭘 해 주시겠어요.”
“그래도 네 아버지는 매일 얼굴 볼 거 아냐.”
혜진이 가져온 것들을 풀어 놓으며 여전히 화를 가라앉히지 않았다.
“지후야, 아버지 완벽한 거 다 맞춰 주지 마. 너 그러면 숨 막혀.”
“아버지 안 그러세요. 이래라저래라 말씀이나 하시는 분인가요.”
테이블 위에 홍삼팩 박스를 탁 놓으며 혜진이 지후를 올려다보았다.
“편들지 마. 내가 인품 훌륭하다, 고상하다 좋아하며 떠받들어 줬는데 네 아버지 본인 완벽하게 관리하면서 사람 눈치 보게 만드는 거 있어. 살다 보니 그거 다 안 맞춰 드리고 대충 모르는 척해도 또 다 넘어가 주시더라.”
지후가 웃으며 홍삼 박스를 열었다.
“저 먹으라고요 ”
“그래, 어쩐지 챙기고 싶더라고. 너 출장이잖아. 연말에 휴가를 보내 주지 출장이라니. 그리고 이거, 아버지 양복하면서 와이셔츠 몇 벌 새로 맞췄어. 이번에 가져가. 저번 사이즈랑 똑같이 했는데 너 살 빠져서 남겠어. 라인 예쁘게 잡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혜진이 와이셔츠 세 장을 들고서 지후를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고마워요, 어머니. 가방 싸던 참이었어요. 주세요.”
“내가 출장 가방 싸 주려고 왔어. 커피나 한잔 부탁해.”
혜진이 와이셔츠 세 장과 홍삼팩을 들고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지후가 커피를 내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더니 속옷과 양말, 와이셔츠와 양복 한 벌을 자로 잰 듯 깔끔하게 모양을 잡아 가방 속에 넣고서 혜진이 지후를 돌아다보았다. 혜진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보고는 지후가 저도 모르게 눈매를 찡그렸다. 가흔이 줬던 파우치와 비타민이었다. 비타민은 열흘 정도 먹었고, 파우치는 다시 열어 보기가 두려워 받은 그대로 두었다.
“그건…….”
“상비약이지 ”
혜진이 지후의 표정을 제대로 못 봤는지 가방 속에 비타민과 파우치를 넣었다.
“괜찮아요. 이건 안 가져갑니다.”
지후가 도로 꺼내어 선반에 올렸다. 그러는 지후를 혜진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지후가 내려 온 커피를 들고서 향을 맡았다.
“내가 좋아하는 맛이네. 오렌지 캬라멜.”
“네.”
“잘생긴 우리 아들, 세심하기도 하지.”
지후가 조금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혜진에게 메시지를 전송하고 나니 지후의 캐리어가 벨트 위를 돌아 나왔다. 지후는 벨트 위에서 가방을 끌어내리면서도 계속 가흔의 글씨를, ‘아프지 말아요.’ 속삭이는 음성을 떠올렸다. 캐리어 속에 들어 있을 파우치를 열어 본다면 겨우 다잡은 마음이 엉망으로 허물어지겠지만, 결국 또 열어 보고 말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핸드폰 진동이 위이잉 울렸다. 낯선 번호이다. 잠시 망설이던 지후가 수신 버튼을 눌렀다.
“네, 민지훕니다.”
핸드폰 너머 여자는 안도의 숨을 쉬며 다짜고짜 말했다.
아, 아. 받으시네요. 계속 휴대폰 꺼져 있던데.
“비행기 탑승 중이었어요. 그런데 어디시죠 ”
네 비행기 그럼 어디 다녀오시는 길, 아니면 혹시 외국으로 나가셨어요
지후가 답을 하지 않자, 아차차 여자가 큰 소리로 말하고는 설명했다.
저 기억하신다고 했죠, 소신영이에요. 가흔이 친구.
“아, 신영 씨. 나 출장 왔어요.”
그럼 지금 미국 아……. 어떡해. 왜 다들 외국이야. 제가 지금 외국 가이드 나와 있는데 아우……, 그래서 잠깐 통화하는 건데요. 찬후는 왜 형 출장 간다는 말은 빼고서 번호를 가르쳐 줬지. 그럼 가흔이 어떡해, 어떡하지…….
지후는 핸드폰을 고쳐 쥐며 물었다.
“혹시 무슨 가흔이한테 무슨 일 있어 ”
가흔이 지금 저랑 같이 발리 있다가 비행기 타고 급하게 들어갔어요. 요양원에서 연락 와서요. 그게 사연이 긴데요, 가흔이 돌봐주시던 약사할머니가 계신데…….
“알아. 조정림 약사님.”
아시네요. 네, 그분이……, 갑자기요. 가흔이 제정신 아니에요. 제대로 비행기는 탔나 모르겠어요. 가흔이 걔 비행기도 처음인데……. 하필이면 성민이도 시댁 가족들이랑 다 해외여행 갔어요. 가흔이 부탁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망설이다가 연락했어요. 가흔이 혼자 두면 안 될 거 같아서 너무 걱정되어서요. 아, 좀 그렇긴 해도 그래도 아직 약혼한 것도 아니니까 문상 정도는 가 주실 수 있을 거 같아서…….
“신영 씨, 무슨 소리야. 누가 약혼을 해. 가흔이가 승준이랑 그리고 대체 권승준은 뭐 하고 가흔이 혼자야 ”
아우, 선배야말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승준이가 왜, 기막혀. 뜬금없이 걔 이야기는 뭐죠 가흔이는 승준이 다시 안 봐요. 지후 선배가 다른 여자 있다면서요. 집에서 정한 여자……. 아, 됐어요. 말하니 또 열 받네요. 어차피 출장이니까. 됐네요. 끊을게요.
“신영 씨!”
지후는 끊어진 핸드폰을 들고서 아연해졌다.
무슨.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아직 삭제하지 못한 가흔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가흔은 받지 않았다. 근처에 있던 변호사가 “민 변 민 변 무슨 일 있어 ” 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큰 소리였는데도 지후는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툭 팔을 두드리자 겨우 눈을 맞추고서 말했다.
“이 변호사님.”
“무슨 일이야 ”
“저 죄송하지만 지금 한국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뭐 ”
“제가 김무영 팀장님한테는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야 해요.”
“왜, 무슨 집에 무슨 일 있어 혹시 대표님 무슨 일이라도 ”
“아니, 아니에요. 제 친구……. 제가 지금 꼭 가 봐야 해요.”
이 변호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민 변 우리 지금 도착했어. 친구 일이라면 그건 좀 아니지. 내일 라만 실무진이랑 미팅 있어. 김무영 파트너도 내일 오전이면 오시는데.”
“죄송합니다. 다른 분께는 말씀 전해 주세요.”
지후가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이 들어차 복잡한 공항을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숨을 몰아쉬며 공항 내 항공사 카운터로 갔다.
“지금 인천으로 출발하는 비행기요. 빨리요.”
“아, 고객님, 성수기라서 지금은 당일 표는 다 마감되었어요.”
항공사 직원이 당연하다는 듯 말을 했다.
“동경을 경유해서 가는 표라도. 뭐라도 찾아 주세요.”
직원이 다시 모니터를 보면서 자판을 두드렸다.
“죄송합니다. 여기에서 확인되는 표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제일 빠른 비행기는 내일 오전 11시 1등석 동경에서 내리시고 거기서 다시 갈아타고 세 시간 이후 출발하는 김포공항행 비행기편 가능합니다. 예약해 드릴까요.”
“늦어요. 더 찾아봐 주세요.”
직원이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몇 번 엔터키를 누르더니 고개를 저었다. 지후는 주먹을 쥐고 카운터를 꾹꾹 문지르듯이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