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73
73화.
73화
“회사야.”
“뭐, 아무도 없고, 내 친구는 첫사랑에 실연했고, 일은 1.5사람 할 일을 이미 다 해 뒀고. 충분하네, 마셔!”
승우가 박스에 같이 들어 있던 오프너로 코르크 마개를 빼냈다. 코르크 마개를 들고서 두리번거리다가 지후의 데스크 뒤편 소형 냉장고 위에 둔 머그잔 두 개를 들고 왔다.
“그래, 조금만 마시자.”
지후가 한쪽에 두었던 보조 의자를 끌어와 승우에게 권하였다. 승우는 머그잔에 자줏빛 와인을 가득 따랐다. 지후는 콸콸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리는 와인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강승우, 어휴.
둔탁한 머그잔을 부딪치며 승우가 “건배!” 하고 외쳤다. 승우는 갈증이 난 사람처럼 크게 한 모금 마시고 지후는 조금씩 와인을 입술로 흘려 넣었다. 짙은 커런트향이 입속을 가득 채웠다. 가흔에게 하트 모양이 라벨에 그려진 세귀르 와인을 사 주었던 밤이 생각난다.
‘어때, 초콜릿향이 나 ’
지후가 묻고, 가흔은 조금 당황스러워하며 숨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얼굴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며 말했다.
‘그런 것 같아요.’
곧이어 가흔이 붉은 입술을 길게 벌리며 웃었다.
‘저, 조금 취한 듯해요.’
지후는 가흔의 웃음에 취할 것 같았다.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고, 벌어진 틈으로 들어가 맛을 보고 향을 맡고 싶어 부끄러워졌다.
지후는 손을 들어 제 입술을 한 번 두드리고는 내렸다. 가흔이 닿았던 입술이다. 생생하게 기억하는 감촉 때문에 등이 시리다. 와인을 다시 흘려 넣었다. 신문 기사에서 보았던 승준의 미소가 어른거린다.
천재 의사. 불굴의 의지.
가흔이 그랬지.
‘모범생 테리우스죠.’
살아 있던 눈빛은 성인이 되어 가며 더 깊어졌던걸……. 잘, 어울릴…….
지후는 와인을 크게 한 모금 삼켰다. 같이 있는 그림은 차마 상상으로도 인정할 수가 없다. 인정해야 하는데 어리석다.
승우가 머그잔에 반 정도 와인을 마시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사무실을 뒤졌다.
“안주가 전혀 없나.”
소형 냉장고를 열고는 언제 넣었는지도 모르는 플레인 크래커 한 통을 찾아냈다. 크래커를 지후에게 넘기고 냉장고 깊은 안쪽에서 무언가를 더 꺼내었다.
“어, 이건 뭐야 ”
승우가 지후에게 유리병을 들어 보였다.
“이리 줘.”
지후는 병을 승우에게서 받아 제 앞으로 바싹 당겨 두었다.
“잼이야 크래커랑 먹으면 안주 딱이네.”
커피 스푼 두 개를 들고는 승우가 병에 손을 뻗었다.
“싫어.”
“뭐야, 치사하게.”
지후는 잼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몸 어딘가에 지문처럼 남아 있던 기억들이 아우성치며 깨어났다. 아무리 멈추려 해도 동심원은 점점 커지며 파문처럼 순식간에 몸 전체로 퍼져 나가 기어이 장악해 버리고야 만다.
따뜻하고 달콤한 냄새, 고소하고 부드러운 식빵.
더 달콤한 입술, 더 부드러운 가슴.
날씨는 맑았고 햇살이 좋았다. 지후는 가흔을 높이 들어 안고 잼 냄새가 가득 차 있고 햇빛이 들이치는 옥탑방을 빙빙 돌고 있다. 와아아아, 귀에는 가흔의 웃음 섞인 탄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난 지구력이 좋거든. 운동장 한 바퀴도 뛸 수 있어.’
‘너를 안고서…….’
지후는 힘을 주어 잼 뚜껑을 비틀었다. 툭,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나며 뚜껑이 열렸다. 향긋한 사과잼 향이 툭 터지듯 퍼졌다. 병을 들어 올려 코를 대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승우가 건네는 스푼을 들고 잼을 크게 퍼 올렸다. 둥글게 퍼 올려진 노란 사과잼을 보며 지후는 속입술을 깨물었다.
갓 구워 낸 식빵, 뜨거운 잼, 작고 청결하고 사랑스럽게 꾸며져 가흔을 닮았던 방, 뽀송뽀송한 침구.
널 생각하면 늘 토스트와 잼 냄새가 났어.
피곤에 지쳐 눈을 감고 있으면 살며시 옆에 놓아 주었던 아메리카노, 계피맛 쿠키. 눈이 마주치면 생긋 웃어 주고 다시 책을 보던 아이가 손에 잡힐 것만 같다. 가흔과 같이 있어 독서실이 편안했고, 도시락은 맛있었고, 분식집이 행복했다. 문제를 풀어 주고 문맥을 짚어 주고 ‘아아, 그렇군요.’ 눈을 반짝이며 답하는 가흔을 보면 세상에서 제일 쓸모 있는 인간이 되는 기분이었다.
외로웠고, 공허했고, 압박으로 숨 막히던 사춘기의 끝. 고등학교 마지막 시절은 민지후에게 가장 찬란한 날들이었다. 가흔은 민지후의 가장 찬란한 조각이 되어 몸속 깊은 곳에 박혀 있었다. 찬란함은 지후와 같이 자라나 제법 괜찮은 성인이 되었다고 믿는 순간 깊고 어두운 저편에 숨죽이며 엎드렸다. 그 사실을 몰랐었다. 이제야, 왜 그토록 가흔을 잊을 수 없었는지 너무 늦게 깨닫는다.
지후는 스푼에 가득한 잼을 한꺼번에 입속으로 넣었다. 크래커를 내밀던 승우가 눈을 크게 떴다. 달고 진한 잼을 삼키며 지후는 눈물을 흘렸다. 어느 지점까지 되돌려야 몸속에서 울고 있는 찬란한 그 아이를 다시 찾을 수 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
이국의 밤은 길었다. 아무리 낮에 몸을 많이 움직여도 마찬가지였다. 신영이 잠을 깰까 조심스러워 가흔은 최대한 뒤척이지 않았다. 시선은 무의미하게 낯선 호텔 방 안을 훑어가고, 다시 돌아와 한곳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희끄무레한 스탠드 갓, 초록빛 작은 불이 들어오는 전화기, 디지털시계의 숫자, 위잉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가 꺼지는 시스템 에어컨. 그런 것들을 응시하다가 주륵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신영의 우려와 다르게 여행은 나쁘지 않았다. 우기라서 걱정했지만 다행히 비는 한 차례만 내렸고 습도는 견딜 만했다. 동남아 특유의 향채소가 들어간 볶음밥이나 누들, 꼬치구이를 어른들은 코를 막고 싫어하셨지만 가흔은 모두 다 맛있었다.
“어르신, 그래도 여기 발리까지 왔는데 무려 일곱 시간 반을 비행하고 왔는데 거기 음식 한번 먹어 봤다, 하셔야죠. 한 번 드시면 또 헤어날 수 없는 매력! 네, 조식만 그렇습니다. 중식 석식은 모두 김치, 밥, 된장찌개, 불고기 한식으로 다 준비해 두었고요.”
신영이 아이를 달래듯 할머니들을 달래가며 현지 음식을 권하였다.
여행사 일정대로 움직이며 가흔은 여행객이 아닌 가이드가 되어 버렸다. 신영을 도와 할머니들을 챙기고, 화장실을 따라다니고, 옮기는 장소마다 인원수를 체크하고, 말동무가 되어드렸다. 할머니들을 보면 엄마가 생각나기도 하고, 정림이 생각나기도 했다.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잊으려는 사람에게는 낯선 나라의 낯선 길 위를 지나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민속 공예품을 파는 가게에서 가흔은 자그마한 목공예품들을 한참 구경하고 작은 토끼를 골랐다. 방 안 찬넬 선반 위에 올려 두면 오랫동안 여행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리 현지인들이 믿는 힌두교 사원에서 부모님과 정림을 위해 기도를 하고, 바닷가 높은 절벽에 지어진 울루와뚜 사원에서는 바다의 신에게 기도를 했다. 신영이 자리를 잡느라 애를 쓴 덕분에 할머니들과 가흔은 멋진 일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바다 위로 타들어 가는 태양을 보면서 아무도 모르게 조금만 울었다.
여행 3일째, 발리 바다를 배 위에서 즐길 수 있다는 크루즈를 타는 일정이 잡힌 날이었다. 여행에서 가장 핵심적인 코스였다.
“배 위에서 전통 민속 무용 공연도 보시고, 해산물 구이도 드시고, 선상 위에 서서 짭쪼름한 바다 내음을 맡으며 인도양의 푸른빛을 볼 수 있습니다.”
신영의 말에 할머니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크루즈 탑승 시간을 기다리며 할머니를 모시고 선착장 내 화장실로 가던 길이었다. 가흔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행을 와서 내내 꺼 두었다가 오늘 아침 신영의 부탁으로 선착장으로 출발하는 시간에 알람을 맞추어 놓고 그대로 잊고 켜 두었다.
한국 고유 번호가 붙어 저장된 연락처가 뜨지는 않았지만 익숙한 뒷 번호였다.
어디더라.
가흔이 고개를 기울이며 번호를 다시 보았다. 국가번호 뒤의 지역번호를 확인하고는 요양원임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지.
요양원에서는 종종 정기적으로 보호자에게 상태를 알려 주는 전화 외에 특별하게 추가적으로 요구되는 검진이나 행사 참여비가 필요하면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가흔이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조정림 환자 보호자 되시지요. 여기 마음 요양원인데요.
“네.”
이상해, 뭔가.
가흔은 답을 하며 목을 꽉 죄여드는 공포감에 눈을 깜박였다. 차분함을 가장하는 느린 박자의 말투는 곤혹스러움을 감추고 있었다. 직업적 냉정함과 인간적 연민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어설픈 중립은 끔찍하게 익숙했다. 아빠의 사고 소식을 전하던 경찰관이,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의사 선생님이 그랬으니까.
가흔은 말을 채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시죠 지금은 아직은 괜찮으시죠 제가 지금 잠시 나와 있는데, 외국인데, 저 처음 외국 나왔는데……. 여기가 어디더라. 음. 음…….”
가흔은 엉망으로 말을 내뱉었다.
“제가 지금 가려면 비행기가 일곱 시간 여덟 시간 정도. 그리고 아…….”
가흔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귀를 막고 싶었다. 듣고 싶지 않아. 또 듣고 싶지 않아. 이렇게 듣고 싶지 않아.
조정림 환자분, 편안하게 주무시듯이 떠나셨습니다.
“말도 안 돼. 아니죠 지난번 통화에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갔을 때 특별히…… 이상은…….”
지난번 하룻밤을 요양원에서 보냈을 때, 정림은 자리에서 거의 일어나지 못하였다. 감염 증상 때문에 얼굴이 푸석푸석 붓고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요로감염이 있어 항생제를 처방한다고 했는데 잘 듣지 않아 다시 약을 바꿀 예정이라고 하였다. 감염 때문인지 열이 오르고 감기 기운도 겹쳐 간간히 기침을 했지만 그래도 가흔에게 웃어 주고, ‘아가씨.’ 하고 불러 주고, 가흔이 하는 이야기를 오래오래 들어주었다. 지후 이야기를 하며 침대에 엎드리는 가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열이 잡힌다고 했잖아요. 항생제가 듣는다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상태를 확인했는데 그때는 열도 어느 정도 잡히고 컨디션을 회복하는 중이라 하였다.
워낙 신체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었어요. 병원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급속히 진행된 패혈증 때문에…….
가흔은 핸드폰을 움켜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호자님, ……보호자님
“아이고, 가흔 씨, 무슨 일이야 응 ”
옆에 있던 여행객 할머니가 하얗게 질린 가흔을 흔들어 보다가 급히 신영을 부르며 달려갔다. 가흔은 내내 핸드폰만 쥐고서 나무처럼 굳은 채로 서 있었다.
“가흔아, 무슨 일이야. 요양원 이리 줘. 폰 이리 줘.”
신영이 뺏다시피 핸드폰을 건네받고 상황을 수습하였다.
“……가흔아.”
“신영아, 나 어떡해. 어어, 어어…….”
울음이 터져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약사할머니 어떡해. 나 지금 가면 얼마나 걸려 나 인사도 못 했는데……, 약사할머니 혼자 영안실에……. 어어어엉. 신영아, 나 어떡해.”
“일단 내가 표 구할게. 바로 표 구하고……. 있어 봐. 여기 현지에서 가이드하는 분 연락해서 너 데리고 바로 공항 가 달라고 할게. 괜찮아. 금방 가.”
가흔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