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280
282. 임무 유형,정복 (8)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창백해진 황자의 얼굴은 마치 시체를
보는 것만 같았다.
검은 핏줄기가 그의 입술 아래로 흘
러 내렸다.
“모든 힘에는,그 대가가 있는 법이다.” 황자가 입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말뜻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엘 시드 때와 비슷했으니까.
그 녀석도 자신의 분수를 뛰어넘은 힘을 과도하게 사용했고, 결국 자멸했다.
“얼마나 남았지?”
황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예상보다 훨씬 짧다는 것인가.
“당연한 일이야,
황자가 오른손을 옆으로 뻗었다.
놈의 손끝이 흐릿하게 일렁이다 돌 아왔다.
“수십 겹의 차원 장벽을 뚫었지. 내 몸으로는 그 반동을 견딜 수 없었어. 하지만,후회는 하지 않는다. 너희에게
진실을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프리아는 여기 있겠다고 안 했어.” 황자가 미소지었다.
“원래 동생이란,오빠의 말을 듣지 않는 법이 아니더냐.”
이해할 수가 없다.
눈앞의 이 청년은 수백 년의 사투를
겪어왔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무수한 전장에서 죽고,죽여왔을 것이다.
고작 한 뼘의 땅을 얻기 위해. 그런데 여동생이 ’싫다’고 말한 것만
으로 목적을 포기한다고?
나였다면 억지로 붙잡아놓든,가두든,
어떻게 해서라도 하고자 하는 바를 이뤄냈을 것이다.
“바보 같은데,넌.”
황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점이다.”
“차이점이라니?”
“그 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알았고, 자신의 손으로 그 운명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 길을 축복해 줘야 겠지. 그것이 가족이라는 것이다.”
운명이라.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만약 프라이오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프리아는 무의미한 싸움에 내던져져,
무의미하게 죽을 것이다. 경계에서 꿈 틀거리던 무한의 파편들. 우리가 싸웠던 것은 수천조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최후는 결국……
나는 도라도의 붉은 벌판을 떠올렸다. 엘 시드는 황금향의 모든 세력을 하
나로 결집시켰으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다.
타오니어도…… 같은 끝을 맺는다는 거로군.
임무도,여신의 축복도,영웅도, NPC도 모두 의미 없었다.
도라도도,타오니어도,그 밖에 뫼 비우스에 존재하는 그 어떤 차원이라도,
세계 재생의 시나리오는 절대 완성시 키지 못한다. 그 가능성은 처음부터 막혀 있었으니까.
텔은 그저 1년이라도 더,1개월이라도 더,1분 1초라도 더.
우주의 끝을 연장시키고 있을 뿐이 었다.
‘이게 치명적인 오류.’
오류 정도가 아니다.
‘도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해결책이 없다면 오류라고 부르지
않는다.
1서버에 간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 질까.
놈들의 의도대로 내가 7성의 힘을 완전히 각성한 뒤 이카르의 자리에 들어간다고 해도, 시간이 약간 지연될 뿐, 결말은 변하지 않는다.
‘숨이…… 막히는군.’
철컥.
나는 칼집을 세게 쥐었다.
“어쨌든.”
상념을 지워 없앴다.
지금은 일단,눈앞에 닥친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프라이오스는 수십만 시청자가 보던 도중,필드의 상황을 이용해 1서버의 벽을 뚫었으며,시나리오의 핵심 인물인
나와 프리아에게 중대한 기밀을 누설 했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절대 용서되지 않을 일이었다.
“돌아갈 건가.”
“여기 있어봤자 무엇하겠나.” “돌아가면 넌 죽어.”
“여기 있어도 죽는 건 같아.”
나는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얼마나 싸웠는지 모른다.
하지만,이렇게 끝내는 건 멍청한 짓 이라고 생각해.”
“끝이 아니야.”
쿨럭.
황자가 한 번 더 기침했다.
걸쭉한 타르와 같은 피가 튀어나왔다. 녀석이 팔로 입을 흠치자,오른쪽
소매 전체가 까맣게 물들었다. “여기서 끝낼 수 없다면,여기서 시
작하면 돼.”
“..?”
“한 이스라트.”
황자가 흐릿한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황금의 권좌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뭔 소리냐?”
“너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 황자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돌렸다. 놈의 시선을 따라가자,밀밭 끝에서
걸어 나오는 프리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출구는 어디입니까.”
프리아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자가 입을 열었다.
“찾을 필요 없다. 곧 돌려 보내줄 것
이니.”
“그 전에 마지막으로 묻겠다,프라 이시스. 정녕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냐? 그곳에는 어떤 희망도 미래도 없다. 너는 끝없는 전투 속에 파묻혀,폐허 속에서 죽을 것이다.”
프리아는 황자의 목소리를 곱씹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얼마 뒤 눈을 떴다.
“저는 맹세했습니다.”
“맹세라.”
“그 아이가 돌아오기 전까지 타오니 어를 지켜내겠다고. 여기서 지체하고 있을 시간은 없습니다. 저를 타오니어로 보내주십시오,오라버니.”
“네가 그렇다면 길을 열어주마.”
스릉.
황자가 검을 치켜들었다.
“돌아가면 더 이상은 되돌릴 수 없다.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각오는?”
“됐습니다.”
“정말 고집불통이로군.”
황자는 애정 어린 눈으로 프리아를
내려 보았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런 너를 사랑했었다,프리아.” 황자가 검을 내리그었다.
검날에서 뿜어진 찬란한 광채가 밀
밭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 빛 속에서,울먹이는 목소리가
울려왔다.
“오라버니,저는……!”
“말하지 않아도 돼.”
“이곳에…… 남을”…….”
“네가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예전의 내가 그랬으니까.”
“…….”
“네 길을 나아가거라.”
빛이 사방을 휘감았다.
[마스터 암케나,픽 미 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경쾌한 효과음과 함께 접속 화면이 떠올랐다.
[로딩이 끝났습니다.] [TOUCH !(선택)]순식간에 로딩을 마친 암케나가 메인 화면에 들어왔다.
임무에 재진입한 암케나의 조작창에 홀로그램 메시지가 표시됐다.
[복구 완료!] [서버에 재접속합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멈춰 있던 시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던 파편들도,
영웅과 무기를 맞부딪히고 있던 몬스
터들도, 불타는 도시와 무너지는 건물의 풍경도 색을 되찾았다.
“오빠,방금 무슨 일이……?”
“앞을 봐라. 안 끝났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제나가
머리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황자가 검을 늘어뜨 린 채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그와 동시에.
[여신의 징벌이 ‘프라이오스 알 라 그나’를 강타합니다!]콰직!
별안간,허공에서 솟아난 다섯 개의 칼날이 황자를 꿰뚫었다.
“저건 뭐요?”
우득.
빛나는 칼날이 위로 떠 올랐다. 황자의 몸이 피를 뿌리며 공중에 고
정 됐다.
‘……….’
프라이오스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저 검은 뭐죠? 왜 갑자기 나타나
회사에서 단단히 열이 뻗친 것 같다. 오브젝트를 만들어준 것도 아니고,
버프를 부여해준 것도 아니다.
직접적인 공격 및 구속.
임무고 뭐고 다 필요 없이,저 녀석을 죽여 버리겠다는 뜻이다.
‘황자의 말이 정답이었군.’
유저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짓까지 하는 걸 보면,회사의 치부를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방송창에 엄청난 속도로 채팅이 갱 신됐다. 뭐,내용은 볼 필요도 없지. 서버 오류와 막 나가는 임무 전개를 비난하는 글이 대부분일 것이다.
〈한.〉
머릿속에서 로데리크의 목소리가 울렸다.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 것 같 네.〉
나는 옆을 보았다.
저 멀리,불타는 대로 속에서 몬스
터들이 영웅들의 진지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오염된 고블린 Lv.53] X 7322어느새 이렇게 늘어나 버렸군.
황도 전체에 몬스터가 들어차 있다. 몬스터들 사이에 간간이 영웅의 모
습을 한 놈들이 섞여 있었다.
오염 특성. 좀비화가 된 것이다.
‘균형이 깨졌다.’
시야 오른쪽,영웅들의 부상 및 사망 메시지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나는 귀에 손을 가져갔다.
“프리아는 있습니까.”
〈그렇네.〉
“공간 이동 마법으로 이쪽에 보내주 십시오.”
〈그녀는…….〉
로데리크가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 옆의 공간이 휘어지더니 프리아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허공에 매달린 황자를 올려보았다.
“……오라버니].”
“길을 찾는 것이냐.”
뚝
황자의 발끝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 상황은 뭐요. 싸우던 도중 갑자기
이럴 수 있나.”
“신경쓰지 마. 우리 할일만 하면 돼.” 나는 비프로스트를 한 바퀴 돌렸다. 파지직. 검붉은 번개가 검날을 타고
회전했다.
“나를 죽이고 심장을 취하거라. 그 속에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
“…….”
“이제 와서 못하겠다는 게냐?”
“그건……
“똑바로 겨누거라. 쉽지 않을 터이니.” 그오오오오오오!
나는 위를 올려봤다.
거대한 구멍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
오려 하고 있다.
[※경고!] [‘절망의 결정’이 강림하기 시작합니다!]두 번째 결정이 나타났다.
그러나,상황은 첫 번째보다 몇 배는
좋지 않았다.
[절망의 파편 Lv.108] X 1053반짝이는 수백 개의 크리스탈 결정 체가 구멍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프리아를 데리고 날아오 르는 순간,기다렸다는 듯 공격해오겠지.
<……한.〉
할기온이 말을 걸어왔다.
〈무얼 보고 온 것이냐.〉
"모든 것."
나는 짧게 답한 후,황자와 프리아 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어. 이 세계는 곧 무너진다." "오라버니를……
"누구 마음대로 오라버니인가. 나는 프라이오스 알 라그나. 유서 깊은 제 국의 황위 계승권자다."
프리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녀는,나를 돌아보더니 머 리를 끄덕였다.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제나,벨키스트."
비프로스트를 뒤로 한껏 당겼다.
파지지직! 한계까지 충전된 번개가 사방에서 날뛰었다.
이윽고 번개는 검은 광채로 바뀌더니, 검끝에 은은하게 감돌았다.
"한 번에 죽여야 돼. 준비해라."
"아니,방금 전까지만 해도…… "준비하라고 했지."
"아,알았어요."
제나가 활을 내밀었다.
철컥. 활의 양 날개가 펴졌다. 은백색의 강철 화살이 시위에 감겼다. "죽일 수 있는 것이오?"
벨키스트가 검을 황자에게 겨누었다. 카르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그
칼날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압축,천만 배.
검에 깃든 광채가 한결 짙어졌다. 「프리아.」
"……예."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지.」
"그랬… 습니다."
「그렇다면,저항하거라.」
"……."
「저항하고,저항하거라. 쓰러진다면 일어서고, 부러진다면 다시 붙이거라. 무엇이 앞을 가로막든,부수고 나아가며 길을 개척하거라. 그것이 우리 황금의 혈통이다.」
과직!
황자의 몸에 칼날이 한층 더 깊게 파고들었다.
「증명하라. 내가 틀렸다는 것을.」
쾅!
하늘 위에서 폭음이 터졌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나는 검을 바로잡았다.
"죄송…… 합니다."
「그 말은…….」
황자가 피식 웃었다.
「틀렸어,프리아 충전 완료.
나는 검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을 따라,심연과도 같은
칠흑빛 광채가 흩뿌려졌다.
"발사."
쿵!
제나의 활에서 눈부신 섬광 한 줄기가 쏘아졌다.
니하쿠의 브류나크를 토대로 만든 특수 저격기.
마지막으로 벨키스트의 검에서 백색 파동이 튀어나갔다.
세 개의 빛이 맞물려 합쳐지더니 황 자가 있던 곳을 휩쓸었다.
"……."
거대한 충격파도,귀를 찢을 듯한 굉음도 없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폭심지에서,눈이 멀어버릴 듯한 황
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프리아."
나는 멍하니 있던 그녀에게 속삭였다. 프리아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더니
그 광채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 눈부신 광채 속,검을 치켜드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저항한다.」
후우우웅!
흩어져 있던 빛의 파도가 하나로 집 결하기 시작했다.
[임무가 변경되었습니다!] [임무 유형 – 정복]
[목표 – 운명을 초월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