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26
25. 이어지는
* * *
이동이 끝나자 우리를 반긴 것은 16층과 같은 저택의 입구였다.
뒤로는 밑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앞으로는 다섯 갈래의 길이 나뉘어서 뻗어 있었다. 벨키스트가 이죽거렸다.
“16층보다 한술 더 뜨는구려.”
나는 네리사에게 파티에 합류할 것을 지시했다.
미궁의 구조가 복잡해진 이상, 함정에 걸려 파티에서 이탈할 확률이 있다.
“흩어지지 말고 움직인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보고해.”
네 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에는 긴장이 떠올라 있다. 전투의 두려움보다는 길을 헤매는 것에 대한 공포가 더 앞서는 듯했다. 나는 잔뜩 굳은 제나의 뺨을 꼬집었다.
“너무 쫄지 마라. 몇 가지 원칙만 지킨다면 별거 없어.”
“저, 정말이죠? 이런 곳에 갇혀서 굶어 죽는 거 아니죠?”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는데.”
미궁이라고 해도 고작 17층일 뿐이다.
도구를 챙긴 것도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했을 뿐, 사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 계정의 난이도가 평범하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될 것이다.
나는 검과 방패 대신 종이와 펜을 쥐고서 미궁을 앞서나갔다. 미궁의 지도를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이 구간 전체에 걸쳐 같은 패턴이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 도중 화살이 날아오는 함정이나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과 조우하기는 했지만, 결국 17층도 무사히 클리어했다.
이후의 미궁 공략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층을 오를수록 구조가 조금씩 복잡해졌고, 등장하는 적의 숫자나 함정 발동 빈도가 높아지기는 했으나 특별한 위기는 없었다. 기껏해야 18층에서 하루 숙박한 정도. 18층을 클리어할 때쯤 되자 일행의 얼굴에서도 불안감이 사라졌다.
미궁에서 복귀한 다음 날에는 암케나가 하루 휴식을 줬는데, 물론 얌전히 쉰 적은 없었다.
딱히 나는 별 요구를 하지 않았지만 1파티의 인원들은 자체적으로 훈련 강도에 격렬함을 더해갔다. 파티에 새로 합류한 벨키스트와 네리사도 마찬가지였다.
’20층이 가까워진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던 것이다.
2파티도 비어 있던 한 자리를 메꿔 가동을 시작했다.
사냥꾼 출신의 2성으로서, 그는 2파티의 원거리 공격수 역할을 맡을 것이다. 2층에 올라오기 전에는 1층에서 사냥을 전담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19층을 클리어한 우리가 1층 광장으로 돌아왔을 때.
암케나는 새로운 시설을 만들었다.
[시설을 구축합니다. 원하시는 시설 종류를 터치해주세요.] [‘보관소 Lv.1’를 선택하셨습니다. 해당 건물을 증축하시겠습니까?] [Yes(선택) / No]쿠르르르.
선택 확정과 함께 미약한 진동이 1층을 뒤흔들었다.
우리는 진동에 신경 쓰지 않고서 묵묵히 뒷정리를 시작했다. 사용했던 도구를 정리해서 창고에 되돌려 넣는 일이었다. 위로 보이는 2층 광장의 벽면에 빛이 새겨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쉬웠네요. 왜 그리 겁을 줘요. 굶어 죽을 수도 있다면서!”
창고에 빈 가방을 내려놓으며 제나가 말했다.
나는 가방에 손을 얹었다. 네리사가 내 어깨에서 가방을 손수 벗겨주었다.
“실제로 위험한 구간이 몇 번 있었습니다. 같은 길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 식으로. 누구의 덕으로 쉽게 뚫었는지는…….”
네리사는 나를 의심과 감탄이 반쯤 섞인 눈으로 쳐다봤다.
내 정체가 궁금한 것 같았다.
“그런데 마스터는 무슨 시설을 만드는 거죠? 아까부터 시끄럽군요.”
정리가 거의 끝나갈 때쯤 이올카가 입을 열었다.
“보관소다. 여러 가지를 맡기는 곳이지.”
“보관소? 창고와 겹치는 것 같은데요.”
“조금 의미가 달라.”
나는 창고를 나왔다.
진동이 멈추더니 곧 건축 완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관소가 완공되었습니다! 여신의 품으로 떠난 영웅들을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Tips/추억의 앨범에서 사망한 영웅의 일러스트와 데이터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단, 이는 보관소에 영웅의 유품이 안치되어야 가능합니다.]2층 광장의 벽면에 대리석 문이 생겨 있었다.
보관소의 입구였다. 나는 따라 나오는 이올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의 무덤이지.”
“무덤이요?”
이올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됐다.
“마스터도 20층 대비를 하는 것 같은데.”
“무덤을 짓는 게 대비라는 건가요? 그게 뭐예요, 소름 끼치게! 이름은 왜 또 보관소야!”
이올카가 몸서리를 쳤다.
뒤늦게 나온 세 명도 나와 이올카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납골당과 비슷하다. 물론 시체는 회수할 수 없어. 생전에 사용하던 유품을 넣는 거지.”
“웃기는 시설이군. 추모라도 해주겠다는 것인가? 저런 시설을 지을 바에야 훈련소나 개축하는 게 낫겠소.”
벨키스트가 비웃더니 먼저 계단으로 올라갔다.
보관소.
다른 마스터는 크게 애용하지 않는 시설이다.
건축에 젬과 재료가 들지만, 막상 실제적인 기능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죽은 영웅의 일러스트와 사망 당시의 영상을 돌아보는 것뿐이다.
그러나 나의 분석에 따르면 보관소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암케나는 ‘로키의 공략’을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영웅의 사후처리.’
픽 미 업의 등반 과정에서 무수한 영웅들이 죽어 나간다.
임무에서의 죽음은 애정을 갖고 키운 영웅이나 반쯤 내던지는 영웅이나 공평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 지금의 메인 파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웅들을 잃어왔다. 보관소 건축과 유지는 영웅의 사망 뒤, 동료의 스트레스 수치를 크게 줄일 수 있는 수단이었다.
“저는 나름 괜찮다고 봐요. 마스터가 우리를 생각해준다는 거잖아요. 저런 것도 해주고. 그냥 죽으면 땡인 줄 알았는데.”
“불길하다고요! 20층에서 누군가 죽는 것마냥!”
“에이, 우리한텐 오빠가 있는데. 15층처럼 문제없을걸요! 안 그래요, 오빠?”
제나가 나를 둘러보고 웃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15층에서 무슨 문제가 없었어요? 다 죽을 뻔했는데!”
“결과적으로 만사 오케이란 거죠. 이번에도 그럴 거구요. 신경 쓰지 말자구요. 우리 중에서 저기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제나는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이올카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1층 광장에 남은 것은 나와 네리사였다.
네리사가 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강한 아가씨군요.”
“저런 마인드가 아니라면 못 버텼겠지. 그래서 나도 데리고 다니는 거고.”
“어쨌든 다음은 20층입니다. 어려운 임무가 나오겠네요. 어떨지는 예상이 갑니다만.”
네리사의 안색은 긴장으로 굳어 있다.
나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무서우냐?”
“설마요. 그렇다면 얌전히 보조직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
네리사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게 묵례하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아무도 없는 1층의 광장에서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튿날, 아침.
훈련소에 1파티의 멤버가 모였다.
나는 위를 올려다봤다.
하늘이 무지갯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드물게도 아침에 마스터가 접속한 것이다.
암케나는 최초로 2파티를 던전에 출격시켰다. 층수는 16층 이상. 메인 파티의 등반이 끝난 만큼 서브 파티도 육성을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20층이 바로 앞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나는 1파티의 면면을 둘러보며 말했다.
네 명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긴말 하지 않아. 훈련 강도를 늘려라. 그간 진형과 협동 훈련에 집중했으니, 이제는 개인 능력을 늘리는 일에 주력한다.”
현재 내 레벨은 18.
20층 구간의 한계 레벨까지는 2가 남았다.
하지만 4층을 오르면서 두 번의 레벨 상승을 거칠 동안 스킬은 올리지 못했다. 새로운 멤버를 파티에 적응시키고 새 진형을 짜는 일에 열중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꽤 남아 있다. 2파티가 덜 컸거든. 우리도 그렇고.”
18층에서 경험치를 쌓을 만한 루트를 발견했다.
주전 멤버의 레벨이 포화 상태가 될 때까지 18층 클리어를 반복할 것이다. 그 안에 공략 준비를 끝내야 했다.
“예상 기간은 약 10일. 한 명씩 해야 할 일을 알려주겠다. 제나부터.”
“네, 오빠.”
“너는 이제부터 장궁을 연습해. 쓸 만한 무기는 제작직한테 의뢰해라. 강궁이란 스킬을 배울 때까지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거기에만 매달려.”
20층에 용족이 나온다면 단단한 비늘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를 뚫을 만한 장궁과 그를 보조할 스킬은 필수적이었다. 제나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올카. 너는 화염 마법을 위력을 올려라. 가능하다면 4단계까지.”
“4단계요? 쉽지 않은데…….”
“강요하지는 않아. 되는 만큼은 해봐.”
“알았어요.”
20층에서는 잡졸 처리용이 아닌 고화력의 마법이 필요해질 것이다.
이올카도 처음 왔을 때보다 마력량과 마법의 위력이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얼마 뒤라면 4단계의 벽을 돌파할 수 있겠다는 혼잣말을 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나는 이올카가 고개를 끄덕인 것을 본 뒤 말을 이었다.
“다음은 너희 둘인데, 따로 지시할 게 있나?”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
벨키스트가 머리를 저었다.
“몇 가지 스킬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군. 알려주셨으면 좋겠소만.”
“그거는 걱정 마라.”
벨키스트도 연구의 효과로 스킬창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최근 야성과 통찰력, 그리고 기타 스킬의 제대로 된 활용법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제나와 이올카처럼 원하는 대로 육성시킬 수 있겠지만, 벨키스트의 성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믿고 맡기기로 했다.
“저는 요일 던전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네리사였다.
“이번에는 마비독이 아닌 극독을 준비하겠습니다. 재료가 재료인지라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릅니다만.”
“개인 훈련은 안 해도 괜찮겠나?”
“제 훈련보다는 독을 준비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봅니다.”
네리사는 나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런가. 네리사는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20층에 대한 감을 잡고 있다. 5층으로 이루어진 황금 저택. 그 마지막 층에서 무엇이 나올지는 진작에 눈치챘을 것이다.
‘독이라.’
층수가 낮아 요일 던전의 종류는 많지 않다.
하지만 쓸데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것도 수락했다.
“오늘부터 고정된 일정은 없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다만 게으름을 피우지는 마라. 죽고 싶지 않다면.”
“그 정도로 허술한 파티라면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요.”
벨키스트가 의자 옆에 놓인 칼집을 들고는 일어섰다.
“바로 시작하지. 나와 싸워주시오. 진검으로.”
“아침부터 말이냐?”
“싸우는 것에 아침과 밤은 없지 않겠소?”
‘재밌는 도발이군.’
나는 씨익 웃고는 칼집을 마주 잡았다.
이 녀석은 꽤나 재밌다. 나한테 몇 번이고 패배해도 기가 죽지 않는 것이다. 아론이나 디카, 어셔와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다.
“저는 장궁을 만들어달라고 하면 되는 거죠?”
“그래. 두꺼운 화살도 같이 주문해라.”
암케나의 시선을 무시한다면 내가 제작할 수도 있지만, 장비 제작소의 실력도 의외로 나쁘지는 않다. 한 번쯤은 맡겨도 괜찮겠지. 나는 제나를 붙잡지 않았다.
벨키스트와 대련장으로 가려는데, 이올카가 외쳤다.
“저도 대련에 껴줘요!”
이올카는 입술을 꾹 물고 있었다.
“실전적인 훈련이라면서 왜 저는 항상 빼놓고 하는 거죠? 저도 싸울 수 있어요.”
“네가 하기 싫다면서?”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 이상한 보관소에 들어가는 건 싫다구요!”
나는 잠깐 고민했다.
그동안 이올카는 대련에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본인이 참가를 적극 거부했고 그 자체도 위험했기 때문이다. 화염 마법은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또한, 레벨과 스킬 레벨이 오른 지금은 화력이 지나치게 강해져, 마법을 직격으로 맞으면 일격에 잿더미가 될 수도 있었다.
“괜찮겠나? 봐주지 않아.”
“바, 바라던 바예요.”
이올카는 침을 꼴딱 삼켰다.
‘뭐, 언젠가는 넣을 예정이었지.’
이로써 이올카도 대련 멤버에 포함되었다.
“나는 선배와 싸우고 싶소만.”
나는 벨키스트의 불평을 한 귀로 흘렸다.
화르륵!
사방으로 불길이 퍼진다.
불길은 철책을 붉은색으로 달구면서 내게 접근했다. 살갗에 뜨거움이 와 닿는다. 화염 저항을 가진 내게도 심상치 않은 열기였다. 하지만.
나는 오른쪽으로 가볍게 스텝을 밟은 다음 뛰어들었다.
불길이 나를 쫓아왔으나 이미 늦었다. 검날이 이올카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이올카가 언짢은 표정으로 손을 내젓자 화염이 사라졌다.
“속도가 느려. 좀 더 빠르게 할 수 없나?”
“화력부터 세게 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뒤를 봐준다면서.”
“그렇게도 말했지만, 익혀둬서 나쁠 건 없지.”
나는 빙긋 웃으며 검을 거두었다.
방금으로 10승째. 몇 번의 대련으로 느낀 점은 이올카는 혼자 싸우면 젬병이라는 것이었다. 꾸준한 스탯 상승으로 마법의 위력은 최초보다 두 배가량 늘었지만 컨트롤은 여전하다. 변변찮은 방어 마법이 없기에 속도전으로 나가면서 틈을 노리면 그만이었다.
‘영창류 스킬을 익힐 때가 됐는데.’
현재의 이올카에게는 다중영창이나 고속영창 같은 스킬이 필요하다.
고속영창을 쓰면 캐스팅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고, 다중영창을 배우면 화염류 마법에 염동력을 섞어 유연성을 꾀할 수 있다. 내가 조언한 목표이자 이올카도 동의한 사항이었다.
“다음은 나요.”
대련장 밖에 서 있던 벨키스트가 안으로 난입했다.
그는 이미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쉬는 시간을 안 줘, 너희들은.”
“보고 있느라 좀이 쑤시는 줄 알았소.”
“알았다, 알았어. 둘 다 와라. 시간 낭비하기 싫으니까.”
벨키스트는 이올카를 보더니 눈썹을 올렸다.
“마법사와는 같이 싸우기 싫은데.”
“네리사 양도 싫고, 저도 싫으면, 누구와 같이 싸우면 좋아요?”
“대답하기 싫군.”
“까칠하긴!”
두 명은 투덜거리면서도 태세를 갖췄다.
벨키스트도 며칠 전 화염 저항을 터득한 상태였다. 최소한 이올카의 마법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자세를 잡았다.
“가겠소.”
벨키스트의 눈이 가라앉았다.
순간 그 몸이 흩어지더니 왼쪽으로 쇄도했다. 오른쪽으로는 소리도 없이 생겨난 이올카의 화염이 파고들고 있었다. 얼핏 어설픈 합격으로 보이지만 타이밍이 정확하다. 나는 방패를 꺼내 들고는 다가올 공격을 기다렸다.
그렇게 오전의 일정이 끝난 뒤.
[스킬 각성!] [‘벨키스트(★★)’의 ‘하급 검술’이 Lv.5가 되었습니다!]벨키스트는 무기술 레벨을 5로 끌어올렸다.
상당한 성장 속도였다. 재능도 우수하지만, 그에 따른 노력도 뒤처지지 않는다. 의지와 인내심도 강하다. 빠르지 않을 수 없었다.
‘슬슬 나도.’
나의 무기술 스킬도 레벨 7에 다다른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오를 때가 되었다는 것은 느낌상으로 자각하고 있다. 약간의 계기만 주어진다면 8을 돌파하고, 중급 무기술에 한 발을 걸치게 될 것이다.
무기술은 하급과 중급 사이에 막대한 차이가 있다.
또한, 단련된 신체와 더불어 무기술은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었다. 아무리 잡스러운 스킬이 많아도 무기술이 낮으면 속 빈 강정일 뿐이다.
퉁!
사격장에서는 제나가 활을 당기고 있다.
여태껏 사용한 작은 활이 아닌, 상체 전부를 가리는 커다란 활을 쓰고 있다. 시위를 당길 때마다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화살은 100m 밖의 표적에 날카롭게 꽂혀 들었다.
단궁을 쓸 때와는 다루는 방식이 다르다.
제나의 중지는 피로 젖어 있었다. 두껍고 굵은 활시위를 당기다가 상처가 난 것이다.
퉁!
두 번째 화살이 시위 정중앙에 꽂혀 들었다.
저격에 가까운 정확하고 정교한 솜씨. 따로 누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방식을 깨우쳤다. 위력은 단궁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머지않아 강궁 스킬을 익힐 것이다.
훈련장 한쪽의 쉼터에서는 아론과 어셔가 창과 칼을 부딪치며 싸우고 있었다.
두 명 다 무기술 레벨은 4.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벨키스트와 같았지만, 지금은 추월당한 상태였다.
“확실히 체감되는군.”
의자에 앉고 있던 벨키스트가 비릿하게 웃었다.
벨키스트는 무기술 외에 통찰력의 레벨도 끌어올렸다.
“다 보이는구려. 나라면 5분 안에 이길 수 있겠소.”
“한 번 올랐다고 자랑하긴. 아직 멀었다.”
“뭐, 그렇겠소만.”
2층의 훈련소에 있는 대련장은 하나.
2파티도 같이 사용하는 것이기에 언제까지고 우리만 독점할 수도 없다. 시간에 따라 나눠쓰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우리가 사용한다.
1파티의 레벨업이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나는 작게 속삭였다.
‘상태창.’
[한 이스라트(★★) Lv. 19(Exp 42/150)] [클래스 : 초보자(Novice)] [힘 : 43/43] [지능 : 10/10] [체력 : 39/39] [민첩 : 37/37] [보유 스킬 : 하급 검방술(Lv.7), 심안(Lv.5), 화염 저항(Lv.3) 고통 내성(Lv.4), 침착성(Lv.5), 광폭성(Lv.4), 은밀한 몸놀림(Lv.1), 기마술(Lv.1)]현재 내 레벨은 19.
힘은 40을 익히 넘겼고, 체력과 민첩은 그에 가까워졌다.
화염 저항과 침착성, 광폭성이 1레벨씩 업.
3성 승급과 전직의 분기점인 20까지는 채 1레벨도 남지 않았다.
‘…….’
나는 손에 든 물컵에 힘을 주었다.
우그적.
철로 만들어진 컵이 종이처럼 꾸깃하게 접혔다. 나는 철 쪼가리가 된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기다리면 복구될 것이다.
‘조금 이상하군.’
2성으로 승급했을 때부터 성장치가 5와 6을 오가고 있다. 5는 3성의 평균 수치. 그리고 6은 4성의 평균 수치였다. 이미 나의 종합 스탯 합산은 2성의 것이 아니었다. 다른 마스터가 나의 스탯을 본다면 조작이라며 비웃을 정도로.
30kg에 가까운 모래주머니를 달지 않으면 운동이 되지 않는다.
100m 달리기 기록은 8초에 근접했다. 물구나무서서 팔굽혀펴기를 쉼 없이 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한계에 가까운 신체였다면, 이제는 명백하게 인간을 벗어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무언가 다른 것이 느껴진다.
그걸 깨달은 시기는 2성으로 전직한 직후. 예전에는 검과 방패를 같이 쓰는 게 자연스러웠다면, 이제는 조금씩 부자연스러워지고 있다.
‘방패를 버릴 때가 됐나.’
나는 방패와 적성이 맞지 않는다.
방어에 관련된 스킬을 배우지 못한 것만 봐도 확실했다. 20층을 뚫고 여유가 생기면, 스킬을 분리해야 할 것 같았다.
2파티를 부르는 이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제에 이은 지명. 우리처럼 18층 뺑뺑이를 돌리려는 듯했다.
“출전까지 얼마 안 남았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구겨졌던 컵은 멀쩡해져 있다. 벨키스트가 따라 일어났다.
“2파티가 적당한 레벨이 되면 바로 가겠지. 후회하지 않게 준비해둬.”
“선배도 조심하시오. 내게 따라잡히면 곤란하니.”
“자신감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나는 씨익 웃고는 칼집에서 검을 빼냈다.
이올카는 마법 전당에 들어가 있다. 도서관에서 캐스팅과 관계된 책을 찾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밤.
[스킬 각성!] [‘한(★★)’의 ‘하급 검방술’이 Lv.8이 되었습니다!]나는 무기술 레벨 8을 돌파했다.
내가 훈련하는 도중에도 등반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이번에 만들어진 장비는 D+ 랭크의 가죽 갑옷. 재료의 수준을 따지면 꽤 양호한 등급이었다. 가죽 갑옷은 여러 벌이 만들어져 1파티와 2파티에 분배되었다. 그 외에 암케나는 투척용 단검이나 해독제, 회복 물약 같은 소모품도 꾸준하게 제작했다.
2층에는 속속들이 쓸모있는 인재가 올라왔다.
먼저 회복 물약을 만들 수 있다는 약제사. 그녀는 마법 전당으로 배속됐다.
다음으로는 교관이 된 디카 녀석도 2층에 다시 복귀했다. 디카는 내게 찾아와 교관으로 추천해줘서 고맙다며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그 밖에도 보조직의 조수 몇몇이 섞여 있었다.
3파티 또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3파티는 2파티를 뛰어넘는 가파른 페이스로 등반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연한 조치였다. 20층 공략에는 3파티까지 필요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번 공략이 끝나고 나면 단순한 유망주 모임이 아닌, 2파티에 이은 정식 공략 파티로서 2층에 합류할 듯했다.
’20층을 열심히 대비하는군.’
20층은 어렵다.
내가 보낸 공략을 봤다면 모를 리 없다.
나도 20층에서 꽤나 고생했으니. 정확히 세 번의 전멸을 겪었다. 그러나 여기선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어서는 안 된다. 20층은 물론이고 앞으로 이어질 모든 임무에서도.
이 조건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한다.
그리고 살아남아서 지구로 돌아간다.
이곳에 온 뒤, 한 번도 변하지 않은 나의 목적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나는 파일을 덮었다.
파일 안에는 보스전의 유형과 각종 패턴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놈이 등장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공략은 암기가 끝났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희끄무레한 어둠에 뒤덮여 있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 이미 밤을 지난 깊은 새벽이었다.
출전은 아마 내일.
어제부로 2파티의 레벨링이 끝났다.
한층 보강된 장비도 지급을 마친 상황. 모두가 눈치채고 있었다.
‘타이밍이 뻔해서 좋은데.’
나는 가볍게 웃었다.
나도 저렇게 했다. 공략 전 무언의 신호를 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튿날,
영웅들이 알아서 준비를 해 온다.
아침, 나는 식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 훈련은 없어. 저녁까지 대기한다. 함부로 힘 빼지 마.”
식당에는 1파티와 2파티의 모든 멤버가 모여 있었다.
“이상이 있으면 보고해라. 도저히 무서워서 못 나가겠다든가. 그럼 내가 적극적으로 말해보겠다.”
“합성을 해달라고 말이오?”
벨키스트가 웃었다.
“들켰냐?”
“농담이 아닐 것 같아서 무서운데.”
에디스가 말을 받았다.
“2파티, 준비는?”
나는 에디스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 뒤에는 로데리크와 아론을 포함한 2파티의 멤버가 차례대로 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는 됐어. 출전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번에는 너희도 나갈 거야. 15층과는 달라.”
“그건 알아.”
‘그리고 이 자리에는 없지만, 3파티까지도.’
나는 영웅들의 면면을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마스터가 접속하려면 조금 시간이 있을 거다. 못다 한 일이 있으면 해둬. 유서를 쓰든 무얼 하든. 유서를 쓰는 놈은 죽으면 내가 찾아서 손수 찢어주지.”
“이번 임무에서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겠지?”
에디스가 나를 보며 말했다.
눈빛에 불안이 담겨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할 일만 제대로 한다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를 신호로 사람들이 하나씩 일어나 각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주방으로 가 맛있는 것을 주문하는 놈도 있었고 숙소 방향으로 가는 녀석도 보였다. 휴게실으로 가는 무리도 몇몇 보였다. 이 와중에 유서를 쓰는 놈도 있었다.
“진짜로 쓰냐?”
“남이사! 신경 쓰지 마요.”
이올카가 혀를 배 내밀었다.
이올카는 종이를 휘릭 접고는 방으로 향했다. 자기 방에서 마저 쓰려는 것 같았다. 식당은 1분도 안 지나 텅 비어 버렸다. 나는 가만히 있던 아론에게 말했다.
“내가 약속을 어기지 않게 해.”
아론은 빙긋 웃고는 창을 손에 쥐었다.
“죽을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형님은 어디 가십니까?”
“나는 낮잠이나 자련다.”
당연히 그런 여유로운 짓을 할 생각은 없다.
방에서 한 번 더 자료를 훑어볼 예정이었다. 암케나가 접속할 때까지.
20층은 바로 코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