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1
-1-
결혼식을 앞두고, 레아는 유서를 작성했다.
첫날밤을 치른 후 죽어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새신부의 자살이라니 기함할 짓거리였다.
하지만 명예롭지 못한, 수치스러운 죽음이야말로 레아가 가장 원하는 바였다.
평생 나라를 위해, 그리고 왕실을 위해 헌신한 왕녀의 최후는 비참했다.
쌓아올린 업적은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물거품으로 변했다.
아무리 애써봤자 결국 장사용 물건밖에 되지 못한 것이다.
결혼 상대는 오베르데 변경백.
말이 변경백이지, 스물다섯 살이나 더 많은 늙은이의 재취 자리였다.
당연히 레아는 원하지 않는 결혼이었다.
하지만 변경백의 권력을 두려워한 왕실은 막대한 재물을 받고 왕녀를 팔았다.
왕실이 변경백의 청혼을 받아들였을 때, 레아는 스스로를 망가뜨리기로 결심했다.
왕실이 준비한 최고급 상품에 흠집을 내는 것.
그것은 레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오늘, 결혼식을 위해 왕궁을 떠난다.
준비는 이미 모두 끝냈다.
레아는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삼 주일의 기나긴 마차여행 후, 오베르데령에 도착할 것이다.
그곳에서 늙은 변경백과 결혼식을 치르고, 맹세의 키스를 나누고, 초야를 맞이한다.
새신부와 첫날밤을 치를 생각에 들뜬 변경백의 면상이 어렵잖게 눈앞에 그려졌다.
두꺼비처럼 생긴 그가 제 몸 위에 올라타 흔들어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역겨웠다.
초야를 치르고 나면, 변경백은 새신부가 순결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에스티아에서 신부의 순결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다.
처녀가 아닌 신부를 거금에 팔아넘겼으니, 변경백은 불같이 화내며 왕실에 항의할 것이 뻔했다.
변방에서 야만족을 막는 그의 권력은 수도의 귀족들도 빌빌거리며 고개를 조아릴 정도였다.
이미 모든 권력을 잃어버리고 껍질만 남은 왕실은 변경백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받아낸 그 이상을 토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레아는 왕족의 이름을 박탈당하고, 왕실의 명예를 진흙탕에 처박은 탕녀로 영원히 손가락질 받게 되리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결말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두 눈으로 직접 그 과정을 지켜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때쯤이면 레아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있을 테니까.
“왕녀님. 혼인장입니다.”
오베르데령으로 떠나기 직전, 발테인 궁정백이 혼인장을 들고 왔다. 레아는 깃펜에 잉크를 묻혔다.
[레아 드 에스티아.]유려하게 그려지는 서명은 유언장에 남긴 것과 꼭 같은 모양새의 서명이었다.
흰 종이에 새겨지는 검은 글씨가 야속하리만큼 선명했다.
깃펜을 내려놓자, 옆에서 지켜보던 멜리사 백작부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시녀장인 그녀가 눈물 흘리는 순간, 참고 있던 다른 시녀들도 일제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혼인장을 들고 온 발테인 궁정백 또한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통탄해했으나, 정작 당사자인 레아는 담담했다.
우아하게 깃펜을 내려놓은 뒤, 등을 곧게 세웠다.
“그만 일어나도록 하죠.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군요.”
“왕녀님……!”
시녀들이 눈물 흘리며 매달려왔다.
변경으로 찾아오겠다고, 서신을 보내겠다고 그녀들은 간절히 말했다.
그러나 레아는 대답 대신 가만히 미소 지었다. 어떤 약속도 해줄 수 없었다.
오늘이 그녀들을 보는 마지막 순간일 것이기에.
비루한 삶에는 더 이상 한 줌의 미련도 없었다.
레아는 시녀들의 눈물 어린 작별 인사를 뒤로하고 마차로 향했다.
변경백이 특별히 준비했다는 마차는 그의 취향처럼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금으로 도색하여 번쩍거리는 마차에 오르려던 차였다.
“레아!”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쨍하게 울려 퍼졌다.
마차를 앞에 두고 천천히 뒤돌아보니, 한 남자가 씨근덕거리는 숨을 추스르며 레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에스티아의 왕태자, 블레언이었다.
눈부신 은발을 가진 이복동생을 바라보며 레아는 웃었다.
이 끔찍한 결혼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더 이상 블레언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블레언이 손짓으로 주위의 시종시녀와 경비병들을 물렸다. 레아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모습에 블레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걸레년이 남편 잘 물었다고 건방지게…….”
저잣거리 시정잡배처럼 체통이라곤 조금도 없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함부로 대한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에, 레아는 동요 없이 받아쳤다.
“물러나주세요. 더 이상 지체했다간 오늘 수도를 떠나지 못할 것 같으니.”
블레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치켜올렸다.
뺨을 내려치려는 블레언에게 레아가 냉랭히 쏘아붙였다.
“나는 이제 오베르데 변경백의 소유물이에요. 그의 물건에 흠집을 내도 괜찮나요?”
블레언의 눈동자가 분노로 흔들렸다. 느릿하게 손을 내린 그는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결혼했다고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바짝 달라붙어 서서 속삭이는 말이 벌레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내가 왕위에 오르는 날……. 가장 먼저 네년부터 수도로 끌고 올 테니까.”
저열한 협박이었으나 그저 웃음만 나왔다.
시체라도 좋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레아는 그냥 아무 대답 않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 문이 닫히자 블레언이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허나 더 이상 붙잡지는 못했다.
말은 저리 해도 오베르데 변경백이 무서운 것이다.
말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였다. 레아는 살짝 커튼을 걷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에스티아 왕궁이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평생을 살아왔던 곳이지만 아쉬움이나 슬픔은 들지 않았다.
애초부터 레아는 저곳에 속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약간의 미련이 있다면…….
“…….”
아랫입술을 깨물며 커튼을 쳐버렸다. 왜 자꾸 그 남자 생각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건방지고 제멋대로이며,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그는 하루 전에 왕궁을 떠났다고 들었다. 이미 끊어진 인연을 그리워하다니 아둔한 짓거리였다.
하지만 스스로를 멍청하다 욕하면서도, 떠오르는 상념을 막을 순 없었다.
복잡한 생각들에 잠겨있는 동안, 마차는 수도를 벗어나 외곽지의 평원에 이르렀다.
탁 트인 평원에는 억새풀이 가득했다.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레아는 그저 가만히 의자에 늘어졌다.
어서 시간이 흘러가기를, 하여 하루라도 빨리 지긋지긋한 삶을 종결지을 수 있기를.
간절한 바람을 곱씹으며 무의미하게 눈을 감고 있을 때였다.
“……!”
기다란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레아는 비스듬하던 몸을 바로 세웠다.
우렁찬 첫 번째 나팔 소리에 뒤이어, 연이어 뿔나팔이 울렸다.
겹겹이 쌓이며 평원 가득히 퍼져나가는 뿔나팔 소리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커튼을 걷어 창밖을 내다본 레아는 숨을 집어삼켰다.
말을 탄 수십의 추적자들이 뒤를 쫓고 있었다.
마차를 호위하던 왕실기사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기습이다!”
“속도를 올려라!!”
마차가 거칠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추적자들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민첩했다.
그들은 간단하게 행렬을 따라잡았고, 순식간에 주변을 에워쌌다.
뿔나팔 소리와 함성이 뒤섞이며, 검을 뽑아드는 쇳소리가 곳곳에서 울렸다.
어디선가 밧줄이 날아왔다. 뱀처럼 날아든 밧줄에 목이 휘감긴 기사가 말 위에서 추락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흥분한 말들이 발길질을 하며 제멋대로 날뛰었다.
창밖을 바라보자 마부의 시체가 굴러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레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통제를 잃고 엉망으로 흔들리던 마차가 크게 기울었다. 세상이 온통 뒤흔들렸다.
“…….”
레아는 숨을 몰아쉬었다. 처참히 전복한 마차는 바퀴가 부서지고 문짝이 뜯겨나갔다.
파편이 쏟아지며 피부 위에 작은 생채기를 남겼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부서진 마차 문짝을 밀었다.
간신히 바깥으로 기어나가니 피비린내 섞인 바람이 가득 불어왔다.
머리가 아찔해지는 혈향이었다. 피에 젖은 억새풀 위에서 왕실기사들이 추적자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허나 무의미한 전투였다. 왕실기사들은 마치 짚단처럼 허망하게 쓸려나갔다.
기사가 피맺힌 목소리로 고함쳤다.
“야만족 주제에 감히……!”
그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날카로운 곡도가 갑주의 틈을 파고들었다.
목이 날아가고, 더운 피가 평원의 억새풀 위로 흩뿌려졌다.
참혹한 광경에 레아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지러운 시야에 습격자들의 모습이 박혀들었다.
채도 높은 눈동자와 어두운 체모, 짙은 피부 위에 화려하게 그려진 문신.
왕녀의 행렬을 습격한 이들은 야만족, 쿠르칸이었다.
짐승 같은 이들 중에서도 가장 도드라지는 한 남자가 보였다.
거대한 군마에 탄 장신의 남자는 말을 몰아 레아에게 다가왔다.
흐트러진 흑갈색 머리카락 아래, 열기 가득한 금안이 레아를 꿰뚫었다.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숨이 막혔다. 레아는 느리게 입술을 벌렸다.
“어째서…….”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은 속삭임은 남자의 웃음소리에 금세 파묻혔다.
“기억 안 나?”
낮고 묵직한 저음과 함께 손이 뻗어져왔다.
레아는 말 위로 끌려올라갔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저항했으나 간단히 제압당했다.
커다란 손이 레아의 허리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남자는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네 인생 망쳐주겠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