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108
-108-
세르디나는 냉한 눈으로 제 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환한 금발을 가진 그녀는 손수건이 흠뻑 젖도록 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체면도 없이 펑펑 울어대며 아까부터 계속 똑같은 단어만 반복해댔다.
“전하, 흑, 전하께서 어찌 저에게……. 그, 그러실 수가…….”
우느라 정신없는 미라옐 부인을 쳐다보던 세르디나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예쁘고 멍청해서 블레언의 옆에 붙여놨더니, 아둔한 탓인지 가끔 이렇게 주제 모르는 짓을 벌여댔다.
하지만 눈물을 훔쳐낸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세르디나는 무표정한 얼굴 위로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미라옐 부인의 낯빛이 밝아졌다. 그녀는 잔뜩 상기된 눈으로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저를 도와주실 것이지요……?”
“물론이란다.”
세르디나는 귀여운 애완동물을 어르듯 그녀의 뺨을 만져주었다.
“내가 블레언에게 말해놓으마.”
미라옐 부인이 두 손을 꼭 맞잡으며 감격의 환호를 내질렀다. 세르디나는 살풋 웃음을 머금었다.
욕망에 솔직한 이들은 밉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쪽이었다.
짧은 인생, 부귀영화를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욕망이야말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불꽃이니.
비록 아주 잠깐 빛나고 스러지더라도 말이다.
“앞으로도 전하께 열심히 봉사하렴.”
“네! 네에……!”
미라옐 부인이 헤실헤실 웃었다.
오늘부터 더욱 관리에 힘쓰고 전하의 침실도 안락하게 덥히겠다며 의욕을 다진 뒤, 미라옐 부인은 퇴궁했다.
그녀의 마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세르디나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블레언에게 총애 받던 미라옐 부인이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바로 이것이었다. 세르디나는 블레언이 여자들을 물건처럼 쓰고 내버리길 원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절대군주들이 사랑 하나 때문에 몰락했다.
제 아들이 그깟 여자 하나에 미쳐서 무너지는 꼴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블레언은 다른 여자들을 전부 함부로 다루어도, 레아에게만큼은 항상 무르게 굴었다.
일전에도 비를 맞아가며 왕녀궁 앞에서 기다렸을 정도였다.
그게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세르디나는 그날 당장 레아를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애초 계획했던 것처럼 오베르데 변경백에게 팔아치웠어야 했는데, 블레언의 집착 때문에 조금 어긋나버렸다.
그녀는 천천히 응접실 창가를 따라 거닐며 정원의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바짝 마른 잎사귀가 나뭇가지 끝에 힘겹게 매달려 있다가 버티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래도 레아는 꽤나 쓸 만한 아이였다.
본래 귀족들을 전부 인형으로 만들고 나면, 굳이 국정에 신경 쓸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레아에게 일을 시켜보니, 확실히 여러모로 편한 점이 많았다.
블레언이 그리 좋아하기도 하니, 최대한 완전하게 종속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세르디나는 창틀에 손을 얹고 있다가 문득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건방진 것.”
처음 주술을 걸 때부터 생각했지만, 레아는 자아가 강한 편이었다. 꺾고 망가뜨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번에 만들어낸 사랑의 묘약은 그런 부분까지 감안하여 주술을 불어넣었다.
일전에 미리 빼두었던 머리카락까지 넣어서 만든 것이었다. 분명 몸과 마음을 전부 구속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주술은 반쪽짜리가 되어버렸다. 믿기지 않는 일에 혹시나, 정말 만에 하나 임신했을 가능성도 고려해보았다.
야만족의 피는 주술에 대한 저항력이 높았다. 아이를 가졌다면 확실히 주술을 방해할 수도 있을 터였다.
물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긴 했다. 오랫동안 주술로 망가져온 레아는 불임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혹시 모를 아주 작은 싹까지 없애기 위해, 유산을 시키는 약차를 먹였다.
최근 블레언 때문에 왕녀궁 식단관리를 하지 못하는지라 식욕을 억제하는 효과도 넣어서 만든 약차였다.
레아는 블레언의 옆에 설 것이니 흠결 없이 완벽해야만 했다. 몸도, 마음도 완벽하게…….
“…….”
세르디나는 자신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술에 묻어난 핏물을 삼키며, 손가락으로 초조하게 창틀을 두드렸다.
완전한 구속을 위해 새로운 주술을 만들어 덧씌워야 할 것 같았다.
야만족들은 반려의식을 통해 서로 영혼을 묶는다고 들었다. 블레언과 영혼까지 묶어줄 생각은 없으나,
그와 비슷하게 결혼식을 통해서 훨씬 단단한 구속의 주술을 행할 수는 있으리라.
-약속을 지키십시오, 어머니.
블레언의 목소리가 쨍하게 머릿속을 울렸다. 세르디나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신경질적으로 되뇌었다.
“나는 신이야. 신이라고…….”
그러니 해내지 못할 일은 없었다.
* * *
꿈을 꿨다. 레아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다급하게 달려 도착한 곳은 거대한 쇠문 앞이었다.
쇠사슬로 칭칭 휘감긴 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열어야 하는데 도저히 열 수가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이 부서져라 문만 두들겼다.
당연하게도 굳건한 쇠문은 미동조차 없었다. 레아의 손만 벌겋게 부었다.
정신없이 쇠사슬을 잡아당겨보고 자물쇠를 흔들던 때였다. 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쇠가 없어.
레아는 입술을 벌렸다. 차분한 어조의 목소리는 분명 제 것이었다. 또 다른 레아는 지극히 침착하게 명령했다.
-열쇠를 찾아야 해, 레아.
당황하여 잠시 굳어있던 레아는 흠칫 놀라서 물었다.
어디에 있는데?
-서둘러! 시간이 없어. 세르디나에게 들키기 전에 빨리!!
뭘? 무엇을 들키면 안 되는 건데?
그러나 목소리는 아무것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레아의 질문에도 자신이 해야 할 말만 이어갔다.
-그녀가 알게 된다면…….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경고했다.
-죽일 거야.
레아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아!”
악몽에서 깨어났으나 정신을 차릴 새가 없었다. 배에서 통증이 일었다. 손으로 배를 감싸 쥐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흑, 아아, 아…….”
배를 보호하듯 공처럼 단단히 몸을 말고서, 한참 동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뾰족한 통증이 마침내 가라앉았을 때는 온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어질어질한 시야로 주변을 확인했다. 익숙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왕녀궁 침실이었다.
창밖으로 희미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침대에 쓰러져있던 레아는 순간적으로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두려운 얼굴로 천천히 손을 배 위에 얹었다.
“…….”
잘못 느낀 것이 아니었다. 배 속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아주 미약하고 희미하지만,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움직임은 금세 사그라졌고, 이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고요해졌다.
이게 뭐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일어났다. 굳어있던 레아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져서 정신이 없었다.
의원을 부를까했지만, 곧장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모든 것이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몸 상태에 대해서 믿고 말할 사람이 없었다. 그 순간 레아는 저도 모르게 그 남자를 떠올렸다.
간밤의 일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스쳤다.
시나엘 남작부인, 농장의 권리증서, 그리고 조금도 역겹지 않았던 순간들.
떠오르는 뜨거운 기억에 레아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신 나간 짓을 저질러버렸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죄책감과 후회는 크지 않았다.
그가 물어뜯고 빨아댔던 곳들이 화끈거렸다. 지워내려 해도 지워낼 수 없는 감각은 꾸준히 지난밤의 일을 상기시켰다.
레아는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결혼반지가 차갑게 반짝였다.
반지를 빼서 내던지고 싶은 충동에 레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정신 차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흔들리는 마음은 더 이상 어찌 붙잡을 수조차 없었다.
레아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내려섰다.
탁자의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시며 엉망으로 뒤엉킨 머릿속을 간신히 하나씩 풀어나갔다.
일단 이상한 몸 상태부터 파악해야 했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이샤칸을 다시 만나서, 그에게 믿을 만한 의원을 불러달라고 할까 싶었다.
다시 만난다면, 그날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마저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시나엘 남작부인 또한 다시금 확인해볼 필요성이 있었다.
기억의 빈 공간은 확실해졌으나, 무언가를 추론해보기엔 아직도 정보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우두커니 서서 혼돈을 가라앉히던 레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갑자기 왕녀궁 침실이 숨 막힐 듯 답답하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원이나마 나가보려 문손잡이를 붙잡았을 때였다.
“……!”
문이 열리지 않았다. 레아는 당황하여 문고리를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달그락달그락 헛돌기만 할 뿐이었다.
“왕녀님.”
닫힌 문 너머에서 멜리사 백작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아는 크게 반기며 그녀에게 말했다.
“멜리사 백작부인! 문 좀 열어줘요.”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당황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네?”
난데없는 소리에 되물으니,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근신을 명하셨습니다. 오늘부터 바깥으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