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29
-29-
윽박지르듯 내던진 말에 세르디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우아하게 답했다.
“왜 내가 그랬다고 생각하지?”
“그야 당연히……!”
“블레언, 사랑하는 내 아들.”
세르디나는 무릎의 여우모피를 옆에 내려놓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블레언에게 다가가 가만히 끌어안았다.
블레언은 움칠 몸을 떨면서도 세르디나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런 블레언을 달래듯, 세르디나는 가만가만 등줄기를 쓸어주었다.
“그 아이가 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내가 왜 그러겠어.”
“어머니…….”
“뭘 그리 초조해할까, 응?”
그녀는 블레언을 올려다보며 눈을 맞추었다. 곱고 가지런한 눈썹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설마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거니? 고작 천하디천한 야만족에게?”
“왕녀는 혼전순결을 지켜야 하니 걱정했을 뿐입니다.”
“레아가 정숙하지 못하게 굴어서 불안하구나.”
어금니를 악문 블레언을 보며 세르디나가 살풋 웃었다.
“염려할 필요 없단다. 이번 협상만 끝나면 너는 왕이 될 터이니.”
무엇도 불안해할 필요가 없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거야.
세르디나는 몇 번이나 속삭여주었다. 그윽한 자장가처럼 휘감아오는 목소리에 블레언은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왕비궁에 처음 들이닥칠 때와는 다르게 많이 꺾인 모습이었다.
세르디나가 그런 블레언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왕녀의 일은 나도 의외롭구나.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라고 왕녀궁에 일러놓으마.”
“당분간은 내버려두십시오.”
“그래, 몸이 나을 때까지는 일정을…….”
작은 비명이 터졌다. 블레언이 세르디나를 거칠게 밀쳐낸 것이다.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어버린 세르디나에게 블레언이 일갈했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
세르디나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찰나의 적막이 스치고, 고운 입술에서 발작적인 말이 터져 나왔다.
“다 너를 위한 일이야!”
날카로운 목소리에 블레언은 답하지 않았다. 어머니 말이 옳다고, 혹은 틀렸다고 대답하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세르디나는 급하게 달음박질을 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거친 숨소리만이 얼마간 적요한 공간 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매끄러운 웃음을 가면처럼 덮어썼다.
에스티아의 왕비로서 손색없는 고아한 미소가 피어났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단다, 블레언.”
“……믿겠습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며칠간은 그 아이에게 자유를 주마. 어미에게 화풀이하지는 말아주렴.”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뱉으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옆에 내려놓았던 여우모피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던졌다.
부드러운 털을 깔개처럼 짓밟으며 말문을 열었다.
“야만족과는 나도 대화를 나눠보긴 해야 할 것 같으니…….”
세르디나가 구두 굽으로 털을 문지르며 한가로이 말했다.
“다 같이 만찬이라도 가져볼까.”
무엇을 생각하는지 눈을 내리깔고 있던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블레언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사슴을 한 마리 잡아다주겠니? 여우모피는 금세 질려서 말이야. 뿔이 멋진 수사슴이면 좋겠구나.”
블레언의 눈이 흔들렸다. 허나 갈등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답했다.
“……네, 어머니.”
* * *
피를 토하며 쓰러진 덕분에, 레아는 며칠을 꼼짝없이 휴식하게 되었다. 밀려있는 일거리를 생각하면 불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어 행복했다.
원래대로라면 진즉 세르디나에게 끌려가 호되게 혼이 난 다음, 피를 토하든 말든 왕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연회장에 인형처럼 서있었을 터였다.
블레언이 왕녀궁에 출입금지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블레언은 왕녀의 병환을 알리고, 왕녀궁에 외부인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함부로 명령을 어기는 이가 없도록, 제 직속기사단까지 보내어 왕녀궁의 호위를 곱절로 늘리기까지 했다.
세르디나는 남편인 왕마저도 깔보았지만, 블레언의 말에는 꼼짝 못 했다. 블레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나서서 막아준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으나 레아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블레언의 변덕이겠거니 하고 넘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왕녀궁에 칩거하는 동안, 오베르데 변경백은 하루도 빠짐없이 거대한 장미꽃다발과 보석 선물을 보내왔다.
과시하길 좋아하는 변경백의 성정과 잘 어울리는 선물이었다. 그때 그렇게 일을 벌였지만, 레아에게 미움을 받는 건 또 싫은 모양이었다.
자꾸 선물로 수습해보려 애쓰는 것이 같잖았다.
다만 레아는 단 한 번도 선물을 본 적이 없었는데,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시녀장인 멜리사 백작부인이 알아서 돌려보낸 덕분이었다.
그녀는 선물이 왔었다는 말만 전해주면서 한마디 짧게 첨언했다.
“장미꽃다발이 참 큼직하긴 하더군요. 짓이겨서 정원에 거름으로 주려다 참고 돌려보냈습니다.”
“잘했어요. 앞으로도 그에게서 오는 것은 무엇이든 거절해주세요.”
“예, 왕녀님. 그리고 내일…….”
백작부인은 잠시 근처에서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시녀들을 흘긋 본 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쿠르칸의 왕과 야외정원에서 오찬을 갖는다 합니다. 왕비 전하께서 왕녀님도 반드시 참석하라 전하셨습니다.”
꼬박꼬박 야만족이 아닌 쿠르칸이라 호칭하는 그녀가 재미있어 미소가 지어졌다. 레아는 옅게 웃으며 답했다.
“참석하겠노라고 전해주세요.”
언제까지 왕녀궁에 박혀있을 수는 없었다. 연회도 이제 막바지였다.
화친 협상이 하루 이틀 안에 끝날 일은 아니고, 장기전이 될 테니 본격적으로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모아야 했다.
발테인 궁정백에게는 왕녀궁에 박혀있는 기간 동안 서신을 주고받으며 여러 부탁을 해놓았다.
그도 지금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열심히 일하고 있을 터였다.
재무대신 로랑에게서도 연락이 왔었다. 이번 국무회의에서 새로운 세제 개편안을 발의할 준비가 끝났다는 것이었다.
변경백을 비롯한 귀족들이 극심하게 반발할 광경이 눈에 선했다. 단박에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으리라곤 레아도 기대하지 않았다.
레아는 화친 협상과 세제 개편안을 한데 묶을 생각이었다.
변경백은 개편안을 반대하는 귀족들의 구심점이었다. 화친 협상에 성공하면 변경백의 세력이 주춤할 테니,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밀어붙이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안이었다.
멜리사 백작부인과 협상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때였다. 시녀 하나가 집무실로 쫓아왔다.
“변경백이 또 선물을 보낸 모양입니다.”
멜리사 백작부인이 다소 짜증 어린 어조로 중얼거린 후, 잠시 다녀오겠다며 바깥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레아는 창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정원의 월하향이 궁금했다. 그날 밤의 꽃밭은 만개하여 흐드러졌던데, 왕녀궁의 월하향도 그만큼 꽃피었는가 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며칠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사실 이것이 옳은 관계였다. 공적인 일이 있지 않고서야 얼굴 볼 일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
레아는 말없이 창문에서 뒤돌아섰다. 쓸데없는 상념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더미로 다시 눈길을 돌리는데, 문이 열렸다.
“왕녀님……!”
멜리사 백작부인이 두 손 가득히 무얼 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월하향이었다.
화려한 꽃다발은 아니었다.
그저 꽃대째로 서넛 꺾어다가, 월하향과 어울리는 흰 리본으로 묶은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눈에 유난하게 박혀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백작부인은 당황한 얼굴로 책상 위에 월하향 다발을 내려놓은 뒤, 그 아래 받치고 있던 것을 건넸다.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자색 비단으로 지은 쿠르칸식 드레스였다. 드레스에는 쪽지가 함께 놓여있었다.
-몸은 괜찮나? 얼굴 보기가 힘들군.
대륙어를 휘갈긴 글씨체는 사납고 비뚤었다. 제멋대로인 악필로 짤막히 한마디 적어놓은 쪽지를 바라보던 레아는 문득 입가를 손으로 더듬었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누가 볼세라 얼른 웃음을 감추었으나, 이미 흥미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던 시녀들에게 걸린 뒤였다.
시녀들은 아닌 척하면서 슬며시 레아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시나엘 남작부인이 호들갑을 떨었다.
“맙소사, 자색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잖아요! 그때 야만족들이 입은 예복의 자색 비단이 고와서 귀족들이 난리가 났었는데……. 다들 똑같은 것을 구하고 싶어서 혈안입니다.”
한 번만 만져 봐도 되냐며 거의 침이라도 흘릴 기세로 쳐다보던 그녀는 멜리사 백작부인에게 눈 흘김을 받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레아는 쪽지와 월하향 다발만 챙기고, 드레스는 멜리사 백작부인에게 다시 건넸다.
“드레스는 돌려보내세요.”
“왕녀님!”
옆에서 시나엘 남작부인이 동동거렸지만, 이리 값비싼 물건을 받을 순 없었다.
특히나 협상을 앞둔 지금, 뇌물을 받는 모양새가 되어선 곤란했다. 하지만 멜리사 백작부인은 드레스를 받지 않았다.
“선물을 가져온 심부름꾼이…….”
그녀는 굉장히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고, 몹시 난감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하나라도 돌려보내면 왕께서 내일 오찬에 참석하지 않으실 거라는 말도 함께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