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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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절하는 일은 가끔 있었다. 세르디나가 식단관리를 너무 과하게 하거나, 무리하여 며칠 밤낮을 새워가며 일정을 소화하다가 기절하곤 했다.
그러나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는 난생처음이었다.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울어서 눈이 새빨개진 멜리사 백작부인이었다.
“왕녀님!!”
부인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녀의 비명에 뒤편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던 왕녀궁의 시녀들도 우르르 달려왔다.
레아는 백작부인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기대앉으며 그녀들을 받아주었다.
“왕녀님! 왕녀님!!”
“괜찮으십니까?”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예법이나 체통도 잊고서 전부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통에, 레아도 덩달아 휘말려 잠시 허둥지둥했다. 멜리사 백작부인이 뒤늦게 상황을 정리했다.
“다들 떨어지세요! 왕녀님께서 이제 눈을 뜨셨는데…….”
하지만 시녀들은 일제히 억울한 눈빛을 보냈다. 정작 저렇게 말하는 멜리사 백작부인이 가장 먼저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멜리사 백작부인도 그 사실을 아는지, 민망한 듯 헛기침했다. 당돌한 성정의 시나엘 남작부인이 바락 대꾸했다.
“저희 같은 쭉정이들은 왕녀님께서 깨어나셨다고 기뻐할 자격도 없습니까?”
“부인……. 어찌 말을 그렇게…….”
당황한 백작부인에게 그녀는 한 방 더 날렸다.
“멜리사 백작부인도 소리 지르셨으면서! 같이 울었잖아요!”
퉁퉁 부은 눈을 한 시나엘 남작부인은 울음을 터뜨렸다. 시나엘 남작부인을 시작으로 왕녀궁의 시녀들도 연이어 울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통곡의 바다에 레아는 황급히 그녀들을 달래주어야 했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뒤쪽에서 조용히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낸 다음 시녀들을 내쫓았다.
“왕녀님께서 금방 정신을 차리셨는데 쉬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시나엘 남작부인까지 전부 물러났다. 침실은 폭풍이 쓸고 지나간 듯 조용해졌다.
레아는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대강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백작부인이 건네준 물을 조금씩 마시며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꼬박 하루를 잠들어계셨습니다.”
레아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뒤, 왕녀궁은 당연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로 앞에 서있던 블레언이 쓰러지는 레아를 받아 안았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원을 불러오라 고함질렀더랬다.
“왕녀님을 그토록 괴롭혀놓고선, 막상 쓰러지니 어찌나 난동을 부리던지…….”
멜리사 백작부인은 지긋지긋하다고 진저리 쳤다. 그녀는 더욱 심한 말을 하고 싶지만 간신히 참는 듯한 눈치였다.
아무튼 몹시 꼴사나웠다며 험한 평가를 내린 후, 멜리사 백작부인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 야만족은 제법 점잖더군요.”
게닌을 말하는 것이었다.
단단히 호감을 산 모양인지, 백작부인은 은근슬쩍 게닌을 칭찬했다.
들어보니 부인이 좋아할 만했다. 레아가 쓰러지자, 게닌은 소리만 빽빽 질러대는 블레언을 밀어내고 대신 레아를 번쩍 안아들었다.
침실로 달려가 침대에 눕힌 뒤, 몸을 죄이는 허리띠를 풀어주고 넋이 나간 시녀들을 진두지휘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늦게 달려온 의원이 레아의 상태를 파악해내지 못하자, 대신 나서서 레아를 살펴봐주기까지 했다.
이상한 향초를 피우며 몸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는데, 실제로 그 덕분에 레아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창백하게 질려있던 레아의 얼굴에 혈색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곤, 멜리사 백작부인은 부끄럽지만 울음을 터뜨렸다고 고백했다.
“정말 큰일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멜리사 백작부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져가고 있어서, 레아는 일부러 다른 쪽으로 대화를 돌렸다.
“오베르데 변경백은 어찌 되었나요.”
변경백을 언급하자마자,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화사해졌다.
“변경백이 이번에 제대로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가 망신당할 일도 있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바지가 벗겨진 채 분수대에 엎어진 꼴로 발견되었지 뭡니까?
때마침 연회가 끝날 즈음이라 몰려나오던 귀족들이 전부 그 추태를 보았는데…….”
그때 자신도 함께 있었다며, 그녀는 허옇게 궁둥이를 까고 엎어져있던 변경백의 모습을 꽤나 상세하게 묘사했다.
“다리도 하나 부러졌다고 하니 당분간 절뚝거리느라 얌전할 겁니다.”
“하지만 변경백은 대단한 주당이잖아요. 술에 취하더라도 정신을 잃거나 큰 실수 하는 일은 없다고 들었건만…….”
“어디서 독주라도 받아 마시지 않았겠습니까. 아니면 약이라도 했거나.”
멜리사 백작부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녀의 태도로 보아, 변경백이 레아를 욕보이려 했던 일은 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성공한 것도 아니고 미수로 끝난 일이었다. 변경백에게는 패배로 여겨졌을 테고, 그것이 부끄러워 알아서 뒷수습을 한 듯했다.
말할까 말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말해봤자 우울한 감정만 뱉어놓고 끝이지, 그 이상으로 나아갈 방도가 없었다. 백작부인에겐 상처만 될 터였다.
그리고 레아가 짧은 상념에 잠겨있는 동안, 멜리사 백작부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소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질 못하여 생겨난 정적이었다.
잠깐 가벼워졌던 분위기는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백작부인이 레아를 불렀다.
“왕녀님.”
레아는 그녀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임을 눈치챘다.
여태까지는 그 말을 못 꺼내서 빙빙 돌기만 한 것이고 말이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계속 입술만 말아 물고 있던 백작부인은 몹시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왕녀님의 의복은 다른 이들을 물리고 저 혼자 갈아입혀 드렸습니다.”
주름진 눈매에 담긴 눈동자는 온갖 감정들로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 원치 않으신 관계를 맺으신 겁니까.”
이샤칸은 레아의 몸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겨놓았다. 씹고 물어뜯은 자국을 비롯하여, 허벅지나 엉덩이에 손자국까지 내놓았다.
영역표시를 하듯 남겨놓은 정사의 흔적은 거칠어 보인다는 말로도 부족한 수준이었다.
멜리사 백작부인이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레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원해서 맺은 관계예요.”
“서, 설마, 상대가……. 야만족, 아니 쿠르칸의 왕과…….”
레아와 살을 섞었다 하니 차마 야만족이라 칭하진 못하고 급하게 고쳐 부르면서도, 그녀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레아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멜리사 백작부인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에게 레아는 가장 중요한 부분부터 언급했다.
“혼전순결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진실도, 거짓도 아닌 애매한 회색이었다.
이미 순결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첫날밤을 치른 후 모든 것을 끝낼 생각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멜리사 백작부인은 레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알아들으리라.
“그리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냉정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덮어씌웠다.
“그와 깊은 관계가 될 생각은 없어요. 그냥 잠깐 스치는 인연일 뿐이에요.”
멜리사 백작부인은 더욱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한참 멍하니 있다가 레아를 불렀다.
“왕녀님…….”
절절한 부름에 차마 하지 못한 수백 마디의 말이 담겨있었다. 백작부인은 겨우 한 마디를 속삭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망연한 중얼거림에 레아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부인.”
정말이지 레아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레아가 예측할 수 없는 자였다. 번번이 예상에서 빗나갔고, 상상조차 못 해본 짓을 벌였다.
이샤칸을 만난 이후, 레아는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 * *
뛰듯이 걷는 블레언의 뒤를 비서관들이 바삐 쫓았다.
분기에 차 걸음을 옮기면서도, 블레언은 제 화를 주체하지 못해 연신 욕설을 지껄였다.
험한 욕설을 짓씹으며 그가 도착한 곳은 왕비궁이었다.
“여기서 기다려라. 혼자 다녀올 것이다.”
비서관들을 왕비궁 앞에 세워놓고, 블레언은 홀로 궁 안으로 들어섰다. 왕비궁은 에스티아 왕궁에서 가장 화려한 장소였다.
눈썰미 좋은 세르디나는 왕궁에 넘치는 예술품들 중에서도 가장 귀하고 비싼 것들을 고르고 골라서 전시해놓았고, 구석구석을 금과 보석으로 치장해놓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궁은 어딘가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블레언은 혐오스러운 눈으로 궁 안의 조각상들을 흘깃 보았다가, 복도를 가로질러 알현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알현실 안에서는 세르디나와 그녀의 친부인 웨들턴 백작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왕태자 저하!”
쾅 소리 나게 문을 열어젖힌 블레언 때문에 웨들턴 백작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세르디나는 태연하게 블레언을 맞이했다.
“어서 오너라.”
세르디나의 무릎 위에는 여우모피가 놓여있었다. 그녀는 여우털을 쓸어 보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네가 잡아준 여우로 목도리를 만들 생각이란다.”
회색 여우의 도톰한 털이 목도리를 만들기에 딱 알맞더라며 세르디나는 즐거워했다. 블레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진실을 일깨웠다.
“제가 잡아드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르디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매정히 굴지 말렴. 너와 함께 사냥에 나갔던 기사가 잡아주었으니, 네가 잡아준 것이나 다름없잖니.”
그 기사는 너의 사람이 아니냐며, 그림처럼 미소 짓는 그녀는 완벽했다. 흠집 하나 없이 매끄러운 미소는 일견 기괴하기까지 했다.
웨들턴 백작은 눈치를 흘금 살피다가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블레언도, 세르디나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웨들턴 백작이 허둥지둥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시중을 들고 있던 시녀들도 그림자처럼 조용히 물러났다.
단 둘만이 남은 알현실에서, 블레언은 세르디나를 노려보았다.
“어머니가 하신 일입니까?”
“무엇을?”
“왕녀가 오늘 피를 보이며 혼절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리 만드셨느냐고 묻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