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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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들어도 명백한 도발이었다. 블레언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화를 참으려 저러는 것이었다.
“무서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간신히 답하는 목소리에는 이미 분노가 들끓었으나, 블레언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무려 평화를 위해 화친 협정을 맺으러 직접 에스티아를 찾아오셨는데……. 설마 전쟁을 원하여 오신 것은 아닐 테고.”
그의 목소리가 서리 품은 겨울바람처럼 냉랭했다.
“주인이 있는 물건을 탐내시는 분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주인…….”
이샤칸은 블레언의 말을 되씹으며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두 남자 사이에 끼인 레아는 세르디나를 흘긋 살폈다.
그녀는 즐거워 보였다. 평소 같으면 아들이 무시당하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했을 터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레아는 세르디나의 기쁨을 눈여겨봐두었다.
이샤칸 또한 그런 세르디나에게 잠시 눈길을 주더니, 이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재밌는 사냥이 될 것 같습니다.”
레아는 그의 금색 눈동자 위로 반들거리는 광채가 감도는 것을 보았다.
“기대하겠습니다.”
이샤칸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섰다. 블레언은 이샤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레아를 끌고 그대로 제 막사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냥 준비를 하는 동안 가만히 옆에 서있도록 했다.
레아는 블레언이 활시위를 당겨보고, 말의 안장을 확인하는 모습 따위를 꼼짝없이 지켜보았다.
모든 준비를 끝마쳤을 때, 블레언은 그제야 레아를 돌아보았다.
“레아.”
손을 까닥이는 그에게 레아는 아무 말 없이 미리 준비했던 손수건을 건넸다. 대충 왕녀궁에 굴러다니는 아무 손수건이나 주워온 것이었다.
블레언도 그 사실을 알 텐데, 꼬투리를 잡지 않고 낚아채갔다. 그냥 손수건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았다.
블레언은 레아가 준 손수건을 제 손목에다 묶으며 물었다.
“사슴 뿔 갖고 싶어? 아니면 여우 꼬리도 괜찮지.”
답하지 않으면 집요하게 괴롭힐 테니, 그냥 대강 떠오르는 대로 답했다.
“늑대 모피가 갖고 싶어요.”
하고 많은 짐승들 중에서 가장 먼저 늑대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샤칸을 생각하느라 저리 된 것이었다.
“알겠어, 누님.”
블레언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이 웃었다. 그는 항상 레아가 고분고분하게 구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블레언이 제 손목의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어. 가장 큰 놈으로 잡아줄 테니.”
그리고 종자들을 이끌고 말을 몰아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레아는 옆을 돌아보았다.
쿠르칸들 또한 사냥 준비를 마치고 말 위에 올라타는 중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전부 흔한 말채찍 하나 손에 들고 있지 않았는데, 굳이 그런 도구가 없어도 능숙히 말을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쿠르칸에게 배정된 사냥개들도 몰이꾼들이 놀랄 만큼 얌전하게 굴었다. 따로 소리 지르거나 먹이로 훈련시킬 필요가 전혀 없을 정도였다.
그저 짧은 휘파람이나 작게 두드리는 손짓만으로도 짐승들은 복종했다.
시중을 들어주던 종자들은 그 광경을 신기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쿠르칸이 짐승과 가깝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낀 탓이리라.
겉가죽은 사람과 비슷해도, 결국 쿠르칸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쿠르칸을 관찰하던 레아는 이샤칸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고, 왕녀에게 배정된 막사로 돌아왔다.
시녀들에게 앞쪽 천막에서 쉬고 있으라 하고, 막사 안에서는 홀로 휴식을 취했다.
조금 쉬다가 세르디나가 부르면 그때 매 사냥을 하러 나갈 것이었다.
오랜만에 세르디나와 단둘이 있는 자리다. 그녀와 함께 있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
레아는 막사 안을 천천히 걸었다. 얼마간 서성거리다가, 품 안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냈다.
깨끗한 하얀 바탕에 금실로 네 귀퉁이에 에스티아식으로 자수를 놓은 손수건이었다. 레아가 평소 아끼며 종종 들고 다니던 것이었다.
사실 오늘 이샤칸에게 주고 싶어서 챙겨 왔는데, 보는 눈이 많아서 망설이다가 결국 때를 놓치고 주지 못했다. 레아는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옅은 후회가 잔잔하게 마음을 덮었다.
남들이 보든 말든 그냥 줘버릴 것을…….
한 번쯤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항상 생각만 할 뿐이었다.
레아는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손수건을 들고서 천막 안을 서성서성 걸어 다니던 레아는 우뚝 멈춰 섰다. 괜히 속상한 마음에 손수건이 미워졌다.
바닥에 내던져버릴까 하다가, 꾹 참고 얌전히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왕녀의 품위는 지켜야 했다. 턱턱 막히는 속을 억지로 내리누르던 때였다.
“……!”
레아는 비명조차 못 지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누군가 뒤에서 와락 끌어안은 것이다. 후끈한 온기와 시원한 향이 느껴졌다.
남자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커다란 손으로 레아를 돌려 안았다.
한 손으로는 허리를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얼굴을 감싸고서 조급하게 입을 맞춰왔다.
치아가 입술을 조금 아프게 깨물더니, 말캉한 혓바닥이 사이를 가르고 파고들었다.
그가 온통 밀어대는 통에 정신없이 뒷걸음질 치면서 겨우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발뒤꿈치에 무언가 걸리면서 몸이 뒤로 확 넘어갔다.
레아는 기다란 소파에 몸을 뉘게 되었다.
양손목이 단단한 손에 내리눌리고, 은색 머리카락이 사방에 흐트러졌다.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금색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서 레아를 내려다보았다. 다정하게 코끝을 부비며 그가 인사했다.
“안녕.”
레아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세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가슴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샤칸은 상기된 레아의 뺨을 슬쩍 핥았다.
“놀랐어?”
놀라긴 했지만 그보다도 다른 감정이 더 컸다. 그가 반가워서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도록, 레아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샤칸은 그런 레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내게 줄 것이 있지.”
맡겨놓은 것을 찾아가듯 당당한 요구였다. 주술은 집시가 아니라 이샤칸이 부리는 게 아닐까.
어쩜 저리 얄미울 정도로 사람 마음을 잘 꿰는지 모를 일이었다. 레아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실토했다.
“……있어.”
그리고 아까 품속에 접어 넣었던 손수건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시도에 그쳤다. 이샤칸이 손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놓아달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이샤칸은 웃기만 했다.
“내가 찾아볼까.”
그는 레아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양쪽 손목을 한 손에 그러쥐었다.
이샤칸의 손이 크다고는 생각했으나, 손목 두 개를 이렇게 가뿐하게 쥐고도 남을 줄은 몰랐다.
한 손은 레아를 붙들어 놓고, 다른 쪽 손으로 몸을 어루만졌다. 가죽장갑을 낀 손이 목을 어루만지다 가슴 위를 둥글게 쓸었다.
“여기 사이에 숨겨놓은 것 같은데.”
“아니야!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놔……!”
레아가 바르작거리니 이샤칸은 더욱 재밌어했다. 그가 얼굴이며 목덜미에 온통 입을 맞춰대는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레아는 겨우 이샤칸을 밀어내고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나 이미 치맛자락은 허벅지까지 걷어 올려진 뒤였다.
이샤칸이 무릎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더니, 드레스 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감춰진 다리 사이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가 레아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탓인지 느껴지는 감촉이 이상했다.
살짝 차가운 가죽의 느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쉽네. 시간이 없어서.”
시간이 있었으면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저리 말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레아는 얼른 벌어진 다리 사이를 모았다.
이샤칸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두 명의 무게에 눌려있던 소파가 겨우 살았다는 듯 삐걱거리며 비명 질렀다.
오늘 그가 검까지 차고 있어서 더욱 무거운 탓이었다.
새삼스럽게 그를 살폈다. 활과 화살통은 말에 달아놓았는지 보이지 않고, 검만 한 자루 차고 있었다.
검은 가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가죽끈과 함께 허리춤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샤칸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그라면 아주 능숙하게 잘 다룰 것 같았다.
이샤칸은 레아가 준 손수건을 검손잡이에 묶었다. 저러면 다들 누구에게 손수건을 받았는지 궁금해할 터였다.
말려야 하나 생각하던 레아는 뒤이은 이샤칸의 질문에 그냥 관두었다.
“짐승은 무얼 잡아다줄까.”
이샤칸은 사냥이 끝나면 제게 짐승을 갖다 줄 터였다.
굳이 손수건이 아니더라도, 저와 이샤칸을 두고 수군거릴 말거리는 충분히 널려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제멋대로 떠들고 씹어댈 사람들인데…….
거기까지 생각한 레아는 자신이 굉장히 과격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혼자서 놀랬다. 정말 이샤칸을 닮아가는 모양이었다.
“……블레언이 무슨 생각으로 당신을 불렀는지 모르겠어.”
레아는 사냥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샤칸은 소파에 앉은 레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서열정리를 하자는 것이겠지. 제가 자신 있는 것으로 승부를 겨뤄서. 왕비는 잔꾀를 품었을 수도 있겠지만, 왕태자는 그 정도 수준이야.”
겨우 그런 이유로?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샤칸은 태연했다. 그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여기는 눈치였다.
“본래 사랑에 빠진 이는 어리석은 법이지.”
뜬금없이 사랑을 언급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해하질 못하는 레아를 보며 이샤칸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이것 봐, 레아.”
그가 눈매를 길게 접으며 살짝 눈웃음 지었다.
“나도 꽤나 멍청하게 굴고 있지 않나.”